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샬럿은 망연한 낯으로 사라지는 라이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라이언까지…… 나를 버릴 줄이야.’
모두가 제 살길을 찾아 떠났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샬럿 혼자 남겨져 있었다.
‘라이언마저 없으면 내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
훌륭한 명문가와 혼약을 맺고 안주인이 되겠다는 꿈도, 사교계를 쥐락펴락하는 귀부인이 되겠다는 야심도.
모조리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밀려드는 자괴감에, 샬럿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도 한 번쯤 라이언을 만나볼 수 있을까,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싶어서.
라이언이라도 붙들지 않으면 그 누구와도 혼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타운하우스를 앞을 맴돌아 봤지만…….
‘됐어.’
이제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었다.
샬럿은 몸을 돌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어두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수중에 마차를 탈 돈조차 없었기에, 제 하숙집으로 돌아가려면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가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샬럿은 부득불 화려한 구두를 신었다.
파티장을 누빌 때에나 신었던, 거리를 오래 걷기에는 그리 적절치 않은 신발.
“……아파.”
샬럿이 나지막이 숨을 헐떡였다.
그녀가 신은 구두는, 귀족 레이디로서 끝내 내려놓지 못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평민들은 보통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 단화를 신지만, 온갖 파티를 섭렵하고 다녔던 샬럿은 단 한 번도 구두를 벗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윽.”
샬럿이 눈물이 고인 눈으로 발을 내려다보았다.
구두가 아프게 발을 조여 왔기 때문이었다.
발뒤꿈치는 온통 까져 피투성이였다.
그럼에도 샬럿은 끝끝내 고집스럽게 구두를 벗지 않았다.
발을 질질 끌면서,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뷰캐넌 하우스>
어슴푸레한 가스등 불빛 아래에서, 초라한 명패가 희미하게 삐걱거렸다.
낡고 초라한 저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브라이어튼 타운하우스는 물론이고, 고트 자작가의 타운하우스와도 비교조차 되지 않는 저택.
시골의 가난한 귀족들이 사교 시즌에 잠깐 머무는 저렴한 하숙집.
그곳이 샬럿이 사는 곳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열등감이 목을 꽉 죄어서, 샬럿은 짧게 심호흡을 했다.
‘……한때는 이런 곳에는 발조차 들이지 않았었는데.’
라이언과의 불륜이 들통난 이후.
이네스는 절친한 친구라는 명목으로 샬럿에게 지원해 주었던 비용들을 모조리 정리했다.
그리하여 급하게 옮긴 곳이 바로 이 하숙집이었다.
하지만 샬럿은 매번 라이언과 어울려 가장 고급스러운 방에서 잠들었고, 달콤한 음식과 술에 취했으며, 온갖 향락을 즐겨 왔었다.
당연히 이런 허름한 저택, 그것도 한 칸짜리 방을 빌려서 사는 게 눈에 찰 리 없었다.
‘정말 싫어.’
샬럿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절뚝거리며 계단을 올라가자, 낡은 방문 앞에 수북이 쌓인 우편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편지 봉투가 하나 있었으니.
“이건……?”
샬럿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집어 들었다.
성마른 동작으로 편지 봉투를 찢어 내자,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샬럿의 어머니인 제이슨 남작부인이었다.
<내 딸, 샬럿에게.>
무척 당황하여 편지를 쓴 건지, 편지지를 빼곡하게 채운 글자는 흡사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했다.
심지어는 펜을 놀리며 헛손질을 했는지 편지 군데군데에 잉크 얼룩까지 남아 있었다.
<이번에 브라이어튼 백작가에서 연락을 받았다.
세상에, 너무 끔찍하고 추잡스러운 이야기라 지금도 손이 덜덜 떨린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니?
이네스 아가씨의 남편 되는 분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하던데.
정말이니?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렴, 응?>
이네스 아가씨.
그 단어에 샬럿이 손에 힘을 주어 편지지를 꾹 움켜쥐었다.
편지지 귀퉁이가 형편없이 구겨진다.
언제나 그랬다.
샬럿은 샬럿이지만, 이네스는 ‘이네스 아가씨’였다.
그녀들이 처음 만나서 친구가 됐을 때부터 쭉.
<애초에 이번에 네가 랭던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브라이어튼 백작가에서 호의를 베풀어 준 덕택 아니니?
이네스 아가씨가 아니었더라면, 네가 랭던 사교계에 데뷔하는 게 가당키나 했겠어?
이 은혜도 모르는 것아, 난 너를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는데.
어디서 너 같은 게 나온 건지 알 수가 없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빨리 시집이나 보낼 것을!
무슨 부귀영화를 노리겠다고 널 랭던까지 올려 보냈는지 모르겠다.
네 아버지께서는 충격을 받아서 쓰러지셨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어.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어떻게든 이네스 아가씨에게 사죄하렴.
그리고 당장 집으로 돌아와!>
기나긴 한탄과 질책 끝에 편지는 끝이 났다.
