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94)화 (94/120)

94화

❀ ❀ ❀

얼마 후.

이네스는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귀국했다.

“정말 알찬 시간이었어요.”

이네스가 뿌듯하게 말했다.

실제로도 그렇게 자평할 만했다.

예술가들에게 초대받아서 서로의 예술관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고, 다른 예술가의 전시회를 보고 오기도 했다.

애틀리 후작 부부를 위시한 사교계 명사들과도 교류가 잦았다.

사실상 칼도로프의 유명 인사들과 모조리 얼굴도장을 찍은 후 귀국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솔직히 칼도로프의 국왕 폐하를 직접 알현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너무 긴장이 돼서 가슴이 터질 정도였다니까요?”

한편, 이네스의 재잘거림을 듣던 에녹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랭커스터로 돌아가면 꽤 바빠질 겁니다.”

“네? 어째서요?”

어리둥절한 그녀를 향해, 에녹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대꾸했다.

“그야 이번에 브라이어튼 백작은 정말 압도적인 성취를 거두었으니까요. 아마 인터뷰 요청이 쇄도할걸요?”

“갑자기 칭찬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딱히 제가 드릴 건 없는데요.”

“칭찬하려는 게 아니라, 저는 그저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게다가 제게 주실 게 왜 없습니까?”

그렇게 대꾸하는 에녹은 어느새 지극히 사업가다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저는 한 사람의 언론인으로서, 브라이어튼 백작과의 단독 인터뷰라는 훌륭한 기삿거리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만.”

“네에?”

“그러니 귀국한 후 첫 번째 인터뷰는 우리 엘튼지에 줘야 합니다.”

에녹이 단단히 못을 박았다.

“아셨죠?”

기가 찬 이네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알았어요, 꼭 그렇게 할 테니 걱정 말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었는데.

에녹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랭커스터로 귀국하자마자, 이네스는 취재진에게 잔뜩 둘러싸이고 만 것이다.

“이번 칼도로프의 개인전이 무척 호평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칼도로프의 개인전을 랭커스터에서도 진행해 달라는 요청이 속출하고 있다는데요!”

“브라이어튼 백작님,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물론 개인전이 상당한 성공을 거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분위기가 달아오른 이유는, 이네스가 인정을 받은 곳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칼도로프.

국경이 잇닿은 인접국이자, 국력 또한 비슷하며.

랭커스터와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였고, 과거에 기나긴 전쟁까지 치렀었던 상대 국가.

그 칼도로프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국민들의 만족감을 충족시켜 준 것이다.

“그러니까 이거, 국위 선양이라는 거죠?”

간신히 취재진들 사이에서 벗어난 이네스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심지어는 현 국왕인 에드워드도 국격을 올려 주었다며, 공식적으로 직접 이네스를 치하한 상태.

그 말은즉, 이네스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회 각계각층에서 여러 반응들이 일어날 사업을 진행하기에, 지금만큼의 적기가 없었다.

가령, 학교 설립 말이다.

“엘튼지의 인터뷰는 언제죠?”

“글쎄요, 이네스의 일정에 맞추려고 합니다만.”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인터뷰를 진행하도록 해요.”

“이렇게 갑자기요?”

어리둥절한 얼굴의 에녹 앞에서, 이네스는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어 보였다.

“저, 학교를 설립하겠다고 발표하려고요.”

❀ ❀ ❀

엘튼지가 단독으로 따낸 브라이어튼 백작의 인터뷰는, 사회 각지에서 어마어마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야말로 폭탄을 떨어뜨린 듯한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랭커스터에서 여태껏 이런 학교는 존재한 적 없었으니까.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클럽에 모여 앉은 귀족 중 한 명이 기가 막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술학교에 귀족가의 레이디들을 입학시키는 건 그렇다 칩시다. 브라이어튼 백작이 여러모로 유별나게 구는 건 사실이니까요.”

처음 말문을 연 귀족이 쯧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학교에 귀족뿐 아니라 평민까지 받겠다는 건 다소 과한 처사 아닙니까?”

“맞습니다. 한발 양보해서 귀족 여성까지는 그렇다 쳐도, 어떻게 귀족과 평민들이 함께 뒤섞여 교육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예술을 가르친다니요.”

지극히 차별적인 시선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 차별이 잘못되었다는 개념조차 없었다.

‘평민들은 귀족들보다 열등하다.’

그 생각은 평생을 귀족들에게 체화되어 있었으니까.

“설마 백작은, 길거리에서 예술가입네 하고 떠들어 대는 작자들까지 모조리 받아들일 생각인 건지…….”

