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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91)화 (91/120)
  • 91화

    “…….”

    사탕을 가득 문 것처럼 입 안이 달아서.

    이네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에녹은 그대로 못을 박았다.

    “진심입니다.”

    그 확고한 선언에, 이네스의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화르륵 붉어진다.

    “그, 그건 그렇고. 오늘은 칼도로프 왕실에서 오찬 약속이 있었지요?”

    이네스는 괜히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러다가는 약속 시간에 늦겠어요, 빨리 준비해야만…….”

    “잠깐만요.”

    단단한 양팔이 이네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적당히 근육이 붙어 탄탄한 가슴이 맨살에 닿자, 이네스가 흠칫 몸을 굳혔다.

    입 안이 바짝 마르고, 온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감각.

    “아직 시간은 넉넉해요. 조금만 더 같이 있어도 되잖습니까.”

    “아니, 정말로 늦을 수도 있…….”

    어떻게든 에녹의 품에서 빠져나가려던 이네스가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겉보기로는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와는 다르게.

    에녹의 목덜미도 붉게 달아올라 있었으니까.

    ‘……나만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었구나.’

    이네스는 에녹의 목덜미를 천천히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동시에 에녹의 양어깨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각하.”

    “예.”

    “목덜미가 엄청 붉어요.”

    “…….”

    한참을 침묵하던 에녹이, 이네스의 허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투덜거렸다.

    “그냥 모른 척 좀 해 주지 그러셨습니까.”

    이건 뭐, 제가 했던 말이 고스란히 되돌아오는 상황이지 않은가.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풋.”

    굉장히 유쾌한 기분이었다.

    에녹이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이네스를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그녀를 끌어당겨 침대 위에 눕혔다.

    털썩!

    침대 위에 쓰러진 이네스가 당황한 얼굴로 에녹을 불렀다.

    “가, 각하?”

    “이네스.”

    에녹이 꿀처럼 다디단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 지금 뭐라고?’

    이네스는 그만 잔뜩 당황해 버렸다.

    물론 그녀가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 이렇게 갑자기?’

    그녀를 내려다보는 짙푸른 눈동자에는 짓궂은 빛이 가득 서려 있었다.

    “당신은 저더러 이네스라고 불러 달라고 말씀하셨으면서.”

    촉.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춘 에녹이, 그대로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소곤거렸다.

    “왜 저는 에녹이라고 불러 주시지 않습니까?”

    “그, 그건…….”

    이네스는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전혀 소용없었다.

    에녹이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을 삼켰기 때문이었다.

    ‘아.’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뱃속이 뜨거워졌다.

    결국 이네스는 약속 시간이 빠듯해질 때까지 침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 ❀ ❀

    칼도로프 왕성의 응접실.

    ‘다행이야,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아서…….’

    이네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교류전이며 여러 행사를 치르면서, 에녹이 남성치고도 체력이 좋다고는 생각했었지만.

    그 체력이 침대에서까지 발휘될 줄은 몰랐다.

    다행히도 에녹은 칼도로프 왕가와의 약속에 늦어서는 안 된다는 정도의 상식은 갖추고 있었기에, 아쉬운 얼굴로나마 그녀를 놓아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도착 시간이 정말 아슬아슬했지.’

    이네스는 원망의 눈초리로 에녹을 흘겨보았다.

    보통 왕가와의 약속에서는 20분 정도 일찍 와서 대기하는 게 일반적인데, 그들은 10분을 남기고서야 간신히 들어왔던 것이다.

    한편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자마자, 에녹은 눈매를 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네스는 속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사람 속도 모르고.’

    그럼에도 에녹의 미소가 눈이 부시도록 예쁘게 보이는 건 사실이었기에.

    이네스는 그저 속으로 한숨만 푹푹 내쉴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콩깍지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이네스가 그렇게 속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던 차.

    때마침 왕실 시종이 들어와 두 사람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만찬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종을 따라 한참을 이동하자, 만찬장 앞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문을 열어 주었다.

    상석에 앉아 있던 나이가 지긋한 노부인이 두 사람을 환대했다.

    “어서 오세요, 멜리사 칼도로프입니다.”

    “이리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이네스와 에녹은 노부인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멜리사 칼도로프.

    전 국왕의 여동생이자, 현 국왕의 고모 되는 귀부인이었다.

    칼도로프 왕가에서 가장 큰 어른이기도 했다.

    동시에 멜리사 곁에 앉아 있던 애틀리 후작 부부가 두 사람을 알은척한다.

