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96)화 (96/120)
  • 96화

    “그렇죠, 왕국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죠.”

    “그리고 백작님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도록 은밀하게 상대 귀족분과 접촉하기를 바라셨고요.”

    샬럿은 아련한 표정으로 입술을 사려 물었다.

    “아마 그랬기에 백작님께서는 저를 선택하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는 백작님과 사이가 너무나도 나쁜 사람이니까, 그렇기에 저와 백작님의 결탁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테니까요.”

    얼핏 듣기로는 그럴듯한 말이었다.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인 기자가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제이슨 남작 영애께서는 어째서 브라이어튼 백작을 도우신 겁니까?”

    “그건…….”

    잠시 머뭇거리던 샬럿이 결심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제가 백작님을 돕는 대신, 백작님께서는 제 어려운 생활을 원조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어요.”

    “브라이어튼 백작께서 그런 약속을 하셨다고요?”

    “네. 더 나아가…… 엉망이 된 제 사교계 평판을 회복하는 데에 도움을 주신다고도 하셨고요.”

    샬럿이 촉촉한 두 눈을 내리깔았다.

    나비처럼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샬럿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기자가, 다시 인터뷰를 진행해 나갔다.

    “그렇다면 브라이어튼 백작이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는요?”

    “증여 문서가 있어요. 그 문서에…….”

    가슴이 복받쳐 오르는지, 샬럿은 한참을 두 눈을 감고 감정을 다스렸다.

    그 후.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조그마한 목소리가 울렸다.

    “브라이어튼 백작께서 직접 서명을 하셨어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기자의 본분은 냉철함이었으나, 슬프게도 샬럿을 인터뷰하던 기자는 그 본분을 지키지 못했다.

    화들짝 놀란 기자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치떴다.

    “그러니까, 물증이 있다는 말이지요?”

    “네. 서명 감식을 해 봐도 돼요.”

    샬럿이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부러 구슬픈 목소리를 내어 말을 이었다.

    “물론 제가 뇌물 거래에 끼었고, 브라이어튼 백작님을 도운 건 사실이에요.”

    “세상에, 제이슨 남작 영애.”

    “다만, 뒤늦게나마 이렇게 제 죄를 고백하는 이유는…….”

    새하얀 뺨 위로, 다시 한번 구슬 같은 눈물이 넘쳐흘렀다.

    샬럿은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를 이 자리에 나오게 한 가장 결정적인 감정은 두려움이었어요.”

    “두려움이요?”

    “네. 백작님께서 이번 거래에 대해 제게 입막음을 시도하실까 봐, 너무나도 불안하고 무서워서……!”

    샬럿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가냘프게 어깨를 떨었다.

    “죄를 지었으면 정당하게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염치없지만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샬럿의 말이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네스와 샬럿이 철천지원수라는 사실은 제외하더라도, 이네스는 랭커스터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의 가주였으니까.

    굳이 샬럿이 아니더라도 이미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많았기에,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샬럿을 제 편으로 회유할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상식적으로 뇌물이 오갈 때에는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하는 게 보통이었다.

    혹은 상대방이 배신할 것을 대비하여 장부 등을 만들어 두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장부는 거래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보관한다.

    상대의 손길이 닿을 여지조차 없도록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 나온 증거는 ‘이네스의 서명’이 담긴 증여 증명서였다.

    솔직히 이네스가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범죄를 증명하는 증여 증명서에 직접 서명을 할 리가 만무했으나…….

    “세상에, 저 가냘픈 아가씨가 브라이어튼 백작의 압박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솔직히 말해서, 제이슨 남작 영애처럼 한미한 하급 귀족이 어떻게 브라이어튼 백작과 대놓고 맞설 수 있겠어요?”

    상황이 기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전에 이네스가 이혼했던 과정까지 은근슬쩍 문제 삼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거기에 이네스를 적대하는 왕립예술협회와, 이네스가 여태껏 보였던 행보를 눈꼴시어 하던 일부 귀족들도 힘을 실어 주었다.

    특히 몇몇 사람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를 쳤다.

    이네스에게 은근히 불만이 있었지만 그를 표출하지 못하던 귀족들은, 대놓고 샬럿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이슨 남작 영애가 고트 자작 영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것도, 자작 영식이 압박을 넣어서 그랬던 것뿐이라는 이야기가 돌던데요.”

