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95)화 (95/120)
  • 95화

    헬레나는 한참을 이네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불쑥 선언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네?”

    “난 백작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고요.”

    “아…….”

    아무리 그래도 제 말에 이렇게 선선히 동조할 줄은 몰랐는데.

    이네스가 두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동시에, 헬레나가 차분하게 말을 덧붙였다.

    “또한, 국왕 폐하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이세요.”

    “그 말씀은…….”

    “왕실에서 백작의 학교 설립을 막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그 대답에는 이네스도 무척 놀랐다.

    왕립예술협회만큼 대놓고 반발하지는 않지만, 귀족계 또한 예술협회의 행보를 은밀히 지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은 귀족계의 불만까지 무시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헬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왕실 측에서도 원론적인 이야기밖에 하지 못하겠지만요. 큰 도움을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왕비 전하. 차고도 넘치는 도움입니다.”

    이네스는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답했다.

    그녀를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

    그녀가 옳다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야.’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한 남자의 다정한 미소를 떠올리며, 이네스는 단단히 마음을 다졌다.

    ❀ ❀ ❀

    이네스와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있은 후.

    왕비는 자신이 했던 말을 확실하게 지켰다.

    랭커스터 왕실에서는 이번 사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하지 않겠노라고 천명한 것이다.

    ‘브라이어튼 백작의 학교 설립을 막는 것에 대한 근거가 없다.’

    사실이었다.

    애초부터 사립학교는 이네스가 사재를 내어 만드는 학교였다.

    왕실의 재정을 쓰는 왕립학교라거나, 혹은 국민의 세금을 쓰는 국립학교도 아니었기에.

    왕실에서 이네스의 학교 설립에 제동을 걸 명분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왕실의 그 결정에, 다시 한번 사회 각층에서 제각기 목소리를 높였다.

    ‘교육에 관한 너무 과격한 접근은 사회에 혼란을 가져올 뿐입니다! 왕실에서 적절하게 제동을 걸어 줘야만 해요!’

    왕립예술협회는 왕실의 결정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왕실에서 현명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교육의 문은 그 누구에게도 열려 있어야만 해요!’

    반대로 평민들은 열렬한 지지를 표명했다.

    한편, 이네스는 사회 각계각층의 반발이나 지지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국의 유명한 예술가들을 교수로 모셔 오기 위해 연락을 넣고, 학교를 만들 부지도 살펴보며, 학교를 세우기 위한 행보를 이어 나갔다.

    당연히 왕립예술협회에서는 이네스의 행동이 눈꼴시었고, 그리하여 다시 한번 왕실을 찾아갔으나.

    ‘국민들이 그렇게 원한다면 우리는 반대할 명분이 없네.’

    부득불 저를 알현하러 찾아온 예술협회장 앞에서, 에드워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오히려 비공식이기는 하지만, 이네스가 세우려는 학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국민들의 논리가 사실 틀리지도 않아. 브라이어튼 백작이 학교를 세우면 랭커스터에 도움이 되면 됐지, 나쁠 것도 없잖아?’

    ‘예? 하지만 폐하!’

    예술협회장은 무어라 항변하려 했으나, 에드워드의 말이 좀 더 빨랐다.

    ‘게다가 국가 재정으로 예술협회에 주는 연금이며 특혜가 상당했는데, 그에 비해 성과가 다소 낮았던 것도 사실이잖나.’

    ‘그건……!’

    ‘나라면 괜히 학교 문제를 들쑤셔서 국민들의 분노를 사느니, 그냥 조용히 있을 것 같은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아픈 곳을 찔린 마당에, 할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사실 국왕이 직접 저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요새 평민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아니, 브라이어튼 백작이 사재를 털어 사립학교를 세운다고 하시는데 왜 귀족들이 왈가왈부입니까?’

    ‘애초에 교육기관이 늘어난다는 것 자체가 장차 랭커스터에게 도움이 되는 일 아닙니까!’

    ‘귀족들의 지나친 특권 의식 때문에, 평민들이 교육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요!’

    평민들이 주로 모이는 선술집에서, 저렴한 식당에서, 길거리에서.

    평민들이 두엇만 모였다 하면, 다들 이네스의 학교에 대한 화제를 꺼내 들었다.

    물론 처음에는, 왕립예술협회를 포함한 귀족 계층은 그 여론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고작해야 평민들 주제에, 무슨…….’

    ‘저렇게 조금 반발하다가 사라지겠지.’

    그 정도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국민들의 반응은 귀족들의 예상 이상으로 격렬했는데.

    그건 바로, 교육의 기회를 갖기 어려운 평민들은 ‘학교’라는 시설 자체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네스는 자신의 학교에서는 성별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이겠노라 공언했고.

    교육비 또한 기존 학교들 대비 무척 저렴하며, 심지어는 뛰어난 학생을 위한 장학 제도도 고려 중이라고 발표했다.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하는 국민들 입장에서는 눈이 돌아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래서야 우리의 세금이 낭비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잖아요!’

