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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79)화 (79/120)
  • 79화

    ‘저 사람들은…….’

    귀족들 사이에 끼어 있는 몇몇 남자들이 눈에 익었다.

    왕립예술협회 사람들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교류전 축하연에서 대충 스쳐 지나가며 본 정도였으나, 이네스는 그들의 얼굴을 아주 잘 알았다.

    회귀 전, 라이언이 왕국 최고의 예술가로서 승승장구하며 왕립예술협회에 적을 두었을 때.

    라이언을 시중들다가 몇 번 만나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왕실에 성과 보고를 하러 온 건가?’

    왕립예술협회는 엄연히 왕실에서 세운 협회였기에, 주기적으로 자신의 성과를 왕실에 보고해야 했다.

    이네스 자신만 해도, 이전 생에서 라이언의 성과를 대신 만들어 주기 위해 수없이 그림을 그렸었다.

    그 당시를 생각하던 이네스는 입 안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아무래도 최대한 부딪치지 않고 지나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칼도로프의 개인전도 확정된 상황이니까.’

    당분간은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았다.

    물론 이네스라고 해서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

    면 대 면으로 마주한다면 쏘아붙일 말도 아주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마주쳐 봤자, 서로 얼굴만 붉힐 터다.

    무엇보다도 예술계의 주류를 이루는 왕립예술협회와 대놓고 마찰을 일으킨다면…….

    ‘서식스 공작 각하.’

    언제나 그녀를 믿고 지지해 주는 에녹에게 피해가 갈 것만 같다.

    이네스 자신이 무어라 험한 말을 듣는 건 상관없었다.

    그러나.

    ‘나 때문에 서식스 공작께서 이런저런 싫은 소리를 들으시는 건 안 돼.’

    그러한 판단에, 이네스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때.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날 선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질문에,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협회 사람들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질문을 한 사람은 바로…….

    “경들이 생각하는 오만방자함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서, 서식스 공작 각하?”

    에녹이었으니까.

    그들을 똑바로 응시하는 칼날 같은 새파란 시선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건. 우리 예술계에 적응할 노력은 할 생각을 안 하고, 자꾸 밖으로만 나돌려고 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개중 한 사람이 애써 항변했다.

    그 졸렬한 변명에 에녹의 입술 끝이 비틀려 올라갔다.

    “애초에 적응하도록 놓아둘 생각은 있고요?”

    “예? 그게 무슨…….”

    “앞에서는 랭커스터의 예술계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떠들어 대면서, 뒤에서는 교류전이 천박하다며 실컷 깎아내린다면.”

    에녹이 신랄하게 되물었다.

    “그 잘난 예술계에 녹아들어 갈 마음이 들기나 하겠습니까?”

    “아니, 각하……!”

    “왕립예술협회에서 브라이어튼 백작의 개인전 인증 요청을 계속 반려하고 있다는 것.”

    그 순간 이네스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설마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

    ……알고 계셨구나.

    일부러 에녹에게 부담이 갈까 봐, 개인전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에녹이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예술계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적어도 훼방은 놓지 말아야지요.”

    “…….”

    “…….”

    그에 대해서는 차마 변명할 말이 없었으므로, 귀족들은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게다가 여러분께서는, 아무래도 이번 교류전의 운영진이 누구였는지를 잊은 듯한데.”

    엄중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왕비 전하께서는 브라이어튼 백작과 나, 두 사람을 운영진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순간 귀족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이네스를 헐뜯는 일에 심취하여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에녹 또한 교류전의 운영진이었으며, 그러므로 교류전을 깎아내리는 건 곧 에녹에게도 모욕이라는 것을.

    “참고로 왕비 전하께, 브라이어튼 백작을 운영진으로 추천한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에녹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논리로 따지자면, 나는…… 아, 그래요.”

    그의 입술 위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얼음으로 빚어낸 듯한 차가운 미소였다.

    “브라이어튼 백작의 오만방자함을 부추긴 변별력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까?”

    “그, 그럴 리가요!”

    “어떻게 감히 공작 각하께 그런 망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제각기 입을 열었다.

    그 중언부언한 변명들을 지겨운 표정으로 듣는 것도 잠시.

    에녹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그 망발, 브라이어튼 백작에게는 해도 됩니까?”

    폐부를 쑤시는 질문이었다.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조리 입을 꾹 다물었다.

    “…….”

    “…….”

