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최대한의 용기를 끌어모아 내뱉은 고백은 너무나도 작고 가냘파서.
말을 뱉은 그녀의 귀에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일전에 각하께서 제 입장을 생각해 주신 것, 기뻤어요.”
“백작.”
“예술협회에서 이것저것 훼방을 놓을 때, 제 편을 들어주셔서 감사했어요.”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진심이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이, 비록 공작 각하께서는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자꾸만 목소리가 떨려 나와서, 이네스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심장이 어찌나 미친 듯이 뛰는지, 에녹에게 제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두려울 정도였다.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어요?”
“…….”
“괜찮은 게 아니라, 그만큼 각하께서 희생을 감수하신 거죠.”
이네스의 고개가 더더욱 아래로 수그려졌다.
“각하께서는 정말 좋으신 분이니까, 이미 수많은 폐를 끼쳤으니까.”
이네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저히 에녹을 올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제 마음까지 밝혀서, 공작 각하께 부담을 드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백작, 그건…….”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네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모든 진심을 고백하는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이네스 스스로도 애써 모른 척하려 노력했던 그 진심의 무게는.
실은 너무나도 무거웠다는 것을.
“각하께서 제 마음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그게 두려웠어요.”
그랬기에.
그 모든 진심을 토해 낸 기분은, 홀가분하면서도 사뭇 두려웠다.
‘이제 공작 각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너무 갑작스럽게, 내 감정에만 매몰되어 말씀드린 건 아닐까.’
‘각하께서는 역시 당황스러우시겠지.’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어 놓는다.
그런데 그때.
부드럽게 뻗어 온 손이 이네스의 뺨을 감싸는가 싶더니, 살짝 끌어당겼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이네스는 에녹을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어둠을 머금어 감파란 빛깔로 빛나는 눈동자는 오로지 이네스만을 바라본다.
이네스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밤하늘 같아.’
아득하게 깊고, 눈이 아리도록 선명하며,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워서.
영원히 그 안에 머물고 싶게 하는…….
그리고.
“백작께서, 왜 저를 신경 쓰시는지.”
바짝 갈라진 목소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이네스는 어쩐지 길을 잃은 것처럼 막막해졌다.
정원에서 머무른 지도 꽤 시간이 지났는데, 이제 슬슬 술기운이 가실 때도 됐는데.
온몸을 달아오르게 해서,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만드는 열기와.
그녀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저 푸른 눈동자.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몰라서 물으시는 거…… 아니잖아요.”
도대체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이네스는 에녹의 옷깃을 붙들어 끌어당기며,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에녹이 딱딱하게 굳어짐과 동시에.
촉.
새가 쪼는 것처럼 짧게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이성 간에 나누는 농밀한 키스라기보다는, 오히려 첫사랑을 자각한 어린 소년 소녀들이 나누는 가벼운 키스를 닮았다.
이네스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언제나 여유롭던 에녹은 드물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 날것의 감정을 마주하며, 이네스가 입술을 열었다.
“제가 각하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영민하신 각하께서 모르실 리 없는걸요.”
나직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에녹은 멍하니 달빛 아래의 이네스에게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젖은 눈매.
새하얀 피부 위로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붉은 입술까지, 모조리.
……참을 수 없이 그를 미치게 만들어서.
한편, 커다랗게 심호흡을 한 이네스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최대한 침착한 척 말을 잇는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셔도 괜찮아요.”
“브라이어튼 백작.”
“제가 과음해서 실수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도 괜찮아요. 하지만 전-.”
하지만 이네스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에녹이 허리를 숙이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그녀에게 키스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삼켜 버릴 것처럼, 그야말로 잡아먹을 듯한 키스였다.
호흡도, 목소리도, 모조리 에녹의 입술 속으로 사라졌다.
진녹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읏, 잠, 잠시만……!”
놀란 이네스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에녹은 집요하게 그런 그녀를 따라붙었다.
혀와 혀가 얽히고, 호흡과 호흡이 뒤섞인다.
