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그저 그뿐인데도, 온몸의 솜털이 올올이 치솟는 것 같다.
도무지 에녹의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네.”
이네스는 베개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에녹의 부름에 대답했다.
에녹이 재차 이네스를 채근했다.
“어째서 계속 눈을 피하시는 겁니까?”
“…….”
정말,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어서는!
이네스는 원망스러운 기색으로 힐끔 에녹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에녹은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기색이었다.
그 집요함에, 이네스가 울상이 되어 되물었다.
“그냥 모른 척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어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에녹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을 따름이었다.
“이제는 백작께서 아무리 저를 밀어내려 하셔도 응하지 않겠다고요.”
“아니, 이건 밀어내려 하는 게 아니라……!”
반사적으로 언성을 높이던 이네스가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럼 뭡니까?”
에녹은 득달같이 이네스를 채근했다.
그 성마른 목소리, 초조한 태도가 영 낯설다.
난처한 와중에도 이네스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각하께서는 왜 저러시지?’
저 모습, 평소 에녹이 보였던 여유로움과는 한참 거리가 있지 않은가.
마치 그녀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처럼…….
‘아.’
순간 이네스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에녹이 계속 저렇게 그녀의 기분을 살피고, 질문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유는 아마도.
‘……나와 같은 마음이어서.’
이네스가 에녹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리하여 그의 행동에 일희일비하는 그만큼.
에녹도 마찬가지인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봄 햇살에 눈이 녹아내리듯 순식간에 마음이 누그러졌다.
‘좋아.’
비록 부끄러워서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다잡은 이네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그러니까.”
“예?”
“이건…… 래서 그래요.”
하지만 이네스가 온 용기를 끌어모아 입 밖으로 꺼낸 목소리는, 모깃소리보다도 작았고.
당연히 에녹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네스의 얼굴이 점점 더 새빨개졌다.
“그러니까, 저는…….”
“실례지만 백작,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아, 정말!”
이네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각하와 같이 있으니까 설레서 그래요! 꼭 제 입으로 그 말을 들으셔야겠어요!?”
괜히 민망한 마음에, 성질을 부리던 이네스가 순간 멈칫했다.
에녹이 어느새 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를 피하느라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거죠?”
“피, 피할 리가 없잖아요.”
그 밝은 미소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가슴 깊은 곳이 간질거려서.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말을 조금 더듬었다.
동시에 에녹의 미소가 짙어졌다.
“설렌다, 라.”
이네스의 말을 곱씹던 에녹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기쁘군요.”
“……별게 다 기쁘시네요.”
이네스가 곁눈질로 밉지 않게 에녹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이네스가 핀잔을 주든 말든, 에녹은 정말로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야, 좋아하는 여자가 저로 인해 설렜다는데.”
그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서렸다.
“기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
아주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양 담담한 어조다.
오히려 이네스가 얼떨떨해질 정도였다.
에녹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사실 백작께서 간밤에 있었던 일을 후회할까 봐…… 그게 좀 걱정스러웠습니다.”
다만, 이네스는 저 말만큼은 그냥 들어 넘길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단박에 에녹의 말을 부정했다.
“후회할 리가 없잖아요.”
“…….”
에녹이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이네스가 단단히 못을 박았다.
“벌써 잊으셨어요? 좋아한다고 먼저 말했던 사람은 저예요.”
“……백작.”
“저, 그런 걸로 거짓말 안 해요.”
이네스는 간밤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어둠, 달뜬 공기.
뺨에 와 닿던 온기와, 떨리던 목소리와…….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완벽하게 만들었던 눈앞의 아름다운 남자.
“어제 했던 고백도 모조리 진심인걸요.”
그 모든 일들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평생 그 기억을 품고, 인생의 가장 황홀했던 순간으로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백작, 전…….”
에녹이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이네스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그보다 언제까지 백작이라고 부르실 거예요?”
“예?”
허를 찔린 에녹이 조금 당황한 낯을 했다.
왜, 뭐, 왜?
이네스는 두 눈에 힘을 주어 에녹의 시선을 맞받았다.
“단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이네스라고 불러 주세요.”
솔직히 말이지, 공작 각하께서는 애틀리 후작부인더러 마가렛이라고 부르셨는걸.
