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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89)화 (89/120)
  • 89화

    “그, 백작님을 모실 다른 직원들을 부를까요?”

    “쉿, 조용히.”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에녹은 입술에 검지를 세워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처럼 깊이 잠드셨네. 내가 직접 방으로 모시고 가지.”

    “아, 예.”

    직원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이네스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으응…….”

    조그맣게 잠투정을 하던 이네스가 에녹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백작, 침실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에녹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네스를 달랬다.

    동시에 호텔 직원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도대체 내가 뭘 본 거지?’

    호텔 직원은 눈을 비빈 후에 다시 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서식스 공작.

    랭커스터의 공작이자 왕제라는 저분은, 여태껏 호텔 직원이 만나 봤던 사람들 중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 예의 바르고 정중하며,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이상적인 귀족이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식스 공작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뭐랄까, 명백한 선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 선 안으로는 그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외양까지 더해져서, 공작은 가끔 인간이라기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예술품처럼 보였다.

    그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고, 무심한 사람.

    스스로도 편견임을 알지만, 어쨌든 호텔 직원이 에녹에게서 느낀 첫인상은 그랬다.

    ‘물론 백작님과는 꽤 친분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지만 지금의 에녹이 보이는 상냥함은 일반적인 친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까 조악한 비유나마 해 보자면…….

    ‘지극히 사랑하는 여자를 대하는 것 같잖아?’

    때마침 에녹이 힐끔 시선을 들어 직원을 바라보았다.

    “지금 있었던 일은…….”

    “예, 당연히 비밀로 할 겁니다.”

    호텔 직원이 황급히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가 근무하는 호텔은 고객의 사생활을 엄격하게 지키는 게 철칙이었다.

    각국의 고위 귀족들, 그리고 왕족들이 주로 머무는 곳이니 당연하다.

    “고맙군.”

    고개를 끄덕인 에녹은, 이네스를 추슬러 안고는 호텔 안으로 사라졌다.

    ‘거참…… 놀랍군.’

    호텔 직원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달칵.

    방문이 열렸다.

    에녹은 조심스럽게 이네스를 침대에 눕혔다.

    “으음…….”

    이네스는 짧게 뒤척이는가 싶더니, 이내 색색 곤한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도무지 잠에서 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

    에녹은 잠든 이네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비처럼 가지런하게 내려앉은 속눈썹, 꽃잎처럼 벌어진 붉은 입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 이네스와 나란히 앉아 있었던 밤의 정원이 문득 떠올랐다.

    저 발그레한 입술을 갈급히 삼켰던 그 순간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에녹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잠들어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에녹은 다소 성마른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막 침실에서 빠져나가려던 그때.

    이네스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공작…… 각하.”

    에녹이 멈칫 발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잠꼬대를 하는 것 같다.

    꼬물꼬물 뻗어 온 손가락이 힘을 주어 에녹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

    에녹은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이네스를 응시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는 게 이런 감각일까.

    넘쳐흐르는 애정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에녹은 허리를 굽혀, 그녀의 흰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그런데 그때.

    깜빡.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살며시 열렸다.

    몽롱한 초록색 눈동자가 에녹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가지 말아요. 네?”

    그녀가 나직하게 칭얼거렸다.

    “오늘 밤은…… 각하와 함께 있고 싶어요.”

    그 달큼한 속삭임을 듣는 순간.

    에녹은 안간힘을 다해 부여잡고 있던 이성이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 ❀ ❀

    다음 날 아침.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이 감은 눈꺼풀을 쿡쿡 찔러댔다.

    “으…….”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목이 바짝 말라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누군가가 망치로 머리를 쾅쾅 내리찧는 느낌이었다.

    이네스는 눈을 감은 채 어제 있었던 일을 복기했다.

    ‘그러니까…….’

    전시회장에서 에녹과 혼담이 오갔던 애틀리 후작부인을 만났고, 복잡한 마음에 연거푸 샴페인을 마셨다.

    후작부인과 에녹 사이가 꽤 친밀해 보여서 속이 뒤집어졌던 게 생각난다.

    술기운이 오르는 통에, 술을 깰 겸해서 정원에 나갔는데…….

    에녹과 마주쳤었다.

