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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81)화 (81/120)
  • 81화

    ❀ ❀ ❀

    헬레나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에드워드는 창문 너머의 어느 지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서식스 공작과는 대화가 잘 마무리되었나요?”

    차분한 질문이 울렸다.

    에드워드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헬레나는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에드워드의 곁으로 다가갔다.

    창문 너머로 브라이어튼 백작가와 서식스 공작가의 문장을 단 마차들이 제각기 달려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에드워드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참, 그새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달려가기는.”

    헬레나는 제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재 에드워드가 무슨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조금은 불만스러운 듯도 했고, 기특한 듯도 하며, 만족스러우면서도 시원섭섭한 표정.

    그래, 마치.

    ‘품 안에서 고이 기르던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 같은 표정이시네.’

    헬레나가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두 사람이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어쩌실 생각이세요? 반대하실 건가요?”

    “아뇨,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섣부른 호기심 때문에 에녹이 다칠까 봐, 그게 염려스러웠을 뿐이에요.”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에녹은 이미 성인이고, 나는 그 녀석의 선택에 간섭할 권리가 없기는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에드워드의 목소리에서는 시종일관 미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흐음.’

    제 남편을 관찰하듯 바라보던 헬레나가, 이내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치고는 꽤 서운해 보이시는데요?”

    “그야…….”

    말끝을 흐리던 에드워드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하나뿐인 귀애하던 동생이 훌쩍 커서 여인을 만난다는데,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역시 서운하셨던 거지요?”

    “당연한 말씀을 다 하십니다. 품 안의 자식을 내놓는 기분이라고요.”

    그 후로도 몇 마디 불평불만을 늘어놓은 후에야, 에드워드는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 녀석에게는 브라이어튼 백작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어머나, 그렇게 생각하세요?”

    “솔직히 그렇잖습니까? 그 녀석, 매번 세상만사에 관심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툴툴거리는 그 목소리에는, 동생을 향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가득 서려 있었다.

    “이제는 꽤 화도 내고, 짜증도 부리고, 환하게 웃기도 하잖습니까.”

    “…….”

    헬레나는 대답 대신 제 남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에드워드가 왕세자로 책봉되어 왕위를 잇기 전까지, 매번 그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던 어린 동생.

    그 동생에게 에드워드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형제로서의 애정과 더불어, 죄책감, 그리고 미안함.

    “……에녹은 언제나 절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었죠.”

    에드워드가 한숨을 섞어 입을 열었다.

    에녹 나름대로 에드워드를 배려하기 위함임을 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에녹의 덤덤한 태도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형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었노라고 하소연을 하거나, 화를 냈더라면 괜찮았을까.

    그런데 그때.

    “에드워드의 말대로, 예전과는 달리 서식스 공작이 꽤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에요.”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여 에드워드의 말을 긍정했다.

    에드워드가 슬그머니 헬레나를 내려다보았다.

    “당신 눈에도 그렇게 보입니까?”

    “네, 그러니까 너무 품 안의 자식처럼 싸고돌지만 말아요.”

    헬레나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당신, 그거 중증이라니까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아마 서식스 공작도 당신이 그렇게 전전긍긍하는 게 부담스러울걸요?”

    그 신랄한 지적에, 에드워드는 다소 머쓱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당신 말마따나 서식스 공작도 이미 성인이잖아요.”

    “헬레나.”

    “공작이 무언가를 선택했다면, 그리고 그 선택이 옳다고 확신한다면. 우린 그냥 공작을 믿고 지지해 주면 돼요,”

    순간 에드워드가 허를 찔린 낯을 했다.

    헬레나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에드워드가 어렸을 적의 일로 공작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알아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어린 시절에 얽매여서 살 수는 없잖아요?”

    “……그건.”

    “무엇보다도 그런 건 공작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헬레나가 재차 못을 박았다.

    “그러니까 물가에 내놓은 자식처럼 어쩔 줄 모르고 걱정하는 건 이제 그만두세요. 알았죠?”

    “…….”

    한참을 입술을 달싹이던 에드워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겠습니다.”

    “좋아요.”

    헬레나가 기운 내라는 것처럼 방긋 미소를 지었다.

    에드워드가 슬그머니 미간을 좁힌다.

    ‘어째, 우리 집안 남자들은 여자에게 붙잡혀 사는 느낌이 드는데.’

