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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86)화 (86/120)

86화

이네스는 황급히 표정을 정돈하며 마주 인사를 건넸다.

“저야말로 후작부인께서 제 개인전에 와 주시다니, 무척 영광스럽습니다.”

“제가 브라이어튼 백작을 초청한 건데 당연히 와 봐야지요.”

애틀리 후작부인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저 이번 개인전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막상 와 보니까 제 생각보다도 훨씬 더 훌륭하더라고요.”

“과찬이십니다.”

“어머나, 너무 겸손해할 필요 없어요.”

후작부인이 손사래를 치며 살갑게 말을 이었다.

“하나같이 굉장히 멋진 그림들이었어요. 특히 백작님 특유의 투명한 색감이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

애틀리 후작부인의 호감이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며, 이네스는 조금 미안해졌다.

상대는 저렇게 그녀를 향해 순수하게 호의를 보여 주는데.

예전에 혼담이 오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심하게 질투심이나 품고 있다니…….

‘잠깐, 질투심이라고?’

순간 이네스가 멈칫했다.

‘……그렇구나.’

그녀는 지금 애틀리 후작부인을 질투하고 있었다.

한편 이네스의 복잡한 마음은 전혀 알지 못하는 후작부인은, 즐겁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브라이어튼 백작께서는 이번 개인전의 주제를 ‘되찾다’라고 정했죠?”

“네, 그랬었죠.”

“뭔가…… 백작님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듯한 주제였다고 말하면, 제가 너무 아는 척을 하는 걸까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후작부인이, 이내 이네스를 향해 빙그레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브라이어튼 백작님께서는 여러모로 독보적인 존재잖아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백작께서도 이미 아시는 부분이겠지만, 칼도로프는 랭커스터보다는 여성의 사회 진출 비율이 높기는 해요.”

그렇게 말하는 후작부인은 다소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칼도로프의 여성들 중, 백작님만큼의 성취를 이루어 낸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저…… 후작부인?”

“그냥,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으음.

이네스는 도르륵 눈동자를 굴렸다.

그도 그럴 것이, 후작부인은 정말로 복잡한 표정이었으니까.

‘글쎄, 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이네스 자신도 저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있었다.

랭커스터에서만 해도, 이네스는 기존의 기성 예술가들과 몇 번이나 충돌했으니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이룬 성취는, 저 혼자서만 해낸 게 아닌걸요.”

“네?”

“랭커스터 내에서 예술가로서 자리 잡는 데에는, 서식스 공작 각하와 왕비 전하께서 큰 도움을 주셨고.”

서식스 공작.

에녹.

그 이름을 떠올리자 괜히 가슴이 욱신거렸으나, 이네스는 부러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칼도로프에서 저를 초청해 주셨기에, 이렇게 개인전도 열 수 있었는걸요.”

“그건…….”

“그러니까 잘 따져 보면, 전 최소한 세 분의 도움을 받은 셈이 되네요.”

이네스가 손가락을 꼽아 가며 말을 이었다.

“왕비 전하와 서식스 공작 각하, 그리고 애틀리 후작부인 세 분 말이에요.”

“아, 그렇게 되나요?”

애틀리 후작부인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이네스는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요. 게다가 제가 성공적으로 이혼할 수 있었던 건, 존경하는 국왕 폐하께서 현명한 판결을 내려 주신 것도 있는걸요.”

그러자 후작부인의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백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뿌듯하네요. 재능 있는 예술가를 지원하는 건 제 기쁨이니까요.”

“…….”

또다.

그 다정한 대답에, 이네스는 다시 한번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애틀리 후작부인은 에녹과 너무나도 닮았다.

그래서 서로 잘 맞았던 걸까.

……혼담 이야기까지 나왔을 정도로.

“어쨌든 그 보수적인 랭커스터에서 이혼 소송에 승소하다니. 정말 멋져요.”

“너무 과분한 평입니다, 애틀리 후작부인.”

“과분하다니요. 전 언젠가 우리 안드레아가 백작님 같은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는걸요.”

후작부인은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스스로 개척하는 사람 말이에요.”

“아니에요, 전…….”

“백작께서는 비록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전 백작님이 무척 존경스럽답니다.”

그런 후작부인을 마주하며, 이네스는 양심이 쿡쿡 찔려 오는 것을 느꼈다.

……애틀리 후작부인은 정말로 좋은 분이신데.