    ‘맞습니다! 국가에 세금은 꼬박꼬박 납부하면서도, 평민들을 가르치는 공립학교는 손에 꼽는 형국인데!’

    ‘굳이 브라이어튼 백작이 사재를 털어 만드는 사립학교까지 훼방을 놓을 필요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반발의 화살은 귀족들, 그리고 더 나아가 왕립예술협회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무엇보다도 왕립예술협회 사람들은 저렇게 주장할 자격이 없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원로 예술인입네 하며 어깨에 힘을 주는 사람들 중, 브라이어튼 백작 이상으로 제대로 성과를 낸 사람은 누가 있습니까?’

    ‘브라이어튼 백작은 교류전도 성공시켰고, 첫 개인전도 저 콧대 높은 칼도로프에서 치렀잖습니까!’

    ‘왕립예술협회에 이름만 걸어 두고, 저들끼리 연금이나 타 먹고, 친목이나 다지는 주제에!’

    ‘협회를 존속시키는 그 비용은 누가 댑니까? 그게 다 국민들이 내는 세금에서 기인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왕립예술협회에 관한 불만이 쌓이다 못해, 일부 극단적인 평민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왕립예술협회를 없애라!’라는 폐지 여론까지 형성되기 시작했다.

    평소였더라면 이렇게까지 그 극단적인 여론이 힘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노를 불태울 대상이 아주 명확했다.

    오랫동안 박탈당해 있었던 교육의 기회.

    그 기회를 간신히 얻을 뻔했는데, 코앞에서 빼앗기게 될 상황이었으니까.

    한편 그 여론을 지켜보며, 왕립예술협회는 굉장한 위기감을 느끼는 한편.

    더더욱 이네스에 대한 적대감을 불태웠다.

    ‘애초에 브라이어튼 백작이 학교를 세우겠다고만 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그건 예술협회장, 어셔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브라이어튼 백작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돼.’

    평민들, 그리고 중산층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왕립예술협회의 폐지 여론.

    그를 떠올리자마자, 예술협회장은 뱃속이 차갑게 식는 위기감을 느꼈다.

    ‘지금 여론으로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왕립예술협회가 정말로 해체될지도 몰라.’

    그렇다면 예술협회장의 자리까지 날아가는 건 당연지사였다.

    ‘이건 날 위해서가 아니야. 예술협회를 위하여, 더 나아가 이 나라를 위해서야.’

    예술협회장의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났다.

    ❀ ❀ ❀

    그렇게 예술협회에 대한 불만이 한창 끓어오르던 차.

    갑자기 황색 언론에서 인터뷰 기사가 하나 터졌다.

    평소에는 수많은 쓰레기 기사들 중 하나로 흘러갔을 그 기사가 주목을 받게 된 건, 그 인터뷰에서 지목된 인물 때문이었다.

    <브라이어튼 백작이 학교 설립에 관련하여 뇌물을 수수했다!>

    이네스 브라이어튼.

    최근 세간의 이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 거론되었다.

    그리고 그 비리에 대해 고발한 사람은 바로 샬럿 제이슨.

    한때 브라이어튼 백작의 절친한 친구였고, 그 지위를 이용하여 백작의 전남편과 불륜을 저질렀으며.

    그리하여 사교계에서 거의 매장 당했던 바로 그 샬럿이었다.

    ❀ ❀ ❀

    샬럿은 이네스의 뇌물 수수 혐의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브라이어튼 백작은 학교 부지를 구매할 때에, 모 귀족에게 부적절한 뇌물을 받았다.’

    그 말로 시작하는 그녀의 주장을 대충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브라이어튼 백작은 모 귀족과 접촉하며 그 귀족의 땅 일부를 학교 부지로 매매하겠노라 약속했고, 대신 그 귀족에게 뇌물을 요구했다.

    한편 상대 귀족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학교가 지어지면, 그 주변에 여러 인프라가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학교 주변의 땅값도 높아지고는 하니까.

    이네스에게 상당량의 뇌물을 주더라도, 주변의 땅값이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그 손해가 상쇄되는 구조였다.

    게다가 한번 형성된 인프라는 계속해서 수익을 창출할 테니, 시간이 지날수록 귀족의 주머니는 두둑해질 터.

    결국 이네스는 뇌물을 받음으로써 땅을 저렴하게 인수하고, 땅 주인은 뇌물을 준 이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 상부상조가 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네스가 뇌물만 받은 후, 귀족과의 저 은밀한 거래는 나 몰라라 하고 다른 땅을 구매하기로 한 것이다.

    “……저는 이네스, 아니, 브라이어튼 백작님을 위해 그 모든 궂은일을 해냈어요.”

    샬럿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눈으로, 제 앞에 앉아 있는 기자를 마주 보았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저와 백작님은 사실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해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