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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84)화 (84/120)
  • 84화

    ❀ ❀ ❀

    그 후.

    칼도로프 측에서는 이네스와 에녹을 무척 융숭하게 대접했다.

    특히 교류전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고, 어떻게든 두 사람과 말을 붙여 보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내 생각보다도 이번 교류전이 정말 호평이었나 봐……?’

    이네스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할 정도였다.

    사실 랭커스터에서는 왕립예술협회의 견제 때문에, 교류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칼도로프는 달랐다.

    사방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초대장들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모든 초대에 참석했다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다는 위기감하에.

    이네스는 일단 ‘개인전부터 끝마친 후에 초대장 답신을 하겠다’라며 선언함으로써, 약간의 유예 기간을 얻었다.

    사실 개인전 준비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도 했다.

    칼도로프에서도 여럿 도움을 주었고, 특히 왕도 칼립스에서도 가장 유명한 전시회장을 통으로 대여해 주는 특혜를 베풀었지만.

    ‘아마 공작 각하께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일정을 맞추기 어려웠겠지…….’

    그나마 라이언의 이름으로 발표됐던 그림들을 되찾아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개인전에 내걸 작품들조차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준비하다 보니, 시간이 까마득히 흘러.

    개인전 당일이 되었다.

    “후우.”

    이네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늘씬한 자작나무처럼 우아한 미모를 자랑하는 귀부인이 앉아 있었다.

    ‘뭐, 그럭저럭 봐 줄 만하네.’

    사람이 몇이나 달라붙어서 꾸민 보람이 있노라고, 이네스는 자평했다.

    다갈색 머리카락은 곱게 틀어 올렸다.

    화장사의 필사의 노력으로 눈 밑에 드리워진 그늘을 가렸고, 창백한 뺨에는 붉은 분으로 생기를 더했다.

    더운 날씨를 감안하여 얇은 옷감을 겹쳐 만든 드레스를 입었는데, 최근 칼도로프의 유행을 따른 것이었다.

    열대어의 꼬리지느러미처럼 얇은 옷감들이 겹쳐지며 오묘한 빛깔을 만들어 낸다.

    “어때요, 마음에 드시나요?”

    곁에서 마지막으로 얼굴을 매만져 주던 화장사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고마워요. 무척 마음에 들어요.”

    이네스가 안심하라는 듯 방긋 웃어 보였다.

    “부인 덕택에 멀쩡한 모습으로 개인전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화장사는 그제야 안도한 얼굴이 되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네스는 거울 속 자신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특히 눈을 뜰 때만 해도 눈꺼풀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피로감이 사라진 게 마음에 들었다.

    며칠간 거의 철야하면서까지 개인전을 준비했으나, 오늘만큼은 수면을 조금 취하기는 했다.

    개인전의 주최인 자신이 피로에 지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 봤자 다섯 시간밖에 자지 못했지만 말이야.’

    아마 오늘이 지나면 조금 쉴 수 있을 테니, 그것을 위로로 삼기로 했다.

    힐끔 시계를 곁눈질로 바라본 이네스가 몸을 일으켰다.

    슬슬 전시회장으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호텔 로비에서 이네스를 기다리고 있는 에녹이 보였다.

    내내 피로한 기색이었던 이네스의 만면에 처음으로 생기가 돌았다.

    “서식스 공작 각하!”

    그녀의 부름에 에녹이 힐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응?’

    처음에는 분명 반가운 얼굴이었는데, 갑자기 무언가 마땅찮은 표정을 짓는 것이다.

    그러고는 대번에 이네스와의 거리를 좁힌다.

    ‘뭐, 뭐지? 내가 뭐 잘못하기라도 했나?’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다.

    성큼 다가온 에녹이 걱정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습니까? 간밤에 제대로 잠을 잔 것 맞아요?”

    아.

    이네스가 얼떨떨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까지 피곤해 보이나요? 화장으로 최대한 가린다고 했는데…….”

    “그렇다기보다는…… 브라이어튼 백작이니까요.”

    에녹이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니, 당연히 알아볼 수밖에 없지요.”

    “…….”

    아니, 갑자기 저렇게 들어오면 반칙이잖아!

