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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97)화 (97/120)

97화

똑똑.

때마침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이네스는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반응할 기력조차 없어서였다.

“가주님.”

한참을 기다렸음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간절한 목소리가 다시 이네스를 불렀다.

메리였다.

“괜찮으신가요? 벌써 며칠 동안이나 밖에 나오시지 않으셔서…….”

이네스가 타운하우스 안 아틀리에에 틀어박힌 이래로, 메리는 이네스를 걱정하느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메리의 그런 초조한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괜찮아.”

결국 이네스는 잔뜩 쉰 목소리로나마 그렇게 대답했다.

오랜만에 듣는 제 목소리가 무척 낯설었다.

그저 대답만 해 주었을 뿐인데, 메리의 목소리가 활짝 밝아졌다.

“세상에, 가주님!”

“괜찮으니 날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냥 조금만 혼자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래.”

“네, 그 마음 이해해요. 하지만 저…….”

한참을 머뭇거리던 메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손님께서 찾아오셔서요.”

“손님?”

“네. 서식스 공작께서 며칠간 꾸준히 방문하고 계세요.”

순간 이네스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에녹.’

애써 묻어 두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그를 다시 떠올리자마자, 사금파리를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따끔거렸다.

“돌아가시라고 말씀드려.”

이네스는 다소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하다고도 꼭 전하고. 또한, 앞으로는 나를 찾아오지 말라고…….”

찾아오지 말라고.

그 말이 송곳처럼 심장을 푹 찌른다.

이네스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이게 맞아.’

에녹은 이네스를 발굴하고, 예술가로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었다.

비록 처음의 만남은 이네스가 청한 거래였을지언정, 그 후의 에녹은 그녀에게 헌신적이었다.

에녹이 그와 그녀 사이의 친밀함을 감추지 않았기에.

오히려 만천하에 드러냈기에…….

‘나 때문에 에녹이 피해를 보게 된 거야.’

이네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나와의 친분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에녹의 명예에도 더욱 해가 될 거야.’

그러니 이게 맞았다.

최소한 샬럿의 일이 완벽하게 정리되기 전까지는, 에녹과도 거리를 두는 편이…….

그런데 그때.

“브라이어튼 백작.”

순간 이네스는 소스라쳤다.

저 목소리.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어째서 에녹이 여기에!’

기겁한 이네스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메리, 서식스 공작께서는 우리 타운하우스에 오시면 안 된다고……!”

“죄송해요, 저는…….”

“메리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에녹 특유의 우아한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며, 우겨서 들어온 것이니까요.”

“……서식스 공작 각하.”

이네스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브라이어튼 타운하우스에 칩거한 이유 중에는 에녹도 있었으니까.

일부러 에녹과의 만남을 최소한으로 줄임으로써, 사람들이 에녹을 두고 입방아를 찧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아 보려 함이었다.

그런데 에녹이 이렇게 대놓고 이네스를 찾아왔다니…….

“일단 문을 좀 열어 주겠습니까?”

에녹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네스는 그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달칵.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온통 초췌한 이네스의 얼굴이 드러났다.

에녹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

어두운 표정.

잔뜩 움츠러든 양어깨.

이네스는 두 눈을 내리깔아 에녹의 시선을 피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찾아오시면 안 돼요.”

“이네스.”

“저와 함께 계시면…… 공작 각하의 명예에도 해가 될 거예요.”

그렇게 에녹을 설득하며, 이네스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어.’

어떻게든 에녹에게만큼은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네스를 구원해 준 사람이었으니까.

에녹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녀의 손을 맞잡은 것을 후회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나 때문에…….’

아무리 타운하우스에 칩거하고 있다 한들, 외부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네스에 대한 논란이 거세질수록, 에녹의 안목까지 의심받게 될 것이다.

‘저 빛나는 사람이…… 나와 함께 진창에 나뒹굴게 된다면?’

그런 생각만 하면, 커다란 얼음 조각을 삼킨 것처럼 뱃속이 차가워졌다.

한편, 에녹은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이네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에녹은 성큼 아틀리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달칵.

방문이 닫혔다.

이네스는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막막한 얼굴로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에녹이 빙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공작 각하가 아니라 에녹이라고 불러 주기로 했잖습니까?”

“…….”

이네스는 순간 말을 잃었다.

에녹은 여전히 그녀가 알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정하고 침착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는, 그녀를 질책하는 기색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오히려 이네스는 더더욱 죄스러웠다.

“……미안해요.”

이네스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에녹은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무엇이 미안합니까?”

“이번 논란 때문에, 에녹에게도 이런저런 구설수가 따라붙고 있잖아요.”

커다랗게 심호흡을 한 이네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만 아니었더라면 그런 뒷말은 들을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제가 마땅히 사과드려야 할 문제이지요.”

“아뇨, 그건 이네스의 잘못이 아니죠.”

에녹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서류가 조작되고, 가짜 서명이 만들어짐으로써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에녹.”

“당신은 그저 피해자일 뿐인데, 어째서 제게 사과하십니까?”

에녹이 차분하게 되물었다.

그럼에도 이네스는 그저 죄스러웠다.

차마 에녹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그래도 저와 얽히지 않았더라면, 에녹은…….”

“이네스.”

에녹은 드물게 이네스의 말을 중간에서 잘라 냈다.

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이네스에게 사과를 듣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게 아닙니다.”

그 말에, 이네스가 젖은 눈동자로 에녹을 응시했다.

비에 젖은 수풀처럼 착 가라앉은 시선이었다.

에녹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전 평생을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살아왔습니다.”

그 말에, 이네스가 반사적으로 흠칫 어깨를 굳혔다.

에드워드와 에녹 사이의 왕위 계승 문제와, 중간에 끼어들어 제멋대로 형제 사이를 분탕질을 해 놓은 귀족들의 문제까지.

모조리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 때문에 온갖 구설수를 견디게 되었어.’

그렇게 이네스가 다시 한번 자책하려던 차.

에녹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네스 당신은, 사람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제가 난생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사람이에요.”

“…….”

내내 절망에 젖어 있던 진녹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머리를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이네스를 향해.

에녹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을 제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 없지 않습니까?”

“하, 하지만…….”

“제 사랑은 그렇게 가볍지 않아요.”

그 진솔한 고백에, 이네스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에녹의 눈빛이 조금 흐려졌다.

“오히려 제가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네? 어째서…….”

“당신이 이렇게 혼자서 힘들어하고 있었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에녹은 정말로 괴로워 보여서.

정말로 이네스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네스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힘든 일을 극복하는 방식은 개개인마다 다르고, 이네스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대로 두었었습니다만.”

상냥한 손길이 이네스의 뺨을 어루만지고, 메마른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아무래도 그래서는 안 되었던 것 같아요.”

“…….”

순간 이네스는 울컥했다.

그녀 때문에, 에녹 또한 평소 그렇게나 기피하던 사람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게 된 상황임에도.

에녹의 태도에서는 그에 대한 불쾌감은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진심으로 이네스를 염려할 뿐.

“당신이 정말로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당신 곁에 조금 더 빨리 있어 주지 못해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저 그것이 미안할 따름입니다.”

“왜 에녹이 사과하세요?”

이네스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울음을 삼키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에녹이 사과할 일이 아닌데. 제가, 저야말로…….”

한 방울, 두 방울 툭툭 떨어지던 눈물이, 오랫동안 막혀 있던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터져 나왔다.

그녀 힘으로는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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