    “이렇게 두 분을 다시 뵙게 되니 정말 반갑습니다.”

    애틀리 후작이 먼저 운을 뗐고,

    “브라이어튼 백작께서는 어제 좀 피곤해 보이시던데, 오늘은 괜찮으신가요?”

    애틀리 후작부인이 걱정스럽게 이네스의 안부를 물어 왔다.

    이네스는 사교적으로 미소 지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푹 쉬었어요.”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어제 애틀리 후작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질투심 때문에 마음이 온통 엉망이었는데.

    에녹과 서로 감정을 확인하자마자 이토록 평온해질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멜리사의 안내에 따라 이네스와 에녹은 자리에 착석했다.

    “국왕 폐하께서는 국정에 바쁘시어 당장 두 분을 만나 보기는 어려우나, 귀국하기 전에 한 번쯤 시간을 내겠다고 하시었소.”

    “칼도로프에서 저희에게 얼마나 신경을 써 주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녹이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실제로 칼도로프에서 이네스와 에녹 일행을 꽤 신경 써 주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칼도로프 왕가에서 그들을 초대했다지만, 교류전 같은 공식 행사가 아니라 단순한 개인전이었으니까.

    게다가 초대자의 주최는 국왕이 아니라 애틀리 후작부인이었다.

    굳이 국왕이 직접 그들을 만날 필요까지는 없는데도, 국왕이 직접 시간을 내겠다고 말한 것이다.

    멜리사가 주름진 눈매를 접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 보니, 서식스 공작은 아직도 혼인을 하지 않았다지요? 내게 딸아이가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공작을 내 사위로 맞이하였을 것인데.”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지금은 어렵겠습니다.”

    새파란 눈동자가 이네스에게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러고는 멜리사를 향해 마주 미소 짓는다.

    “지금은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 말이지요.”

    “호오, 그렇소?”

    멜리사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운 좋은 여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구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아직은 다소 조심스러운 상황이어서요.”

    그 후로도 에녹과 멜리사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니, 에녹은 왜 이쪽은 쳐다보고 그러는지…….’

    이네스만이 괜히 부끄러우면서도 기쁜 탓에, 눈앞의 식기들을 뚫어져라 노려볼 뿐.

    만찬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부드러웠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최근 칼도로프의 예술계 동향이라든지, 랭커스터의 국왕 부부가 전해 달라던 안부 인사라든지, 아니면 애틀리 후작 부부의 아이들이라든지…….

    그러던 중.

    연하게 조리된 양고기 요리를 썰어 내며, 애틀리 후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브라이어튼 백작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같은 여성으로서 존경스럽다고나 할까요?”

    갑자기 이네스가 대화의 전면에 등장했다.

    ‘응? 나?’

    당황한 이네스가 후작부인을 바라보았다.

    이네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애틀리 후작부인의 표정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랭커스터는 칼도로프보다도 다소 엄격한 분위기라고들 하잖아요? 그런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낼 정도라니, 백작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과찬이십니다.”

    “칼도로프에도 여류 화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굉장히 드물거든요.”

    후작부인은 식기를 쥔 양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예술, 아니죠. 어느 특정 분야에 대한 정규 교육을 받는 것 자체가 어려울뿐더러. 귀족 가문의 레이디라면 아무래도 혼맥을 쌓는 쪽을 더 중시하는 편이죠.”

    “…….”

    이네스는 조금 긴장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후작부인은 그린 것처럼 우아한 동작으로 고기를 썰었었는데.

    어째 지금은 칼질을 하는 동작이며, 목소리에도 사감이 담기신 것처럼 보인다.

    ……역시 내 기분 탓이겠지?

    “칼도로프는 타국보다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떠들어 대지만, 실상 할 수 있는 건 무척 적어요.”

    후작부인은 다소 신랄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안드레아만 해도 그림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여자아이가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없어요. 그게 현실이에요.”

    잠깐, 학교라고?

    순간 이네스는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애틀리 후작부인이 지적한 점은, 사실 이네스 자신도 이미 몇 번이나 벽에 부딪쳤던 부분이었다.

    이네스도 그림에 관련하여 정규 교육을 받기보다는, 가정 교사를 통해 배우지 않았나.

    그나마도 이네스를 끔찍하게 사랑해 주셨던 부모님께서 이것저것 배울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셨기에 망정이지, 평범한 귀족 영애들은 신부 수업을 받는 게 보통이었다.

    “애틀리 후작부인.”

    때마침 멜리사가 엄중한 목소리로 애틀리 후작부인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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