비록 금방 애틀리 후작부인이라고 호칭을 정정하기는 했지만, 그렇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러고 보니, 애틀리 후작부인과의 혼담 얘기는 정확히 어떻게 된 거예요?”
저절로 목소리가 뾰족하게 나왔다.
그녀의 기분이 순식간에 저조해졌음을 눈치챈 에녹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예? 애틀리 후작부인은 왜 갑자기…….”
“아니 뭐.”
이네스가 새초롬하게 대꾸했다.
“저도 예전에 라이언과 결혼했던 적이 있으니, 공작 각하의 혼담 문제에 신경 쓰는 게 불공평하다는 건 알아요.”
그렇게 운을 떼자마자 에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이네스는 내심 움찔했다.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꽤 기분이 좋아 보이셨는데. 왜 갑자기 저러시는 거지?
“그래도 솔직히 궁금하기는 하거든요. 그러니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이네스가 말끝을 흐리며 힐끔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동시에 에녹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 정정하도록 하죠.”
“저, 각하?”
“제게 무엇을 궁금해하든 그건 전혀 상관없습니다. 뭐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다만.”
다만?
이네스는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고트 자작 영식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죠.”
드물게 싸늘한 목소리였다.
“백작의 입에서 고트 자작 영식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어…….”
……설마 라이언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저렇게 기분이 저조해지신 건가? 진짜로?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던 이네스가 짓궂게 되물었다.
“그건 질투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분위기를 완화할 겸. 조금 놀려 주려 함이었는데.
오히려 에녹이 순순히 긍정해 버린다.
이네스는 약간 김이 빠졌다.
“그렇게 순순히 질투하신다고 말씀해 주셔도 괜찮아요?”
“뭐 어떻습니까.”
에녹이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의 관계에서 오해를 만드느니, 차라리 제가 조금 더 솔직해지는 편이 낫지요.”
“그…….”
“세간에서 말하기로는,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법이라고 하더군요.”
잠시 날이 섰던 건 간데없이, 에녹은 솜털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이네스가 새침하게 투덜거렸다.
“그렇게 말씀하셔 봤자, 어쩐지 지금은 제가 지는 기분인걸요?”
“그렇다니 기쁘군요.”
에녹이 피식 웃었다.
“그 자체가, 당신이 저를 조금 더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
아니, 어떻게 저렇게 말 한마디 한마디를 사람 설레게 할 수가 있지?
멍하니 에녹을 바라보던 이네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표정을 정돈하며, 괜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질문을 던진다.
“그, 그래서. 후작부인과는 정확히 언제 혼담이 오갔던 거예요?”
어찌 보면 개인의 사생활이고, 그렇기에 다소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질문임에도.
에녹은 성실하게 대답했다.
“약 7년 전입니다.”
“치, 칠 년이요?”
오래된 일이기는 하네…….
옛날 일로 너무 화를 낸 것 같아서 이네스는 조금 낯이 뜨거워졌다.
에녹이 조곤조곤 설명을 이었다.
“애틀리 후작부인은 혼전에 로이어드 백작가의 영애였습니다.”
“로이어드라면, 애틀리 후작가와 함께 칼도로프에서 손꼽히는 명문가 아닌가요?”
“맞습니다. 저와는 나이가 두 살 차이가 나는데, 아무래도 비슷한 나이 또래의 혼인 적령기다 보니 혼담이 오가기는 했죠.”
“…….”
혼담.
에녹의 혼담이 이네스는 못내 불만스러웠다.
예전 일이고, 더 이상 연연해 봤자 스스로의 감정만 어지러워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게 된다.
때마침 에녹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다 옛날 일입니다. 보다시피 애틀리 후작 부부의 금슬은 무척 좋고요.”
“그래도 후작부인께서 각하를 좋아하셨던 건 사실이잖아요.”
“뭐……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만.”
이네스의 항변에,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에녹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어쨌거나 전 지금 여기, 당신의 곁에 있지 않습니까.”
“그, 그건.”
“당신께서 제 곁에 있어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지고, 빗방울이 하늘에서 쏟아져 땅을 적시듯.
그저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무엇보다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애틀리 후작부인이 아니라 당신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