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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93)화 (93/120)
  • 93화

    그렇게 한참 동안 질문과 답변이 오간 후.

    안드레아는 홀가분한 얼굴이 되어 방긋 미소 지었다.

    “이렇게 백작님을 만나서 이런저런 조언을 듣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제가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이네스 또한 안드레아를 향해 마주 웃어 주었다.

    그러자 안드레아가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그러면 백작님께서는 언제까지 여기에 계시는 거예요?”

    “글쎄요. 일주일 정도는 더 머무르지 않을까요?”

    “아…….”

    순간 안드레아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그, 조금만 더 계시다 가면 안 될까요?”

    “네? 그게 무슨 ”

    “죄송해요. 고집을 피우려는 건 아니었어요.”

    입으로는 그렇게 사과하면서도, 안드레아는 못내 아쉬운 얼굴이었다.

    “저도 여러 선생님들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나지막한 혼잣말에, 이네스는 어쩐지 안드레아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그러고 보면 이네스와 안드레아는 여러모로 비슷한 입장이었다.

    부모님이 아이의 성별에 관계없이 교육에 신경을 써 주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배움에 목말라 있다.

    ‘후작 영애는 나보다도 한참 어린데, 내가 어릴 때와 하등 나아진 게 없다니.’

    그렇게 생각하던 이네스는, 문득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아까 애틀리 후작부인께서도 학교에 대해 말씀하셨었지?’

    학교.

    수많은 선생님 아래에서 조언을 얻고, 또래와 교류하며, 다양한 시각을 공유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장소.

    자라나는 아이의 시야를 획기적으로 넓힐 수 있는 곳.

    하지만 현재 학교가 허락된 아이들은 극소수였다.

    랭커스터만 해도 예술전문학교는 단 한 군데뿐이며, 그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도 고위 귀족들의 남성 자제들밖에 없었다.

    그 학교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기성 예술가들이 되고, 더 나아가 왕립예술협회의 회원이 된다.

    ‘칼도로프는 타국보다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떠들어 대지만, 실상 할 수 있는 건 무척 적어요.’

    ‘우리 안드레아만 해도 그림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여자아이가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없어요. 그게 현실이에요.’

    애틀리 후작부인의 말을 되짚어 생각해 보면, 칼도로프도 그리 상황이 다른 것 같지는 않다.

    그녀 혼자서는 이 공고한 체계를 개선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랭커스터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들.’

    그들은 평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교의 문턱을 넘을 수 없다.

    그나마 귀족들은 성별이라는 한계를 넘으면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평민들은 이중 삼중의 굴레를 넘지 못하고 결국 주저앉고는 했다.

    ‘그렇다면.’

    이네스가 눈동자를 굴려 안드레아를 바라보았다.

    이 경직된 예술계를 깨뜨릴 후학을 길러 낸다면 어떨까?

    눈앞의 이 조그만 소녀처럼, 의지가 있으되 성별이라는 한계에 봉착한 아이들과.

    반짝이는 재능을 가졌음에도 신분 때문에 발굴되지 않은 수많은 평민들까지.

    이 모든 아이들을 공평하게 가르침으로써 말이다.

    ❀ ❀ ❀

    그 후.

    이네스는 안드레아와 헤어져, 에녹과 애틀리 후작 부부를 만나러 갔다.

    하지만 에녹은 다소 불만스러웠는데.

    차를 대접받고, 바닷가를 산책하러 밖으로 나오는 동안, 이네스는 거의 딴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

    “…….”

    “이네스!”

    화들짝 놀란 이네스가 에녹을 돌아보았다.

    에녹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

    사람을 앞에 두고 계속 다른 생각이라니, 이게 무슨 무례람.

    이네스는 다소 머쓱해졌다.

    “그냥, 아까 안드레아와의 대화가 생각나서요.”

    “안드레아요?”

    에녹이 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애틀리 타운하우스에 도착한 이래로 계속 안드레아와 붙어 계시더니. 또 안드레아입니까?”

    “아니, 그게…….”

    이네스가 난처하게 웃었다.

    “아직 생각이 정리가 안 돼서요. 조금 정리되면 말씀드리는 건…….”

    “그렇다는 건, 저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 다른 생각에만 몰두하고 계시겠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

    이네스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에녹은 대답을 듣기 전까지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결국 이네스는 에녹의 서운한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까 전, 안드레아가 다양한 경험을 하기 어렵다며 아쉬워하더라고요. 애틀리 후작부인도 그 부분에 불만을 표하셨고요.”