“…….”
한참 편지를 노려보던 샬럿이, 편지 봉투를 움켜쥐고는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편지를 쫙쫙 찢어서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다.
‘웃기지 마, 이대로 제이슨 영지로 끌려갈 줄 알고?’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독기가 어려 있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비록 샬럿이 랭던 사교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건 이네스 덕택이었으나.
시골뜨기 귀족 계집애가 사교계의 총아로 발돋움한 것은 모두, 샬럿 스스로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시골뜨기 계집애로 돌아갈 수는 없어. 절대로!’
오랜 기억이 다시 한번 샬럿을 짓눌렀다.
제이슨 남작가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 귀족이었다.
영지조차 갖지 못하고, 부유한 평민들에게까지 굽신거려야 했던 소귀족.
그래도 샬럿은 그 근방에서 가장 예쁜 여자아이였고, 그 사실에 은근한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이네스를 만나는 순간 처참하게 깨져 나갔다.
‘안녕?’
값비싼 비단으로 만든 꽃송이로 장식한 챙 넓은 모자.
옷감을 넉넉하게 재단하여, 발목 위에서 풍성하게 흩날리는 드레스 자락.
동그란 코의 반짝거리는 에나멜 구두.
오랫동안 손질하여 곱게 늘어뜨린, 윤기 나는 다갈색 머리카락까지.
샬럿은 평생 만져 본 적도, 아니,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던 차림을 한.
그야말로 동화 속 공주님 같은 소녀가 샬럿을 향해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 나는 이네스 브라이어튼이라고 해.’
여름의 신록을 닮은 진녹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멍하니 이네스를 마주 보던 샬럿은, 반사적으로 제 초라한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최대한 잘 관리하려고 노력했으나, 발목 위까지 깡똥하게 올라온 낡은 드레스.
밑창이 닳아 빠진 단화.
어머니에게 물려받아 쓴 보닛이 바람결에 후줄근하게 펄럭거렸다.
고급 도자기 인형처럼 어여쁜 이네스 옆에 서자, 샬럿은 그저 촌뜨기 계집아이일 뿐이었다.
그 대조적인 모습이 선명하게 뇌리에 틀어박혔다.
그 순간이었다.
샬럿이 열등감이라는 감정을 처음 배운 때는.
브라이어튼 백작 가족은 가족끼리 단란하게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시골로 내려온 것이었다.
주변에 또래 친구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이네스는, 샬럿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 후, 이네스가 다시 랭던으로 돌아간 후에도.
샬럿과 이네스는 계속 편지하며 지냈고, 그러던 와중 이네스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샬럿은.
‘드디어 내게 기회가 왔어.’
샬럿은 가슴 깊은 곳에 열등감을 은밀하게 감춰 둔 채, 홀로 남은 이네스를 성심성의껏 위로해 주었다.
이네스는 그런 친구에게 마음 깊이 감사했고, 점차 의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네스의 마음을 휘어잡은 후.
샬럿은 은근히 이네스에게 제가 바라는 것들을 속삭였다.
‘나, 다른 레이디들처럼 좋은 선생님에게 교육을 받고 싶어.’
그렇게 편지를 보내자마자, 이네스는 랭던에서도 이름을 떨치던 유명 교사들을 섭외하여 샬럿에게 붙여 주었다.
‘랭던 사교계에 데뷔하는 건 내 꿈이야. 예전부터 좋은 남편과 함께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거든.’
이네스를 좌지우지하는 건,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도 쉬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랭던으로 올라간 그때.
‘라이언.’
그와 마주친 순간 샬럿은 깨달았다.
자신이 이네스에게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려면, 이네스가 열렬히 사랑하는 라이언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샬럿은 그렇게 했다.
……그랬었는데.
털썩!
때마침 방문 너머로 두터운 종이 뭉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간신문이 배달된 것이다.
샬럿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방문을 돌아보았다.
‘오늘도… 이네스 그 계집애의 소식이 실려 있으려나.’
최근 샬럿은 강박적으로 신문이며 잡지 같은 곳에서 이네스의 소식을 모으고 있었다.
승승장구하는 이네스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부럽고 자존심이 상해서 미칠 것만 같은데.
그렇다고 그 소식에 아예 관심을 끊을 수는 없었다.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를 계속해서 자극하는 느낌이었다.
상처가 나으려면 아예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손이 가는 것이다.
비칠비칠 방문 앞으로 걸어간 샬럿이, 허리를 굽혀 두툼한 신문 뭉치를 주웠다.
엘튼지.
성마른 손길로 페이지를 넘기자, 문화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하…….”
샬럿이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온갖 언론 매체에 이네스에 관한 기사가 실리는 건, 이제 당연한 일이라지만.
이렇게 문화면 첫 번째 페이지를 통으로 이네스에게 할애하는 건…….
‘나한테 너무하잖아.’
온 세상이 샬럿을 조롱하는 것 같다.
샬럿은 이를 악물며 신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