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브라이어튼 백작, 칼도로프에 초청을 받다!>
대문짝만하게 실린 헤드라인 밑으로 자세한 설명이 쓰여 있었다.
<최근 교류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브라이어튼 백작이, 칼도로프로 간다는 소식이다.
백작의 예술적 성취를 높이 산 칼도로프가, 백작의 개인전을 맡아서 진행하고 싶다며 정식 요청을 보내왔다.
이번 초대는 칼도로프의 명문가인 애틀리 후작 가문에서 진행하였으며, 칼도로프 왕가도 공식적으로 환영의 뜻을 표했고…….>
“…….”
샬럿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신문 속 이네스는 해맑게 미소 짓고 있었다.
처음 샬럿이 이네스를 만났을 적의 그 공주님 같던 소녀처럼, 그야말로 화사하게.
세상의 모든 더러운 이면과 감정 같은 건, 샬럿의 온몸을 물어뜯는 이 처절한 열등감 따위까지도.
전혀 알지조차 못한다는 듯이.
혼자서만 고고한 얼굴을 한 채, 마치 샬럿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 혼자서만 이렇게 진창에 뒹굴고 있을 수는 없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만 이렇게…… 처참한 꼴로 있을 줄 알고?”
저 홀로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반짝반짝 빛나는 이네스도.
그런 이네스를 붙들겠노라며, 가차 없이 자신을 버린 라이언도.
“모두 똑같이 엉망으로 만들어 버려야 공평한 거 아니야?”
샬럿이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그러니까.”
손아귀에 붙들린 신문이 콰득 구겨졌다.
“……두고 봐.”
악의에 가득 찬 속삭임이 어두운 방 아래로 가라앉았다.
❀ ❀ ❀
며칠 후.
이네스는 칼도로프로 가는 마차 앞에 서서, 메리의 배웅을 받고 있었다.
“가주님께서는 위장이 약하시니까 음식과 차가운 물을 조심하시고요. 멀미약은 가방에 챙겨 두었으니 꼭 잊지 말고 드세요. 그리고 또…….”
“그, 메리.”
어째 이네스보다도 메리가 훨씬 더 긴장한 얼굴이다.
줄줄이 흘러나오는 걱정들을 듣다 못한 이네스가 달래듯 입을 열었다.
“나 죽으러 가는 거 아니야, 괜찮아.”
그러자 메리가 대번에 도끼눈을 떴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으세요? 어렸을 적에도 물이 바뀌면 꼭 배앓이를 하셨잖아요. 저는 정말 가주님이 걱정되어서…….”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던 메리는 그만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말았다.
“알았어. 멀미약도 꼭 챙겨 먹고, 차가운 물이랑 음식도 조심할게. 응?”
화들짝 놀란 이네스가 황급히 대답했다.
메리가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정말, 마음 같아서는 가주님을 곁에서 보필하고 싶은데…….”
“괜찮아, 칼도로프에서도 여러모로 신경 써 주신다고 했으니까. 응?”
“우리 가주님은 아침마다 항상 뜨거운 차를 마시는 분이신데. 가주님께서 한 달이나 랭커스터를 떠나 계시다니, 그 차는 누가 챙겨 드리죠?”
메리가 울먹이며 이네스에게 되물었다.
‘아니, 고작 뜨거운 차 가지고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어?’
이네스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되삼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진정한 메리가 눈가를 닦으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기쁘네요.”
“뭐가?”
“가주님께서 드디어 인정받으신 거잖아요.”
그리고 이네스는 메리의 말의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이네스가 인정받았다는 건, 즉.
라이언에게서 벗어나 이네스의 삶을 되찾았다는 뜻이었다.
이네스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어렸다.
메리 못지않게 밝은 미소였다.
“몸 건강히, 조심히 다녀오세요.”
딸을 걱정하듯 신신당부를 하던 메리가 순간 놀란 얼굴을 했다.
이네스가 양팔을 뻗어 메리를 꼭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응. 다녀올게, 메리.”
“건강 조심하시고, 즐거운 시간 되세요. 알았죠?”
다정한 손길이 이네스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여 주었다.
창졸간에 부모를 잃고 부평초처럼 떠밀리기만 하던 어린 아가씨.
라이언의 그늘 아래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연약한 그녀가, 어느새 전남편의 그림자를 떨쳐 내고.
이렇게 홀가분한 얼굴로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주님께 이런 생각을 품는 건, 다소 무례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기특하셔.’
