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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92)화 (92/120)
  • 92화

    후작부인은 그제야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런, 미안해요. 제가 손님들을 앞에 두고 너무 날 선 말을 했나 보네요.”

    “아닙니다, 부모로서 따님의 교육 문제가 걱정스러우실 만도 하죠.”

    이네스가 얼른 말을 거들었다.

    그러자 후작부인이 반짝 눈을 빛냈다.

    ‘뭐지?’

    그 호감 가득한 눈빛에, 지레 놀란 이네스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동시에 후작부인이 은근슬쩍 이네스에게 말을 붙였다.

    “사실 우리 안드레아가 백작님께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괜찮으시다면 한 번 만나 보고 가지 않으시겠어요?”

    “안드레아라면, 따님이신가요?”

    “네. 애틀리 후작가의 타운하우스는 여기서 멀지도 않거든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당연하죠!”

    생각 이상으로 열렬한 반응이 터져 나온다.

    “솔직히 백작님을 초대한 사람은 저인데, 어제 개인전에서는 공작 각하께 백작님을 계속 빼앗기기만 했잖아요?”

    그렇게 투덜거리며, 애틀리 후작부인은 밉지 않게 에녹을 흘겨보았다.

    아무래도 에녹도 내심 찔리기는 했나 보다.

    짧게 헛기침을 할 뿐, 후작부인의 말에 딱히 반박하지는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에녹을 향해 두 눈을 부라려 보인 후작부인은, 다시 휙 소리가 나도록 이네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랑은 아니지만, 애틀리 타운하우스 주변의 풍광도 무척 아름답답니다. 가문에서 소유한 해변이 딸려 있거든요.”

    “가문 소유의 해변이라니, 정말 예쁘겠네요.”

    “그럼요. 애틀리 후작가의 사유지이니 조용하게 바다를 감상할 수도 있어요.”

    후작부인이 확연하게 들뜬 목소리로 재차 권유했다.

    “이왕 칼도로프까지 왔는데 일만 하다 가는 건 아쉽잖아요? 어때요?”

    “음…….”

    이네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칼도로프 왕가의 친인척인 애틀리 후작부인이 저렇게까지 권유하는데,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거니와.

    ‘바다라.’

    그러고 보면 바다를 본 지도 정말 오래된 것 같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만 해도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라이언과 결혼한 이후부터는, 라이언을 지원하느라 매번 타운하우스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 대신 샬럿과 라이언이 다정하게 바다를 보러 갔었지만.’

    아픈 기억이 송곳처럼 불쑥 튀어나와 심장을 찌른다.

    이네스는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어쨌든 나쁘지 않은 제안이야.’

    칼도로프에서도 계속 개인전 때문에 바빴으니까, 이렇게 기분 전환을 하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한 판단에,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애틀리 후작부인도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아가 무척 기뻐하겠어요. 백작님을 만나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는데, 드디어 우리 딸도 소원을 풀겠네요.”

    ……그때까지는 그냥 이네스를 추켜세우기 위한 과장된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찬이 끝난 후.

    애틀리 후작가의 타운하우스에 도착한 이네스는, 제 생각을 다소 고쳐먹어야만 했다.

    “어머니, 아버지!”

    조그만 여자아이가 도도도 달려 나왔다.

    양 갈래로 묶어 내린 고수머리가 나풀거리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안드레아!”

    애틀리 후작이 냉큼 제 딸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다.

    그러자 안드레아가 대번에 정색을 하며 후작에게 되물었다.

    “브라이어튼 백작님은요?”

    “……아빠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니?”

    후작은 대번 서운한 얼굴이 되었으나, 안드레아는 냉정했다.

    “아빠야 매일 볼 수 있지만 백작님은 아니잖아요?”

    “…….”

    후작이 불만스레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네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백작님도 모셔 왔으니, 그렇게 재촉할 필요 없단다.”

    “네? 그게 무슨…… 헉!”

    안드레아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버지 뒤로, 막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네스와 에녹 일행을 발견한 것이다.

    아이의 양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드레아 애틀리입니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안드레아가 얼른 배꼽 인사를 했다.

    아이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오로지 이네스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아이가 귀여워서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반가워요, 이네스 브라이어튼이에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백작님을 뵐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고작해야 일곱 살짜리 아이인데, 최대한 어른스럽게 말하려 하는 모습이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깜찍하다.

    그러던 중.

    이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이네스만을 열렬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화려한 외모로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사로잡는 에녹에게조차, 전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이다.

    ‘뭔가 할 말이 있나?’