    “그렇다면 브라이어튼 백작이 괜히 생사람을 잡은 것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연약한 제이슨 남작 영애에게 화풀이를 한 건 아닌지…….”

    “뭐, 진실이야 누가 알겠냐마는…… 여태껏 브라이어튼 백작이 보였던 드센 모습만 생각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요.”

    실제 샬럿을 아는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에 흥미로운 사건이었기에, 대중들의 이목은 단숨에 샬럿에게로 쏠렸다.

    무엇보다도, 장미처럼 화사한 미녀가 뚝뚝 눈물을 떨어뜨리며 하소연하는 모습은 무척 자극적이었으니까.

    그렇게 여론이 험상궂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정말로 브라이어튼 백작이 학교를 세우도록 그대로 내버려 둬도 되는 걸까요?”

    “막말로 학교를 설립하려는 목적이 순수한지는 어떻게 압니까?”

    “맞습니다, 학교는 구실일 뿐 저런 식으로 부적절한 이득을 편취하기 위함일 수도 있어요!”

    사람들은 제각기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상황도 불리했다.

    이네스가 세우려 하는 것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였고, 그녀가 내건 기치 또한 ‘아이들을 최대한 차별 없이 가르치려 노력하겠다’였으므로.

    “학교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곳인데, 저렇게 논란 많은 사람이 학교를 설립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둬도 되는 겁니까?”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학교 설립은 시시비비가 가려질 때까지 미루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혹여나 아이들이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영향이라도 받으면 큰일이잖습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아이들을 위하는 척, 이네스를 음해하는 말들을 떠들어 댔다.

    한편 이네스는 당연히 저 증여 증명서가 가짜임을 주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네스는 실제로 그 서류에 서명한 적이 없으니까.

    칼도로프로 출국했다가 돌아온 이래로, 이네스는 학교 문제로 워낙에 바빴다.

    갓 연인이 된 에녹조차 얼굴 보기가 쉽지 않은 마당에, 샬럿을 만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이네스는 샬럿이 증거로 내민 증여 증명서를 목도하고는 깊은 충격에 빠졌는데.

    “세상에, 이럴 수가…….”

    샬럿이 자신만만해했던 이유가 있었다.

    증여 증명서에 남아 있는 서명이, 정말로 이네스 자신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똑같은지, ‘혹시 내가 정말로 저 서류에 서명을 한 게 아닌가?’라는 의심까지 들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몇 명이나 되는 서명 감별사들이 찾아와 서명을 감별해 보았으나…….

    ‘브라이어튼 백작의 것이 맞습니다.’

    그렇게 선언할 정도였다.

    사실 그 판정은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이네스 자신조차 혼동이 올 정도로 정교한 서명이었으니까.

    그렇게 이네스를 둘러싼 혼란은 계속 깊어졌다.

    흡사 누구 하나를 낙점하여 무너뜨리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을 것처럼.

    ❀ ❀ ❀

    어두운 아틀리에 안.

    이네스는 우두커니 선 채, 제가 그린 수많은 그림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최근작으로 넘어갈수록 완성작은 하나도 없었다.

    ‘……못 그리겠어.’

    이네스는 떨리는 눈으로 제 양손을 들여다보았다.

    샬럿이 황색 언론을 통해 터뜨렸던 가짜 폭로 이래로, 이네스는 붓은커녕 연필조차 쥐지 못하는 상태였다.

    사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샬럿은 이네스를 음해하고 있으며, 이네스는 언젠가 밝혀질 진실을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한가하게 절망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까지도.

    하지만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이네스가 대응할 수 있었던 건, 고작해야 대리인을 내세워 ‘그 증명서의 서명은 거짓이다’라고 발표한 것뿐이었다.

    그것조차 에녹이 발 벗고 그녀를 도운 덕택에 가능했다.

    증여 증명서에 새겨진 그녀의 서명이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해.’

    이성은 그렇게 이네스를 채근했으나,

    ‘움직일 수가 없어.’

    손가락조차 까닥하기 어려운 무기력함이 이네스의 발목을 잡았다.

    막다른 길에 몰린 기분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잘못된 일을 하고 있었던 걸까?’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일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문의 사재까지 털어서라도 진행하려 했었다.

    하나, 그녀가 진행했던 일의 결과를 보라.

    이네스를 적대하고, 그녀의 일에 훼방을 놓으려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지 않은가.

    어떻게든 이네스를 짓누르려는 저 거대한 악의 앞에서, 그녀는 어마어마한 무력감을 느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