    에녹 그 녀석도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꼼짝도 못 하지 않나.

    아직 결혼은커녕 연인 관계로 발전조차 못 한 녀석이, 벌써부터 백작에게 잡혀 살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뭐, 그래도 난 결혼했으니까. 내가 더 낫지.’

    그런 자기합리화와 함께, 에드워드는 제 아내를 따라 피식 미소 지었다.

    ❀ ❀ ❀

    밤이 이슥한 시간.

    샬럿은 멍한 얼굴로 고트 자작가의 타운하우스 앞에 서 있었다.

    “……라이언.”

    차가운 공기 중으로 나지막한 혼잣말이 흩어졌다.

    현재 샬럿은 점점 더 고립되는 중이었다.

    라이언의 정부 노릇을 하며 받았었던 돈은 끊긴 지 오래.

    생활은 점점 악화일로로 향할 뿐, 도무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참다못해 어떻게든 다시 한번 라이언을 만나 보려 고트의 타운하우스로 찾아왔으나, 결과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아니, 지금 우리 집안도 휘청거리는 판인데!’

    득달같이 쫓아 나온 고트 자작 대부인이 샬럿을 향해 짜랑짜랑하게 언성을 높였던 것이다.

    ‘너 따위 정부에게 돈을 챙겨 달라니, 네가 제정신이니? 염치도 없지!’

    ‘제발요, 라이언은 분명 저를 지원하려고 할 거예요.’

    샬럿은 간절하게 고트 자작 대부인에게 매달렸다.

    ‘라이언을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도 조용히 물러날…….’

    ‘시끄러워!’

    날카로운 외침이 채찍처럼 샬럿을 후려쳤다.

    ‘애초에 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자작 대부인!’

    ‘왜 우리 귀한 아들에게 꼬리를 쳐서 이 사단을 만들어!’

    고트 자작 대부인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그 어떤 것을 보는 것처럼, 질색을 하며 샬럿을 노려보았다.

    ‘너만 아니었어도 우리 아들들이 이렇게 고생할 필요 없었어!!’

    ‘하, 하지만 라이언은 저를 사랑했어요. 라이언은……!’

    ‘뭐? 사랑?’

    고트 자작 대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듣자 듣자 하니까 별소리를 다 하네. 내 아들은 널 싫어해, 아예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샬럿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작 대부인이 입술을 비틀며 말을 이었다.

    ‘난 라이언의 어미야! 그런 내가 그 애의 마음을 모르겠니?’

    ‘그, 그래도……!’

    ‘그러니까 너도 그만 정신 좀 차리고, 우리 좀 귀찮게 하지 말렴. 알았어?!’

    두 눈을 부라리며 쏘아붙인 고트 자작 대부인이, 홱 돌아서서 타운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떨거지들이 다 달라붙어!!’

    그 외침을 끝으로.

    쾅!

    대문이 닫혔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바람에, 샬럿은 그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아, 안 돼.”

    사실 샬럿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수세에 몰려서, 고트 자작가의 타운하우스 앞에서 진을 치기 전.

    라이언을 한 번이라도 만나 보기 위하여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녔던 적이 있으니까.

    ‘요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간절하게 라이언에게 매달리던 샬럿이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언제나 그녀를 바라볼 때면 싱글벙글 웃었던 라이언이, 저렇게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 말이다.

    저절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저, 정말로 이렇게 날 버리려고 하는 거야? 응?’

    그 절박한 채근에, 라이언은 귀찮아 죽겠다는 투로 대꾸했다.

    ‘아, 그만 좀 해.’

    ‘라이언!’

    어떻게든 라이언과 관계를 회복해 보려, 살가운 척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샬럿의 얼굴이 절망감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라이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이렇게 얼굴 볼 사이이기는 한가?’

    ‘라이언,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됐고, 다시는 보지 말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라이언이 샬럿을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이네스를 어떻게 붙잡을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죽겠으니까.’

    ‘이네스? 지금 이네스가 중요해? 우리 관계는!’

    ‘샬럿.’

    발작하듯 언성을 높이던 샬럿이 소스라쳤다.

    라이언이 흉흉한 기세로 그녀를 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주먹을 꽉 움켜쥔 모습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내 말, 못 알아들어?’

    라이언이 한마디 한마디 말을 짓씹어 뱉었다.

    ‘더 이상 널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라이언은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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