    이네스는 얼굴이 훅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 별다른 의도가 없다는 면에서 더욱 문제였다.

    저런 행동, 말투 하나하나가 이네스의 심장 건강에 아주 해로운 것이다!

    “음, 완전히 괜찮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오늘 일정에 무리가 될 정도는 아니에요.”

    어쩐지 간질거리는 기분에, 이네스는 괜히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에녹이 불쑥 이네스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받으세요.”

    “이건……?”

    손을 펴 보자, 손바닥 위에 한입 크기로 소포장된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제가 추측하기로, 오늘 백작은 식사도 걸렀을 것 같은데.”

    에녹이 엄격한 시선으로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맞지요?”

    “…….”

    정답이었다.

    전날 새벽까지 이번 개인전에 참석하는 귀빈들의 목록을 살펴보다가,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며 잠들었던 것이다.

    그 후에는 허겁지겁 오후에 일어나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하느라 바빴으니, 식사를 할 여유가 있었을 리 없었다.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네요.”

    제 건강하지 못한 생활 습관을 새삼 반성하며, 이네스는 초콜릿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동시에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맛있네요.”

    달콤한 것을 물고 있으니 어쩐지 기운이 좀 나는 기분이었다.

    에녹이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가실까요?”

    그 질문에, 다람쥐처럼 연달아 초콜릿을 까먹던 이네스가 냉큼 에녹 곁으로 붙어 섰다.

    ‘이것 참.’

    에녹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형님께서 나더러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놀려 대셔도, 할 수 없겠군.’

    눈앞의 이네스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탕을 가득 문 것처럼 입 안이 달콤해질 정도로.

    ❀ ❀ ❀

    보통의 전시회는 대중에게 직접 전시를 보여 주기 전, 축하 겸해서 귀빈을 초대하여 가볍게 칵테일파티를 연다.

    그리하여 이네스는 마지막으로 개인전을 점검하기 위하여, 한 시간 일찍 전시회장에 도착했다.

    에녹과 함께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며, 전시작들을 살피고 다과와 음료도 넉넉한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쏜살처럼 빠르게 흐른다.

    ‘정말, 공작 각하가 아니었더라면 이 모든 것을 처리하지 못했을 거야…….’

    이네스가 그렇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던 차.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일곱 시까지 딱 10분이 남았군요.”

    개인전 개최 시각은 일곱 시였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하던 에녹이, 이네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긴장되지는 않으십니까?”

    “그럴 리가요. 제 첫 개인전인데, 어떻게 긴장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네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토할 것만 같아요.”

    “……그 정도입니까?”

    에녹이 염려 가득한 시선으로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이네스가 짓궂은 눈동자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뭐, 그래도 괜찮아요.”

    그러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말을 덧붙인다.

    “각하께서 제 곁에 있어 주실 테니까요.”

    “…….”

    그 태연한 목소리에, 에녹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오로지 그를 향한 믿음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진녹색 눈동자.

    저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절대로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당연한 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에녹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네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방긋 마주 웃어 주었다.

    그와 함께, 전시회장 직원이 들어왔다.

    “저, 백작님. 공작 각하.”

    직원은 다소 기가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귀빈들을 맞이하실 시간이에요.”

    ……왜 저런 표정이지?

    이네스는 다소 의아했으나, 어차피 직접 나가 보면 알 일이었다.

    “네, 가요.”

    짧게 심호흡을 한 이네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세상에.’

    밖으로 나선 이네스가 놀란 눈을 깜빡였다.

    예상보다도 훨씬 더 많은 귀빈들이 전시회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대객들을 선별하여 초대장을 보낼 때만 해도, 그 모든 사람들이 개인전에 참석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한 것 같다.

    “백작.”

    에녹의 나지막한 부름에, 잠시 멍해졌던 이네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이네스가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들이 이쪽으로 쏠렸다.

    “저 사람이 바로 브라이어튼 백작인가요?”

    “세상에, 생각보다도 훨씬 젊네요.”

    “애틀리 후작부인께서 직접, 저번 교류전의 운영진들을 초청하셨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서식스 공작께서도 참석을 하셨겠네요.”

    그 소곤거림 속에서, 이네스는 전시회장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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