올곧게 장성하여 독립한 딸을 바라보는 기분이 이러할까.
메리는 못내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 ❀ ❀
그렇게 타운하우스의 고용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마침내 이네스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녹이 이네스에게 말을 붙였다.
“메리라고 했나요. 백작을 많이 걱정해 주는군요.”
“네, 메리는 어렸을 때부터 제 곁에 있어 줬던 사람이거든요.”
창밖의 메리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며, 이네스가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요?”
“네. 공작 각하를 포함해서요.”
“…….”
그 여상한 목소리에, 에녹은 어쩐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네스는 모를 것이다.
그녀의 사소한 행동, 가벼운 말 하나하나에 에녹이 얼마나 흔들리는지.
그러니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거겠지.
“……이만 출발합시다.”
“네!”
에녹의 복잡한 속도 모르고, 이네스는 그저 밝은 얼굴이었다.
마차가 경쾌하게 달려 나갔다.
❀ ❀ ❀
긴 여행 끝에, 이네스와 에녹은 마침내 칼도로프에 도착했다.
“와, 정말 신기해요.”
이네스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랭커스터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네요.”
칼도로프 특유의 이국적인 풍경이 이네스의 시야 안을 어지럽혔다.
거리의 가로수들은 잎이 큰 활엽수들이 주를 이루었고,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 또한 따스하다.
차창 너머를 바라보던 에녹이 가볍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칼도로프는 랭커스터보다 남부에 위치해 있으니까요. 바다에 잇닿아 있어서 날씨 또한 온화한 편이죠.”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들어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보니 칼도로프는 해산물 요리가 꽤 훌륭합니다. 왕도인 칼립스에도 유명한 가게들이 몇 있어요.”
“…….”
순간 이네스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서식스 공작께서는 어떻게 저런 소소한 정보까지 알고 계시는 거지?
마치 예전에 한 번 와 보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에녹이 이네스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옛날 일이기는 하지만, 바닷가재 요리를 먹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꽤 인상 깊었지요.”
“…….”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이네스, 정신 차려. 공작 각하께서 칼도로프에 와 보시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제멋대로 들끓는 속을 애써 진정시켜 보려 했으나, 모조리 소용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는 어느새 미심쩍은 목소리로 에녹에게 질문을 던진 상태였다.
“각하께서는 일전에 칼도로프에 와 보신 적이 있나 보죠?”
핫.
동시에 정신을 차린 이네스가 혀끝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에녹은 그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스무 살 때 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국왕 폐하와 함께 방문했었죠.”
“…….”
진녹색 눈동자가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설마, 애틀리 후작부인과의 혼담 때문에 방문하셨던 건가?’
한편 그 열렬한 시선을 느꼈는지, 에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네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렇다면.”
이네스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이성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며 시끄럽게 경고음을 보내오고 있었으나,
“당시에도 애틀리 후작부인을 만나 보셨던 거예요?”
슬프게도 호기심이 승리했다.
뜻밖의 화제에 에녹이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애틀리 후작부인은 왜 물으십니까?”
“그냥 뭐, 궁금해서요.”
이네스가 허둥지둥 대답했다.
“이번에 저희를 초청해 주신 분도 애틀리 후작부인이라 하시고, 그…….”
에라, 모르겠다.
힐끔 에녹의 눈치를 살피던 이네스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이었다.
“왕비 전하는 물론이고, 공작 각하와도 꽤나 친분이 있으신 것처럼 보여서요.”
“아, 제가 그랬습니까?”
“네. 애틀리 후작가 영애의 이름까지도 알고 계셨잖아요?”
“안드레아 말이죠?”
안드레아.
그 친근한 호칭에, 이네스는 괜히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안드레아를 실제로 만나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요. 편지로만 소식을 들었었는데.”
“편지로…… 소식을 들어요?”
“예. 그리고 브라이어튼 백작의 질문에 대답해 드리자면…….”
에녹이 푹신한 마차 의자에 몸을 기대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칼도로프에 방문했을 적, 후작부인을 만나 본 적은 있습니다.”
“당시에는 두 분 다 미혼이셨고요?”
“그랬죠.”
이네스의 복잡한 속내는 전연 모르는 에녹은, 그야말로 말끔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자꾸만 기분이 저조해져서.
“그러셨군요.”
저도 모르게 시큰둥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네스는 괜히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에녹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네스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
도대체 왜 갑자기 이네스의 기분이 확 가라앉아 버렸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에녹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앞에 둔 것처럼 망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