괜히 쓸데없는 질투 때문에, 후작부인을 자꾸만 경계하게 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가슴속에 돌덩이가 틀어 막힌 것처럼 답답한 기분에, 이네스는 곁을 지나던 시종에게 샴페인 잔을 받아 들었다.

차가운 샴페인을 홀짝이고 있으니, 그나마 조금 답답함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한편 에녹은 그런 이네스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과음하는 것 아닌가?’

이네스가 홀짝이고 있는 샴페인은 주스처럼 달콤하여 가볍게 마시기 편했으나, 그와 별개로 다소 도수가 높았다.

며칠 동안 계속 철야하며 개인전을 준비했기에, 저 정도 술로도 술기운이 확 오를 텐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에녹이 이네스 쪽으로 다가갔다.

“브라이어튼 백작, 샴페인은…….”

하지만 에녹의 말은 중간에 가로막히고 말았는데.

“아, 오랜만이네요. 서식스 공작 각하.”

애틀리 후작부인이 반가운 목소리로 에녹에게 인사를 건넨 탓이었다.

상대방이 아는 척을 해 왔는데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후작부인은 에녹과도 오랜 연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가렛. 아니, 이제는 애틀리 후작부인이시지요?”

에녹 또한 살갑게 대응했다.

“그러고 보니 후작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그이는 아직 안 왔어요. 워낙에 일이 바쁜 사람이어서요.”

그렇게 말하는 후작부인의 눈동자에는, 제 남편을 향한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오겠다고는 했으니까요. 얼굴을 볼 수는 있을 거예요.”

“그것 참 다행이군요.”

방금 전만 해도 질투하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으면서.

“…….”

두 사람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네스는 다시 한번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에녹의 태도 또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는 다소 달랐다.

‘평소 공작 각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그리 친밀하게 지내지 않으셨는데…….’

애틀리 후작부인과는 꽤나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때마침 후작부인이 짓궂게 말을 꺼냈다.

“어째 예전 생각이 나네요. 제가 서식스 공작의 얼굴에 홀딱 반해서, 공작께 혼담을 넣어 달라 했었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듣는 사람이 오해할 것 같습니다만.”

“오해라니요, 완전한 거짓말도 아니잖아요?”

“그때 후작부인께서 열다섯 살밖에 안 되셨던 걸 고려하셔야죠.”

“뭐, 열다섯 살이나 지금이나 보는 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걸요.”

애틀리 후작부인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공작 각하께서는 홀로 세월을 비껴가신 것 같네요. 여전히 잘생기셨어요.”

“칭찬 감사합니다.”

“세상에, 스스로가 잘생겼다는 것을 부정조차 안 하시네요?”

후작부인이 놀리듯 그렇게 되묻자, 에녹 또한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사실 워낙에 많이 들어 본 칭찬이어서요.”

“기가 막혀서, 정말.”

그렇게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한 사람들 특유의 친근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마도 이네스는 평생 누리지 못할.

“…….”

복잡한 심경을 감추기 위해, 이네스는 괜히 샴페인만을 홀짝거렸다.

“그래도 내가 이겼죠.”

후작부인이 괜히 양어깨를 우쭐거렸다.

“날 찼던 서식스 공작은 아직도 미혼인 반면, 난 세상에서 제일 다정하고 상냥한 내 남편을 만났잖아요?”

이네스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후작부인은 지금은 결혼한 지 오래고, 열다섯 살 때의 풋사랑은 이미 정리되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니 애틀리 후작부인이 에녹과 얽힐 일은 하나도 없음을 잘 안다.

아는데도…….

‘속이 울렁거려.’

이네스는 결국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저는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습니다.”

“예? 하지만…….”

에녹이 이네스를 만류하려 했으나, 이네스는 가볍게 한발 물러났다.

그러고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짓는다.

“두 분께서 오랜만에 회포를 나누시는 데 방해가 될까 저어되어 말이지요.”

“백작?”

“그럼 조금 있다 다시 뵙겠습니다.”

가벼운 인사만을 남기고, 이네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어라?’

순간 후작부인은 짙은 위화감을 감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녹은 이네스가 사라진 방향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

대화를 재개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작 각하.”

“…….”

“서식스 공작 각하!”

후작부인이 몇 번이나 부른 후에야, 에녹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예. 부르셨습니까?”

그런 에녹을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후작부인이, 한숨을 푹 쉬며 부채로 문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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