누군가가 한숨을 섞어 그렇게 중얼거리자, 다른 귀족이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평민 나부랭이들이 예술적인 감성을 알기나 할까요? 어렸을 적부터 여러 경험을 하며 감성을 갈고닦아야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평민들에게 그런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 자체가 낭비입니다.”

그렇게 랭커스터 사회의 주류인 남성 귀족들은 아니꼬운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이네스의 행보를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쪽은, 당연히 왕립예술협회였다.

“브라이어튼 백작의 행보는 지나치게 급진적입니다!”

“아니, 고귀한 귀족들에게 먼저 교육의 기회를 줘도 모자랄 판 아닙니까? 평민들에게까지 교육의 문을 열어 놓는 건 시기상조예요!”

“급하게 먹는 음식에 체한다고 했습니다, 이러다가 사회에 혼란이 야기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닙니까!”

그게 왕립예술협회의 논지였다.

솔직히 속이 빤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왕립예술협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고급 교육을 받는다는 건, 곧 기득권을 움켜쥘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

게다가 이네스의 학교를 통해 예술가가 많아진다면, 새로이 들어서는 수많은 예술가들과 새로운 경쟁을 해야 할 텐데.

배에 기름이 낀 왕립예술협회는 그런 경쟁 자체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반발이 격화되던 어느 날.

왕비, 헬레나는 이네스를 왕궁으로 은밀하게 불러들였다.

“브라이어튼 백작.”

조용히 이네스를 부르는 헬레나의 얼굴에는 희미한 수심이 서려 있었다.

이네스는 가만히 고개를 수그렸다.

“네, 왕비 전하.”

“백작도 알고 있지요? 백작이 설립하는 학교에 대해, 왕립예술협회에서 반대가 무척 심해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네스는 헬레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또한 헬레나는 이네스의 저 표정이 익숙했다.

스스로의 생각이 옳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

그래, 흡사.

‘서식스 공작이 브라이어튼 백작을 바라볼 때의 표정이지.’

동시에 이네스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학교 설립 문제는 양보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런가요.”

헬레나는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그렇게 말하는 이네스의 눈빛까지, 에녹을 쏙 빼닮은 것처럼 똑같았기에.

“왕립예술협회, 더 나아가 귀족 계층에서 반발하는 건 분명 큰 부담이기는 합니다. 왕비 전하께서도 그 부분을 염려하시어 저를 부르신 거겠지요.”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그럼에도 제가 학교를 설립하겠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네스는 허리를 곧게 폈다.

헬레나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을 잇는다.

“언제까지나 이대로 예술계가 정체해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체해 있을 수는 없다, 라.”

“네. 지금 제가 랭커스터 예술계에서 상당한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네스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이내, 또렷한 목소리가 뒤따른다.

“저 혼자서만 예술계에 발을 들이고, 그 재능을 인정받는 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흠,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겠어요?”

“랭커스터 예술계에 있어 저는 지나치게 파격적인 존재입니다.”

이네스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랭커스터 예술계가 제 행보에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적당히 눈을 감아 주는 건, 엄밀히 말하자면 제가 ‘브라이어튼 백작’이기 때문이겠죠.”

“…….”

폐부를 푹 찌르고 들어오는 말이었다.

“저는 한때 랭커스터 왕국 최고의 상속녀로 손꼽혔고, 지금도 왕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의 가주이지요.”

“백작. 그건…….”

“그랬기에 여태껏 전, 여성이라는 성별에 발목을 잡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대로만 있어도, 아마 저는 끝까지 예술가로서 별 무리 없이 활동할 수 있을 거예요.”

이네스의 목소리에 미미한 열기가 서렸다.

“하지만 저의 후인들은 어떨까요?”

그 질문에, 헬레나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과연 저 이후의 여성 예술가들은, 더 나아가 평민이라는 신분에 구애받는 예술가들은…… 이 경직된 예술계에서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을까요?”

그리고 헬레나는 이네스의 질문에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답은 ‘아니오’였다.

“여성뿐 아니라, 자유로운 화풍을 가진 평민 예술가들이 남녀 가리지 않고 계속 들어와야만 해요. 그럴수록 경직된 예술계에 새 피가 수혈될 것이고,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아무래도 이네스는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온 것 같았다.

거침없는 말이 이어졌다.

“제가 사라지는 그 순간, 다시 폐쇄적인 예술계로 되돌아가고 말 테니까요.”

그렇게 말을 맺으며 이네스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왕비를 앞에 두고 지나치게 웅변을 토한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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