말캉한 살덩이가 고른 치열을 훑어 내리며 혀뿌리를 얽어매자, 이네스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감각을 느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에녹에게 매달렸다.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는가 싶더니, 어느새 이네스는 에녹의 무릎 위에 앉은 자세가 되어 있었다.
“아, 각하, 잠깐…….”
이네스가 가쁘게 숨을 헐떡였다.
넓고 탄탄한 가슴에 몸이 밀착되자, 다시 한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리저리 휩쓸린 후에야.
에녹은 이네스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약간 풀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놓아주지는 않는다.
이네스를 제 팔 안에 꽁꽁 가둬 놓은 채, 에녹은 웃음기 섞인 느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가 왜 넘어가겠습니까?”
“……각하?”
“저는 여태까지 백작의 그 ‘실수’만을 기다려 왔는걸요.”
이네스를 흔들림 없이 똑바로 들여다보는 푸른 눈동자.
마치 맹금류의 그것처럼 집요한 시선이었다.
“실수이건 진담이건 상관없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에녹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백작께서 이제 아무리 저를 밀어내려 하셔도, 저는 그에 응하지 않으리라는 겁니다.”
흡사 선전 포고 같은 목소리였다.
그 순간 이네스는 확신했다.
‘이제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어.’
애써 억눌러 놓았던 애정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늪지대에 발을 잘못 디뎌서, 순식간에 그 안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처럼.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열렬하게 사랑하게 될 것을 예감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영영 빠져나오지 못해도 좋아.’
오히려 기꺼이 그 안에 파묻히고 싶었다.
“전시회장에…… 돌아가야만 해요.”
이네스는 끊어지기 직전의 이성을 간신히 붙들어, 그렇게 속삭였으나.
“압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에녹은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로 허리를 숙일 따름이었다.
이네스는 다시 눈을 감았다.
당연하게 그의 입술을 받아들인다.
뒤섞이는 숨이, 그녀를 차근차근 집어삼키는 입술의 열기가 너무나도 달콤해서.
머리가 몽롱해졌다.
❀ ❀ ❀
전시회는 늦게까지 지속되어 거의 자정이 되어서 끝났다.
그리하여 단둘이 앉은 마차 안.
이네스는 에녹의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백작.”
“…….”
에녹은 조용히 이네스를 불러 봤으나, 이네스는 영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색색거리며 들려올 뿐.
‘많이 피곤하셨나 보군.’
밤의 정원에서의 일이 끝나고, 이네스와 에녹은 다시 전시회장으로 되돌아갔다.
이네스는 흐트러짐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귀빈들을 접대했다.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는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꽤 오랫동안 전시회장을 비우셨던데, 일은 잘 끝나셨나 봐요?’
애틀리 후작부인이 묘하게 웃으며 짓궂게 묻기는 했으나, 그럭저럭 괜찮은 개인전 마무리였다.
하지만 귀빈들을 돌려보내자마자 상황이 일변했다.
며칠간 쌓인 피로감과 술기운이 함께 밀려든 탓에, 이네스는 마차에 몸을 싣자마자 까무룩 잠들어 버린 것이다.
“…….”
에녹은 물끄러미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예전에는 맞은편에서 잠들어 있던 그녀의 목에, 웃옷을 접어서 괴어 주는 정도밖에 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의 이네스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감이 기껍다.
다만.
‘이건 너무…… 무방비하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에녹 자신도 남자인데, 이렇게 대놓고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버리다니.
아마도 그만큼 이네스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일 테지만.
‘……그래도.’
에녹은 내심 마음이 복잡했다.
그 믿음에 부응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녀를 이성으로 의식하며 끌리는 마음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제기랄.’
두 가지의 감정이 제멋대로 뒤엉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
마차가 멈춰 섰다.
홀린 듯 이네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던 에녹이,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위험했어.’
살면서 이렇게 이성이 끊기기 직전까지 몰려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때마침 호텔 직원이 달려와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도착하였습니다, 각하…… 어라?”
서식스 공작의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든 브라이어튼 백작이라니.
두 사람의 분위기가 다소 묘하다.
직원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