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85)화 (85/120)
  • 85화

    그리고 귀빈들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넨다.

    “칼도로프의 귀빈 여러분, 이렇게 제 개인전에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의 첫 번째 전시회를 칼도로프에서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딱 듣기 좋을 정도의 또렷한 목소리, 그리고 흠잡을 데 없이 예의 바른 태도였다.

    귀빈들의 시선에 미미한 호감이 서렸다.

    이네스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개인전의 주제는 ‘되찾다’로 정했습니다.”

    애틋한 시선이 전시회장 벽면을 천천히 더듬었다.

    벽에 걸려 있는 수많은 그림들.

    한때 저 그림들은 모두 라이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었다.

    그녀가 라이언에게 이혼을 청구하고, 그녀가 직접 그린 그림임을 증명하며 되찾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개인전에 전시된 그림들 자체가 제가 제 삶을 되찾았다는 하나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네스의 목소리 위로 저절로 힘이 실렸다.

    “부디 제 그림들이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울림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시회장 구석에서 열렬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

    이네스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동그랗게 부풀어 있는 배를 보아하니, 임신 중기를 훌쩍 넘어선 듯한데.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소녀 같은 느낌을 간직한 귀부인이었다.

    ‘아, 저 사람은.’

    순간 이네스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애틀리 후작부인이시구나.’

    교류전의 운영진들을 칼도로프에 초대한 장본인이자, 한때 에녹과 혼담이 오갔던 귀부인.

    “…….”

    이네스는 복잡한 기분을 애써 억눌렀다.

    가슴에 손을 얹고, 무릎을 굽혀 예를 표한다.

    전 대륙에서 통용되는 정중한 감사의 인사였다.

    그러자 애틀리 후작부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밝은 얼굴을 마주하며, 도리어 이네스는 혼란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애틀리 후작부인은 분명 감사해야 할 분인데.’

    칼도로프에서 개인전을 열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준 사람인데.

    그러니 분명 호감을 가져야 마땅한데.

    어째서 후작부인을 마주하는 순간, 이렇게 마음이 무거워지고 마는지…….

    한편 그 박수를 시작으로, 우레와도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퍼뜩 정신을 차린 이네스가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예를 갖추었다.

    “이런 환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만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에는.”

    그녀가 힐끗 시선을 돌려 에녹을 바라보았다.

    “서식스 공작 각하의 도움이 아주 컸습니다.”

    시선이 마주쳤다.

    호수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이네스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아마 공작 각하께서 저를 지원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제 그림을 되찾아 칼도로프 분들께 선보일 기회조차 얻지 못하였겠지요.”

    이네스는 진심을 담아 말을 맺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각하.”

    다시 한번 커다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저를 향해 박수를 보내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며, 에녹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평소의 매끄러운 미소와는 달리 다소 어설픈 미소였다.

    참 이상한 일이다.

    분명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이네스가 직접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건 꽤 유쾌하지 않은가.

    “저야말로 백작의 천재성을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녹은 정중하게 이네스에게로 공을 돌렸다.

    이네스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

    에녹이 그녀를 중히 생각해 주는 건 분명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복잡해.’

    애틀리 후작부인과 마주친 이래로, 도무지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억지로 에녹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이네스가 고개를 돌렸다.

    내리깐 속눈썹 그늘 아래, 진녹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거센 바람에 휩쓸리는 여름 숲처럼.

    ❀ ❀ ❀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개인전의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은 상태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브라이어튼 백작.”

    “이번에 백작을 꼭 뵙고 싶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되어서 무척 반갑고 기쁩니다.”

    이네스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가장 놀라운 건, 귀부인들뿐 아니라 신사들도 이네스에게 어떻게든 말을 붙이려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랭커스터에서도, 이네스가 이혼했다는 이유로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감히 여자가 이혼을 해?’ 운운하는 부정적인 시각도 분명 존재했다.

    특히 그 시각은 귀부인보다는 신사들에게 더욱 두드러져서, 신사들 중 일부는 이네스를 다소 꺼리고는 했다.

