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87)화 (87/120)
  • 87화

    “그렇게 신경 쓰여 죽겠다는 표정 하고 있지 말고, 얼른 따라가세요.”

    애틀리 후작부인은 이번 개인전에서도 가장 중요한 귀빈이었다.

    그러니 이성적으로는 후작부인의 곁에 남아 있는 게 맞는 행동이었지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지금의 에녹은 예의상 남아 있겠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살짝 묵례하여 감사를 표한 후.

    거의 달리듯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사라져 버릴 뿐.

    쫓아가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후작부인은 도리어 놀란 얼굴이 되어 버렸다.

    “……저 사람이 저렇게 허둥지둥 행동할 때도 다 있네.”

    때마침 뒤늦게 도착한 애틀리 후작이, 허겁지겁 후작부인에게로 다가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가렛.”

    “정말, 왜 이렇게 늦었어요?”

    후작부인은 밉지 않게 제 남편을 흘겨보았다.

    “정말, 나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다니 혼나야겠어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용서해 주실 거죠?”

    그렇게 한참을 알콩달콩하게 대화를 나눈 후.

    애틀리 후작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건 그렇고 브라이어튼 백작과 서식스 공작은 어디 있습니까? 한 번 인사라도 나눠야…….”

    “에이, 굳이 지금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잖아요?”

    애틀리 후작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후작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제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부인?”

    “성인 남녀는 가끔, 그들만의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거. 당신도 잘 알면서.”

    짓궂게 대꾸한 후작부인이, 제 남편의 옷소매를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눈치 없게 굴지 말아요, 우리.”

    “부인?”

    “우리는 전시회를 조금 더 즐기자고요.”

    ❀ ❀ ❀

    이네스는 빠르게 전시회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제는 개인전에 전시된 작품에 대한 설명도 얼추 다 해 줬고, 칵테일파티에서도 얼굴을 비출 만큼 비추었다.

    다들 그림을 감상하거나, 귀빈들 사이의 사교 활동에 열중하는 중이었으니.

    딱히 이네스가 전시회장에 더 붙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하아.”

    전시회장에 딸린 정원에 멈춰 선 이네스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동그랗게 뜬 달이 만물에 공평하게 달빛을 드리운다.

    진녹색 시선이 멍하니 주변 풍경을 더듬어 내렸다.

    어둠 속에서 검게 술렁이는 나뭇잎들이 마치 그녀의 복잡한 마음 같았다.

    “……정말, 나는 왜 이 모양인지.”

    이네스는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바깥바람을 쐬면 술기운이 다소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바람은 잠잠했고, 밤공기는 미지근했다.

    이네스는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 잡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꾸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괜히 얼굴에 손부채질을 해 본다.

    ‘빨리 술에서 깨야만 해.’

    이네스는 애써 속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난 이번 전시회의 주최자야. 자리를 오래 비우는 건 예의가 아니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네스의 표정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어째서 이렇게 혼란스러운 걸까.

    자꾸만 온 신경이 에녹에게로 쏠린다.

    영영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 속을 맴도는 것 같다.

    보라, 지금도.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공작 각하와 함께 이렇게 나와 있던 적이 있었지.’

    이렇게 또 한 번 에녹을 떠올리지 않는가.

    분명 지금은 따스한 봄 날씨인데, 이상하게도 겨울 특유의 차갑고 서늘한 공기가 코끝에 맴도는 것 같았다.

    발코니에 기대서 있던 에녹.

    그녀를 돌아보던 무심한 푸른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품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언제부터 그 눈동자가 나만을 바라보기를 바라게 되었는지…….

    그런데 그때.

    “브라이어튼 백작.”

    뜻밖의 목소리에 이네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그녀가 얼어붙었다.

    “……각하.”

    전시회장의 화려한 불빛을 등지고, 에녹이 서 있었다.

    마치 에녹을 처음 만났던 그 겨울 속에서, 그가 밖으로 걸어 나온 것만 같아서.

    지금 그가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제멋대로 마음이 흔들려서…….

    “왜 여기에 혼자 계십니까?”

    에녹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요.”

    수많은 말들이 입 안에 뱅뱅 맴돌았다.

    ‘어째서 저를 따라오셨어요?’

    ‘설마, 후작부인을 혼자 두고 나오신 거예요?’

