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왕립예술협회는 엄연히 국가의 녹을 받으며 운영되는 협회입니다. 그들에게 지급되는 월급은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지니, 마땅히 국민에게 부끄럽지 않은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데.”
“저, 각하?”
“다른 예술가가 국위 선양을 하는 상황에 그를 본받지는 못할망정, 해외에 개인전을 연다는 이유로 제멋대로 깎아내리려 드는 꼴이라니.”
에녹은 정말로 혐오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너무 치졸하지 않습니까?”
……공작 각하, 평소 왕립예술협회에 엄청나게 불만이 많으셨나 봐.
하지만 내심 속이 시원하기는 했다.
비록 이네스는 왕립예술협회에 대놓고 불만을 제기하기에는 불편한 입장이었으나, 그녀 또한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뭐랄까, 간지러웠던 부분을 긁어 주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각하께서는 지금……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는 거구나.’
그러니까, 저 기나긴 말들 속에 내포된 속내는 결국.
‘내가 이렇게 화가 난 것은, 당신 때문뿐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니 괜한 신경 쓰지 말고 죄책감도 가지지 마라.’
……어떻게든 이네스를 안심시키려 함이 아닌가.
그를 깨달은 순간.
이네스는 불현듯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에녹이 미간을 좁히며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아, 제가 웃었나요?”
이네스는 반사적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어느새 둥그런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이 만져진다.
“그냥, 각하와 제 마음이 이렇게나 비슷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요.”
이왕 이렇게 된 것, 이네스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때 저는 왕립예술협회의 일원이 됨으로써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문득 뇌리에 라이언이 떠올랐다.
새삼 생각해 보면, 이네스의 모든 열등감의 근원은 라이언이었다.
회귀 전 과거, 라이언이 저 협회에 들어갔다고 영광이라며 거들먹거렸던 때가 있어서일까.
어떻게든 왕립예술협회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라이언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아.’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 왕립예술협회며 대중들, 그 모든 사람들에 앞서.
눈앞의 이 남자에게 인정받는 게 우선이었다.
이 남자에게만 인정받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이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각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알겠어요.”
“……브라이어튼 백작.”
“굳이 왕립예술협회에 들어가지 않아도, 남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이네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햇살처럼 환한 미소였다.
“저는 이미 한 사람의 예술가예요.”
이네스는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제 오래된 열등감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녀의 미소는 티끌 한 점 없이 해사하기만 하다.
그 미소가 눈이 부셔서.
계속 저 미소를 마주하고 있다간, 제멋대로 흔들리는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아서.
“……아셨다면 됐습니다.”
에녹은 괜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발 물러났다.
“그건 그렇고, 각하.”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것처럼, 에녹이 힐끔 이네스를 곁눈질로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진녹색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맞받았다.
“제가 마음의 부담을 느끼지 않기를 바라셨기에, 일부러 방금 전처럼 장황하게 말씀하신 거죠?”
……그걸 눈치챌 줄이야.
에녹은 대답 대신 걸음을 조금 빠르게 했다.
이네스가 종종걸음으로 그의 곁에 바짝 따라붙었다.
“뭐예요, 왜 갑자기 걸음은 빨리하고 그러세요?”
“…….”
“설마 제가 정곡을 찔러서 그런 거예요? 네?”
수없이 쏟아지는 질문에도, 에녹은 굳게 입술을 다물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침묵 자체가 이네스의 말을 긍정하고 있었다.
그런 에녹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참을 수 없이 유쾌한 기분이 들어서.
“역시 저를 위해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게 맞구나. 그렇죠?”
이네스는 도무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브라이어튼 백작.”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에녹이 이네스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네.”
“이번 칼도로프에서의 초청 말입니다.”
그의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했기에,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하고 말았다.
“혼자 가시는 편이 어떻습니까?”
“가, 갑자기요?”
너무 놀란 이네스가 저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었다.
‘침착해, 이네스.’
이네스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객관적으로 에녹과 이네스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업무적 협업, 그 이상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너무 과한 아쉬움을 표한다면, 그 자체가 공작 각하께 부담으로 다가올지도 몰라.’
그러한 판단으로, 이네스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와 공작 각하가 함께 초청받은 거잖아요. 그런데 저 혼자 가게 된다면, 칼도로프에게 무례를 저지르는 일 아닐까요?”
“그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적당히 이유를 대어 정중하게 거절하는 쪽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하지만 에녹은 완고했다.
이네스는 아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다면.”
커다랗게 심호흡을 한 이네스가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그 이유를 여쭈어봐도 될까요?”
“그건…….”
에녹은 아까 나누었던 에드워드와의 대화를 되새겼다.
‘이번 교류전에서 브라이어튼 백작이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네 후광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
‘너와 브라이어튼 백작,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네가 물러나는 게 좋지 않을까?’
솔직히 에녹 자신도, 에드워드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염려에 일리가 있다는 것도.
비록 에드워드 앞에서는, ‘내가 이기적인 게 맞다’라며 뻔뻔하게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막상 브라이어튼 백작의 얼굴을 보게 되니까.’
차마 이네스가 곤란한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여러모로 예술계에서 반발이 일지 않았습니까.”
에녹은 세심하게 말을 골랐다.
“그래서 제가 칼도로프에 동행하는 게, 브라이어튼 백작을 시기하는 사람들을 들쑤시는 결과가 될까 봐 염려스럽습니다.”
“아.”
이네스가 허를 찔린 얼굴로 두 눈을 깜빡였다.
그 후.
그녀의 목소리 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
“설마 그런 소문들 때문에 칼도로프의 초대를 거절하실 생각이세요?”
“브라이어튼 백작의 예술적 성취가 더 중요하니까요.”
“저도 그런 소문들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방금 전만 해도 귀족들이 직접 제 뒷담을 하는 걸 들었는걸요.”
이네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각하께서는 제 편을 들어 주셨잖아요.”
“브라이어튼 백작.”
“각하께서는 잘못된 쪽은 제가 아니라 왕립예술협회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런데도 저를 위하여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건…….”
진녹색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그들의 논리에 굴복하는 일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
그 말에, 에녹은 드물게 허를 찔린 얼굴이 되었다.
이네스는 커다랗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 이 말을 하는 건, 이네스에게도 단단히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으니까.
“그래도 괜찮다고, 저는 공작 각하와 같이 가고 싶다고…… 그렇게 말씀드리면.”
이네스는 용기를 내어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각하께서는 많이 곤란하실까요?”
“…….”
에녹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네스의 시선을 맞받았다.
‘어쩌지, 내가 정말로 무리한 요청을 한 거라면…….’
이네스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와 동시에 에녹이 피식 미소 지었다.
“아뇨.”
“……공작 각하?”
“솔직히 말씀드리면, 브라이어튼 백작께서 그렇게 대답해 주시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었는데.
지금의 에녹은 묘하게 속이 시원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제가 비겁했군요. 이건 뭐, 백작에게 결정을 미뤄 버린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런 말씀 마세요.”
이네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저는 제게 먼저 의견을 물어봐 주셔서 감사한걸요.”
진심이었다.
여태껏 이네스는 제 의견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그녀에게 있어 에녹은 아주 특별했다.
처음으로 그녀를 동등한 위치로 대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준 사람.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런 고민을 하실 때면, 꼭 제게도 말씀해 주세요.”
이네스가 밝게 웃으며 양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알아요? 둘이서 머리를 맞대면 좀 더 좋은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한참을 묵묵히 이네스를 바라보던 에녹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겠습니다.”
확연하게 가벼워진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