    “그랬습니까?”

    “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학교를 떠올렸는데…….”

    그래도 에녹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하니, 뭔가 생각이 조금 더 구체화되는 느낌이었다.

    이네스가 차근차근 설명을 이었다.

    안드레아, 그리고 애틀리 후작부인과의 대화에서 학교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것.

    생각해 보면, 랭커스터에서도 예술을 정식으로 교육받을 수 있는 아이들은 극소수라는 것.

    평민이라서, 여자아이라서, 집이 가난해서…….

    수많은 이유들이 배움을 향한 아이들의 열망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까지.

    “……그런 아이들에게도,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차별 없이 가르치고 싶어요.”

    이네스는 그렇게 말을 맺었다.

    에녹이 신중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말씀이시죠?”

    “맞아요.”

    “솔직히 아주 멋진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에녹이 말끝을 흐렸다.

    “아주 어려울 겁니다.”

    “…….”

    이네스는 잠시 침묵했다.

    평소 이네스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지지해 주던 에녹까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아마도 정말로 어려울 것이리라.

    하지만.

    “그래도 꼭 하고 싶어요.”

    이네스는 결연하게 대답했다.

    에녹은 그런 이네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신이 믿는 바를 관철해 내겠다는 의지를 품고, 반짝반짝 빛나는 저 녹색 눈동자.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그녀를 거침없이 움직이게 하는 저 열정이 눈이 부셔서.

    당연하다는 듯 또 한 번 매혹되고 말아서…….

    “각하?”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에녹의 시선에, 이네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 이런.’

    너무 정신을 놓고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에녹이 부러 짓궂게 말을 정정해 주었다.

    “각하가 아니라 에녹이죠.”

    “……뭐, 그렇기는 한데.”

    조금 민망했는지, 이네스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여기는 애틀리 후작가의 사유지니까, 호칭을 조금 더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뭐 어떻습니까, 지금은 우리 단둘인데요.”

    에녹이 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었다.

    “게다가 제가 아까 이네스라고 부를 적에는 저를 만류하지 않았잖습니까.”

    “…….”

    그 통렬한 지적에, 이네스는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이네스의 창대한 미래 계획은 잘 알겠습니다만, 오늘은 제게 조금 집중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에녹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지금은 이네스의 ‘실수’가 있고 난 후로, 처음으로 단둘이 있는 시간인걸요.”

    “정말, 실수 얘기는 그만 좀 해요!”

    이네스는 그만 질겁을 했다.

    피식 웃은 에녹이 불쑥 질문했다.

    “키스해도 됩니까?”

    “…….”

    순간 이네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날 놀리는 거야, 아니면 진심으로 물으시는 거야?’

    하지만 에녹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마주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네스는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 걸 꼭 물어보고 해야만 해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이네스가 뚱하니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그 핀잔에 돌아온 대답은 쓸데없이 진지했다.

    “당신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

    이 순간.

    ‘라이언은 어땠을까’라는, 버릇처럼 하던 가정마저 말끔히 잊혔다.

    그저 에녹의 다정함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여 그의 질문에 대답한다.

    “허락 같은 거, 구하지 않아도 돼요.”

    무심결에 그렇게 대답한 이네스가, 제가 한 말에 파드득 놀랐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그 말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못을 박듯 말을 덧붙였다.

    “에녹, 당신이라면 괜찮아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부드럽게 이네스의 뺨을 어루만진다.

    그 손가락이 가만히 턱을 들어 올린다.

    이네스는 당연하다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촉.

    온몸에서 힘이 풀리며, 이네스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입술을 가르며 파고든 말캉한 살덩이가, 거침없이 치열을 쓸어내리며 여린 점막을 어루만졌다.

    “읏…….”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헐떡였다.

    전신을 엄습하는 달큼한 쾌락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행복해.’

    이네스는 가슴이 터질 듯한 만족감을 마음껏 만끽했다.

    하얗게 포말이 이는 바닷가 모래톱과, 햇빛을 머금어 반짝거리는 새파란 수평선.

    머리카락을 흩뜨리는 시원한 바닷바람.

    그리고 그녀를 엉망으로 흩뜨려 놓는 이 아름다운 남자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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