    ‘얼른 돌아가세요. 최고 귀빈이신데 곁에 있어 드려야죠.’

    하지만 이네스는 그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네요.”

    한숨 같은 속삭임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예전에는 제가 공작 각하를 찾아갔었는데, 이번에는 각하께서 저를 찾아오신다는 게.”

    “…….”

    에녹이 멈칫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동시에 이네스가 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해요, 뜬금없는 소리를 해서 당황스러우시죠.”

    “……백작.”

    “아무래도 조금 과음한 것 같네요.”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에녹과 애틀리 후작부인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며 비워 낸 샴페인 잔이 벌써 세 잔이지 않은가.

    술기운이 가시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정신 차려야죠. 조금 걸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이네스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녀 나름대로는 술에서 깨기 위한 조치였다.

    다만 문제는, 쌓인 피로와 술기운이 뒤섞여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어렵다는 것인데…….

    “앗.”

    발을 헛디딘 이네스가 커다랗게 비틀거렸다.

    “백작!”

    깜짝 놀란 에녹이 반사적으로 이네스의 손목을 붙들었다.

    “차라리 앉아 계십시오. 술기운이 조금 가신 후에 움직이는 편이…….”

    “공작 각하.”

    동시에, 이네스가 과음한 사람답지 않게 또렷한 음성으로 에녹을 불렀다.

    에녹은 홀린 듯이 이네스를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도 홀로 선명하게 빛나는, 오로지 에녹만을 올려다보는 에메랄드 빛깔 눈동자.

    이 세상에서 저 눈동자만이 유일했다.

    그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건.

    한참을 에녹을 응시하던 이네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애틀리 후작부인과의 혼담은…… 어느 정도로 진지한 혼담이었나요?”

    바보, 멍청이 이네스.

    이네스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마구 질책했다.

    다음 날, 술기운이 모조리 가시고 또렷한 정신이 되면.

    그녀 자신이 이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가 분명 후회스러울 것이다.

    그런데도.

    ‘알고 싶어.’

    에녹이 애틀리 후작부인과의 혼담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었는지.

    당시 후작부인에게 품었던 감정이 어느 정도로 깊었었는지.

    “그건…….”

    에녹이 입술을 떼어 내는 그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길다.

    이네스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에녹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건…… 아주 옛날의 일입니다.”

    한편 에녹은 어리둥절한 얼굴로도 성실하게 답했다.

    “저와 후작부인 모두 아직 성년이 되지도 않았을 때였기에, 우리 둘 다 딱히 진지하지는 않았-.”

    “우리요?”

    이네스가 반사적으로 비딱하게 되물었다.

    “우리라고 묶어서 부르실 정도라니, 무척 친근한 관계이셨나 봐요.”

    아, 제발 이러지 마.

    동시에 이네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울고 보채며 떼를 쓰는 어린애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마음이 통제가 되지 않는다.

    자꾸만 제멋대로 뾰족한 말을 내뱉고 마는 것이다.

    “하기야, 두 분께서는 취향도 성격도 무척 잘 맞으실 것 같기는 해요. 혼담이 성사되지 않아서 아쉽지는 않으셨…….”

    “그러는 브라이어튼 백작께서는.”

    순간 에녹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네스를 똑바로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는, 어둠을 함빡 머금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째서 제게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

    정곡을 찔렸다.

    이네스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에녹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누구와 혼담을 나누었건, 누군가에게 마음을 고백받았건.”

    에녹이 나지막하게 되물었다.

    “……여태껏 백작께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잖습니까?”

    폐부를 푹 찔러 오는 질문이었다.

    이네스는 힘을 주어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랬었지.’

    정확히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에게는 에녹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참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애초에 그에게 빠져드는 게 두려워서, 지레 선을 그으며 멀어지려 했던 적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아마 지금이 마지막이겠지.’

    이네스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한발 물러날 수 있는 순간.

    술김에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하다며 깔끔하게 웃을 수 있는 때.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이네스는 바짝 마른 입술을 떼어 냈다.

    “신경 쓰지 않았던 게 아니에요.”

    최대한 또렷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 나온다.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던 거죠.”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무지 에녹의 얼굴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저는.”

    이네스는 고개를 푹 수그려 에녹의 시선을 피했다.

    “공작 각하가 신경 쓰여요.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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