    ‘국경을 하나 넘어왔을 뿐인데,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 줄이야.’

    다소 얼떨떨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사실 누군가에게 배척당하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네스는 즐겁게 대화에 열중했다.

    한편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브라이어튼 백작, 정말로…… 인기가 높군.’

    에녹이었다.

    그의 미간에는 어느새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네스가 인기가 높은 이유는 에녹 자신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교류전에서 능력을 증명했거니와, 화가로서도 능력이 출중했다.

    오랜 기간 랭커스터의 라이벌이었던 칼도로프의 귀족이 직접 이네스를 주목했고, 해외에서 첫 개인전을 열 정도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의 예술적인 재능을 제외하더라도, 이네스는 남성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에녹이 이네스에게 품고 있는 호감 때문에 그렇게 판단한 게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네스는 랭커스터에서도 은근히 인기가 높았으니까.

    비록 한 번 이혼했다는 사실 때문에, 뒤에서 은근히 제멋대로 떠들어 대는 사람들도 존재하기는 했지만.

    젊고 아름다우며, 부유하고, 작위까지 가진 이네스는 여전히 왕국에서 손꼽히는 신붓감이었다.

    이네스 자신이 라이언에 대한 상처가 너무 컸기에, 주변에 지나치게 선을 긋는 바람에 그 관심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

    그를 잘 알고 있는데도.

    신사들이 이네스에게 저렇게 열렬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저렇게까지 인기가 높을 필요는 없지 않나?’

    이상하게 뱃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서식스 공작 각하.”

    때마침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에녹은 평생을 몸에 체화된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돌아보았다.

    아리따운 귀족 레이디 한 명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에녹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갓 사교계에 데뷔했는지, 아직 사춘기 소녀에 가까운 외양이었다.

    “이렇게라도 운영진들을 뵐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저야말로 칼도로프에서 저희 교류전을 이렇게 높이 평가해 주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겸손하세요?”

    귀족 레이디가 양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종알거렸다.

    “이번 교류전은 저도 꼭 한번 가 보고 싶었거든요. 부모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갈 수가 없어서 정말 아쉬웠었는데…….”

    그러고는 이내 해사하게 눈매를 접어 내린다.

    “그 이름 높은 서식스 공작 각하를 이렇게 뵙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과찬이십니다.”

    “아니에요! 각하의 명성은 저희 칼도로프에서도 무척 높거든요.”

    레이디는 다소 부끄러운 얼굴이었으나, 그럼에도 또박또박 말을 맺었다.

    “사실 저, 예전부터 꼭 한 번 각하의 얼굴을 뵙고 싶었어요.”

    그 들뜬 목소리에, 이네스가 에녹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귀족 레이디와 대화를 나누는 에녹을 가만히 응시한다.

    ‘누가 랭커스터 최고의 인기인 아니랄까 봐, 칼도로프에서도 똑같네.’

    레이디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에녹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물론 에녹의 인기 요인은 이해하고도 남았다.

    잘생기고 돈 많은 미혼 왕족이란 어디든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랭커스터에서도 레이디들이 에녹과 말 한마디를 붙여 보기 위해 줄을 서고는 했으니, 여기서도 비슷한 반응인 건 당연했다.

    게다가 저 레이디와 에녹은 딱 봐도 나이 차이가 상당해 보였다.

    이네스가 굳이 저 레이디를 의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를 잘 아는데도…….

    “…….”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가끔씩, 저런 에녹을 볼 때마다.

    까마득하게 거리가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는 모두가 원하는 사람이어서.

    저 멀리, 그녀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반짝반짝 빛나서.

    감히 그녀가 범접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아서…….

    “안녕하세요, 브라이어튼 백작.”

    때마침 명랑한 목소리가 이네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부정적인 상념이 산산이 깨어진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이네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저분은.’

    소녀처럼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사람은.

    랭커스터에서부터 이네스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가워요. 마가렛 애틀리예요.”

    ……한때 서식스 공작 각하와 혼담이 오갔던 귀부인, 애틀리 후작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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