    그 묵직한 침묵을 깨뜨리며 에녹이 말을 이었다.

    “왕립예술협회에 들어올 정도의 예술가라면, 상당한 소양과 그에 어울리는 인품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서로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침착했던 에녹이 이렇게 대놓고 불쾌함을 표하는 일은 무척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저열하게 뒤에서 남의 뒷말만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당신들에게 가졌던 일말의 기대까지 짓밟히는 기분이 드는군요.”

    에녹은 서늘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을 맺은 에녹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짙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되겠소.”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서식스 공작께서도 브라이어튼 백작을 저렇게 감싸고만 도실 줄이야.”

    “백작을 이대로 두었다가는 우리의 위신이 완전히 꺾여 버리고 말 겁니다.”

    “맞습니다.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사람들의 눈동자 위로 짙은 감정이 일렁거렸다.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한 적의였다.

    ❀ ❀ ❀

    한편, 이네스는 벽에 기대어 숨은 채 어찌할 바 몰라 하고 있었다.

    ‘어, 어쩌지?’

    왕립예술협회 사람들과의 충돌 없이, 그대로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랐을 뿐인데.

    뜻밖에도 에녹이 저들 앞에서 대놓고 그녀의 편을 들어 줄 줄은 몰랐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실망스럽다, 라고 말씀하실 줄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네스는 손을 들어 가슴 위를 꾹 짓눌렀다.

    ‘기뻐해서는 안 되는데.’

    에녹이 자신을 위해 나서 주었다.

    그녀를 향한 온갖 말도 안 되는 음해를 막아 주었다.

    귀족들의 반발까지 무시하며, 그녀의 편이…… 되어 주었다.

    그 사실이 어쩔 수 없이 기뻐서.

    ‘그만 좀 웃어, 이네스.’

    이네스는 자꾸만 미소가 피어오르려는 입술을 잘근 짓씹었다.

    그리고 그때.

    “브라이어튼 백작.”

    에녹이 느닷없이 그녀 앞에 불쑥 나타났다.

    “헉!”

    놀란 이네스가 가쁘게 헛숨을 몰아쉬었다.

    “고, 공작 각하?”

    “도대체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에녹은 다소 성마른 목소리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백작께서 이런 곳에 숨어 계시는 겁니까?”

    “그, 그건.”

    에녹이 턱짓으로 등 뒤를 가리키며 미간을 구겼다.

    “저 머저리 같은 인간들도 제멋대로 왕성을 활보하는데, 백작이 이러고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 머저리라니요…….

    에녹답지 않은 과격한 언사였다.

    화들짝 놀란 이네스가, 괜히 에녹의 등 뒤를 힐끔거리며 사람이 있는지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왕립예술협회 사람들은 이미 꽁무니를 뺀 지 오래였다.

    ‘다행이야.’

    그렇게 내심 안도하는 것도 잠시.

    이네스는 힐끔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그 시선을 눈치챈 에녹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아…… 그게.”

    이네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고도 한참을 고민한 끝에, 긴 한숨과 함께 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어째서입니까?”

    “아까 전, 왕립예술협회 사람들과 언쟁이 있으셨잖아요.”

    미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이네스가 두 눈을 내리깔았다.

    상아처럼 새하얀 얼굴 위로 희미한 수심이 어렸다.

    “……제가 아니었더라면 각하께서 그렇게 언쟁하실 필요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네스의 죄스러운 표정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뜻밖에도 에녹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어째서 브라이어튼 백작 때문이라고 생각하지요?”

    허를 찌르는 질문에, 이네스는 그만 얼떨떨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물론 백작을 모욕하는 그들의 행동이 아니꼬웠던 건 사실이지만, 저도 엄연히 교류전 운영진의 일원입니다.”

    “네? 그건 저도 알고 있지만…….”

    “그러니, 나를 위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지요.”

    “……각하를 위해서, 라고요?”

    “당연합니다. 이번 교류전은, 칼도로프에서 인정할 정도로 훌륭한 성과를 얻었잖습니까?”

    “그, 그렇기는 하지만요.”

    이네스 자신이 기획하여 진행한 교류전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교류전 자체도 성공적으로 끝났을뿐더러, 교류전으로 파생된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네스와 에녹 모두, 이번 교류전에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교류전을 두고 천박하다 일컫는 것은 저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지요. 또한.”

    이네스가 무어라 말할 틈조차 없었다.

    에녹은 작심한 듯이 말을 쏟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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