    ‘맞아, 그랬었지!’

    순간 이네스는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문드문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일시에 짜 맞춰진다.

    밤의 정원에서 나누었던 키스.

    에녹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을 때의 충만함.

    전시회장으로 돌아갔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나누었던 은밀한 눈짓.

    그리고 마차에서 깜빡 잠들었던 것과, 에녹이 이네스를 침실에 데려다주었던 것.

    돌아서는 그를 붙들며 가지 말라고 칭얼거렸던 것까지…….

    ‘세상에,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이네스는 얼굴에 확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번쩍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금실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이었다.

    ‘잠깐, 잠깐만…….’

    이네스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커다랗게 뜨인 녹색 눈동자가 머리카락의 윤곽을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상아 같은 귓바퀴와 신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것처럼 우아한 콧날,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그리고 굳게 닫힌 눈꺼풀까지.

    금빛 속눈썹이 수려한 얼굴 위로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홀린 듯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네스는 문득 소스라쳤다.

    ‘나, 나 그러니까…….’

    술기운과 피로감 때문에 충동적으로 행동한 거라면, 차라리 기억이라도 남아 있지 말 것을.

    어젯밤의 기억이 너무나도 또렷하다.

    달뜬 공기와 뒤섞이던 숨, 서로를 얽어매던 양팔, 유난히 뜨거웠던 체온.

    비처럼 쏟아져 내리던 키스와, 화인을 찍듯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던 새파란 눈동자까지!

    그런데 그때.

    “백작.”

    졸음기가 가득한 나른한 목소리가 울렸다.

    에녹이었다.

    화들짝 놀란 이네스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깨, 깨셨어요?”

    분명 잠들어 있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에녹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온화한 시선을 마주하며,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어제와는 다른 사람 같아…….’

    간밤의 에녹은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한시라도 이네스를 품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다는 양, 집요하게 그녀에게 매달렸다.

    밀려드는 쾌락이 너무나도 짙고 농밀하여, 까무러치기 직전까지 몰린 것도 수차례.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던 건 에녹의 눈동자였다.

    어둠을 함빡 머금어, 당장이라도 그녀를 통으로 잡아먹을 양 새카맣게 가라앉았던 새파란 눈동자.

    이네스를 향한 강렬한 집착과, 에녹이 그녀를 이렇게나 원한다는 사실에 은밀하게 느끼고 말았던 만족감까지.

    그 모든 것들이 아직도 선명한데…….

    하지만 지금 그녀가 마주한 에녹의 시선은, 햇빛을 머금고 따스하게 빛날 따름이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여상한 질문과 함께, 에녹이 이네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그녀에게 뺨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다.

    사뭇 다정한 손길이었다.

    “곤히 주무시더군요.”

    “……각하께서 제가 곤히 잠들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건 아니고요?”

    아차.

    별생각 없이 되물었던 이네스가 혀끝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한편 허를 찔렸는지, 에녹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피식 웃어 버린다.

    “그러게요. 제가 잘못했군요.”

    “…….”

    그 미소가 마치 어린 소년처럼 청량하다.

    이네스는 제멋대로 헤실헤실 웃어 버리려는 입매에 힘을 주었다.

    ‘제발, 일일이 좀 설레지 말자.’

    눈치 없는 제 심장이 다시 쿵쿵거리며 제멋대로 뛰기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때마침 에녹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어젯밤 있었던 일은 모두 기억하시는 거죠?”

    “아…….”

    잠시 말문이 막혔던 이네스가, 결국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그,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그런 쾌락은 난생처음이었다.

    온몸이 녹진녹진하게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

    여태껏 라이언과 보냈던 밤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소 노골적인 말이지만, 이렇게 황홀한 감각을 모르는 채 살았던 시간이 아쉬울 정도였다고나 할까.

    ‘어쩌지?’

    무심결에 제 입술을 매만지던 이네스가, 힐끔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공작 각하가 너무 의식이 돼서 죽을 것 같아…….’

    어제 에녹과 했던 격렬한 키스의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미 어젯밤에 끝까지 간 마당에, 이렇게 의식하는 건 다소 유난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부끄러운 마음에, 이네스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그때.

    “브라이어튼 백작.”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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