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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98)화 (98/120)
  • 98화

    “걱정 끼쳐서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는데…….”

    “이네스.”

    “……윽, 흐윽.”

    이네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손바닥을 적시고 옷소매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나,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단단한 팔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했다.

    오랫동안 겨울 설원을 헤매던 여행자가 난로 앞의 온기를 찾듯이.

    간절하게 에녹의 품 안을 파고든 이네스는, 그대로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에 맺힌 고통을 서리서리 풀어내듯 길고 서러운 울음이었다.

    ❀ ❀ ❀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약간 진정한 이네스는 에녹과 마주 앉았다.

    “추태를 보였네요, 죄송해요.”

    비록 이네스의 눈가는 눈물 때문에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으나, 진녹색 눈동자만큼은 평소처럼 총명하게 빛났다.

    에녹은 그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네스 당신은…….”

    “한참 울었더니 머리도 좀 맑아졌어요, 고마워요.”

    이네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펑펑 흐느껴 울었던 사람답지 않게 무척 냉철했다.

    “조금 생각해 봤는데, 샬럿이 어떻게 저를 음해할 수 있었는지부터 수상해요.”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죠?”

    “샬럿은 한때 절친한 제 친구였고, 그래서 샬럿의 집 사정 정도는 저도 잘 알아요.”

    이네스는 못내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제 서명을 조작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를 고용하려면, 인맥도 넓어야 하고 금액 또한 상당히 많이 들 텐데…….”

    “제이슨 남작 영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맞아요.”

    고개를 끄덕인 이네스가 재차 말을 이었다.

    “게다가 샬럿과 함께 저를 고발했던 그 귀족…….”

    “핸슨 백작을 말하는 겁니까?”

    “네. 샬럿의 인맥으로는 핸슨 백작을 찾아내어 접촉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을 거예요. 비록 시골에 묻혀 살던 이름 없는 귀족이라지만, 샬럿보다 신분이 높으니까요.”

    진녹색 눈동자가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그런데도 샬럿은 기어이 백작을 찾아냈고, 그의 도움을 얻었죠.”

    “조력자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이네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그 질문을 긍정했다.

    “제 생각으로는 그래요.”

    “확실히…… 단독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하기에는 워낙에 일을 커다랗게 벌여 놓기는 했죠.”

    에녹 또한 이네스의 말에 동의했다.

    비록 그 존재감 자체는 희미하다지만, 무려 백작위를 가진 귀족을 끌어들였고.

    황색 언론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인터뷰까지 진행했으며.

    심지어는 이네스의 서명까지 위조한 증여 증명서까지 증거랍시고 내놓았다.

    객관적으로, 샬럿은 혼자서 이 모든 일을 해낼 역량이 없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브라이어튼 백작가는 랭커스터에서도 명문가로 손꼽히는 가문이에요.”

    이네스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고작해야 샬럿을 지원하기 위해 브라이어튼 백작가를 적대하려면, 그만큼의 대가가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겠죠. 그러니 그 부분부터 조사해 볼까 해요.”

    “그렇군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녹이 피식 웃었다.

    “딴소리지만 좀 마음이 놓이네요.”

    “마음이 놓인다니요?”

    “이제야 제가 알던 이네스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요.”

    “…….”

    정말로 안도한 것 같은 에녹을 마주하며, 이네스는 다소 멋쩍어졌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도 에녹 앞에서 펑펑 울었었지…….’

    이혼할 때도 그렇고, 이번 칼도로프의 개인전에서도 그렇고.

    어째서 에녹 앞에서는 자꾸만 허술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

    “이네스.”

    “네?”

    그녀를 부르는 차분한 목소리에, 이네스는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르게 했다.

    에녹의 애정 어린 시선이 한참을 이네스에게로 머물렀다.

    그러고는 재차 말을 잇는다.

    “저는 당신을 떠나지 않습니다.”

    응?

    뜻밖의 말에, 이네스가 두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에녹은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이었다.

    “저는 당신이 제게 도움이 된다거나 하는 이유로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

    이네스가 멈칫했다.

    지금의 에녹은 마치, 그녀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 어떤 모습을 보인다 해도.”

    에녹이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그 때문에 제 애정이 변할 일을 없을 겁니다.”

    “……에녹.”

    “그러니까 다시는 제게 피해가 될 것 같다고 지레짐작하여, 저를 피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솔한 목소리였다.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던 이네스가, 이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참 이상했다.