    한참을 쭈뼛거리던 아이가, 품에 꼭 끌어안고 있던 커다란 책을 살그머니 내밀었다.

    “저, 엄마께 부탁해서 도록을 받아 왔거든요.”

    “도록이요?”

    설마?

    이네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제게 내밀어진 책을 내려다보았다.

    예상이 들어맞았다.

    그녀의 개인전 도록이었다.

    “네! 그…… 사인을 좀 해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아이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낸다.

    ‘이것 참, 사인이라…….’

    다소 민망하지만, 아이가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니 역시 뿌듯하다.

    이네스는 도록 위에 사인을 해 주었다.

    도록을 품에 꼭 끌어안으며, 안드레아가 해맑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저, 백작님의 개인전도 꼭 가 볼 생각이에요! 엄마가 데려다주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렇게 말해 주다니 제가 더 고마운걸요?”

    이네스의 호의적인 반응에 안드레아는 다소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저어, 백작님.”

    “네?”

    “제가 최근에 그림을 배우고 있는데 조언을 구할 수 있을까요?”

    “……음, 제가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걸요.”

    이네스가 난처하게 웃었다.

    어떤 분야에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한들, 그를 가르치는 건 별개이지 않은가.

    가르치는 데에 출중한 재능을 가진 사람, 그러니까 선생님을 구할 수는 있어도…….

    이네스가 순간 멈칫했다.

    ‘잠깐, 선생님을 구해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무언가 잡힐 듯했던 실마리는, 안드레아의 활기찬 외침에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요!”

    흥분한 안드레아가 양 주먹을 꾹 움켜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꼭, 꼭 듣고 싶어요! 백작님의 조언이요!”

    그 열렬한 반응에, 상황을 지켜보던 후작부인이 은근슬쩍 딸아이를 말렸다.

    “안드레아. 백작님은 손님이신데 그렇게 네 용건만 말하면 어떡하니?”

    “저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런 의욕적인 모습이 보기 좋은걸요.”

    이네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보통의 귀족 영애들은 얌전함이 미덕이었기에, 자기 의견을 이렇게 당당하게 표현하는 일이 드물다.

    게다가 예술 쪽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모습까지 무척 보기 좋았다.

    아마도 후작부인께서 아이의 가능성을 최대한 제한하지 않고 기른 덕일 터.

    ‘……내 부모님처럼.’

    한편 이네스가 두둔해 주자, 안드레아는 양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엄마, 백작님께서 괜찮다고 하시잖아요!”

    “안드레아.”

    후작부인이 부러 엄격하게 딸아이를 불렀으나, 안드레아는 요지부동이었다.

    “저, 백작님. 제 화실에 가 보시겠어요?”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해도 아이는 아이다.

    조심스럽게 이네스를 채근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래요, 같이 갈까요?”

    “네!”

    잔뜩 신이 난 안드레아가 종종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이네스는 그 뒤를 느긋한 걸음으로 뒤따랐다.

    ❀ ❀ ❀

    안드레아의 화실은 일곱 살 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꽤 본격적이었다.

    아마 애틀리 후작 부부가 딸아이의 교육을 꽤 신경 쓰기에, 화구들도 모자람 없이 갖춰 준 것 같다.

    “잠시만요, 백작님!”

    이네스를 자리에 앉혀 둔 안드레아가 책상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는가 싶더니, 이내 두툼한 스케치북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이건 제가 그린 습작들인데요……!”

    드로잉을 연습한 흔적들이 스케치북 안에 빼곡하다.

    기본적인 투시나 인체의 근육 구조 등등, 기초를 다지는 방향의 습작들이었다.

    보통의 아이들은 이런 연습들은 지루해하는 편인데.

    꽤 오랫동안 연습해 온 티가 난다.

    습작들을 면밀히 살핀 이네스가 흔쾌히 칭찬을 건넸다.

    “잘 그리네요.”

    아닌 게 아니라 나이에 비해 상당히 실력이 괜찮았다.

    정석적으로 기초부터 그림을 배운 느낌이었다.

    그 칭찬에, 안드레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이네스가 그림을 짚으며 조목조목 설명을 이었다.

    “다만 이 여성의 그림 말이에요, 쟁반을 들고 있는 팔의 근육은 이렇게 잡히기보다는…….”

    “네, 네!”

    안드레아가 홀린 듯 이네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크로키를 자주 해 보는 것도 좋아요. 잘 그리려 노력할 필요는 없고, 최대한 짧은 시간에 인물의 동세나 특징을 잡는 데에 주력하면 도움이 될 거예요.”

    “네, 꼭 그렇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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