    에녹이 그녀 앞에 설 때마다, 온몸을 좀먹던 두려움과 불안함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는 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감정은…….

    ‘따뜻해.’

    진한 안도감이었다.

    ❀ ❀ ❀

    한편, 그 시각.

    고트 자작가의 타운하우스에서는 뜻밖의 소란이 일어났다.

    고트 자작 대부인이 느닷없이 제 아들의 방으로 쳐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라이언, 라이언!!”

    “으…… 시끄러.”

    그러나 라이언은 제 어머니의 수선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옹송그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 뿐.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이언은 간밤에도 술집 몇 군데를 전전할 뿐, 귀가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고.

    보다 못한 고트 자작 대부인이 하인을 보낸 후에야, 아침에 가까운 새벽녘에 타운하우스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술 냄새!”

    고트 자작 대부인은 질색을 하며 창문을 밀어 열었다.

    바깥의 차갑고 맑은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자, 라이언이 왈칵 짜증을 냈다.

    “아, 뭐 하는 거야?! 춥다고!!”

    “지금 네가 그렇게 누워 있을 때야?!”

    고트 자작 대부인이 와락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는 라이언의 코끝에 신문을 들이댄다.

    “정신 차려라, 이 계집애가 무어라고 떠들어 대는지 좀 보라고!”

    “아니, 도대체 뭐기에 이 난리…….”

    그 채근을 이기지 못하고, 라이언이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평소 귀족 가문에서는 질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거의 구독하지 않는 황색 신문.

    그 신문의 첫 면에는, 활짝 핀 장미처럼 화사한 미모의 샬럿이 실려 있었다.

    “……샬럿?”

    라이언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샬럿 이 계집애가 너에 대해 제멋대로 떠들어 대지 않니!”

    고트 자작 대부인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데도 넌 이대로 그냥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생각이야?!”

    사실 인터뷰 내용만 보면 자작 대부인이 저렇게 길길이 날뛸 만도 했다.

    샬럿의 주장은 대충, 라이언이 자신을 유혹했고 저는 그저 농락당했을 뿐이라는 내용이었으니까.

    가만히 있다가 뺨을 맞은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라이언이 주목한 부분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어…… 잠깐만.”

    라이언이 신문을 와락 움켜쥐었다.

    술기운에 몽롱했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그 기이한 모습에, 고트 자작 대부인이 의아한 얼굴로 제 아들을 불렀다.

    “라이언, 얘야?”

    그러거나 말거나, 라이언은 신문을 뚫어져라 들여다볼 따름이었다.

    라이언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증여 계약서라고……?”

    그 순간, 라이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왕립예술협회장, 어셔 후작.

    라이언과 자주 교류했던 사람이었다.

    더 정확히는 친우로서 나누는 교류라기보다는, 값비싼 식사도 먹이고 고급술도 대접하며 은밀한 향응을 제공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어떻게든 예술협회장에게 딸랑거려서라도 왕립예술협회의 일원으로 들어가려는, 피나는 노력이었다.

    물론 어셔 후작은 이네스와의 대리 화가 문제 이후, 라이언을 끊어 냈지만…….

    ‘그 개자식, 내가 먹인 술이 몇 병인데!’

    순간 머리에 훅 열이 오르는 통에, 라이언은 속으로 욕설을 짓씹어 뱉었다.

    ‘하여튼, 어셔 후작이라면.’

    라이언이 어셔 후작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제자 때문이었다.

    어셔 후작은 랭커스터에서도 드물게 도제식 가르침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제자들 중에 손재주가 무척 좋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듣기로는 열두어 살 내외의 어린아이라고 하던데…….

    ‘그 자식, 내가 아니었으면 길거리에서 빌어먹을 놈이었어!’

    어셔 후작이 술잔을 휘두르며 쩌렁쩌렁 목소리를 높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렇게 제 제자가 눈꼴이 시면, 차라리 일찍 놓아주는 편이 나을 것을.

    어셔 후작은 그 제자의 찬란한 재능을 질투하면서도 계속해서 제자를 제 아래에 두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자를 자기 밑에 두어야, 그 제자가 빛을 보지 않을 테니까.

    제자의 싹을 미리 짓밟아 둘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제자의 재능은 ‘세밀화’였다.

    한 번 봤을 뿐인 풍경이며 물건도 무척 세밀하게 그린다고 들었었는데.

    ‘……설마?’

    라이언의 눈동자가 음험하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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