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78)화 (78/120)
  • 78화

    이네스 브라이어튼.

    현 랭커스터 사회에서 그녀만큼 뜨거운 감자는 없었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교류전을 훌륭하게 끝마쳤다는 점에서 평판이 좋았고, 사교계에서도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으며.

    백작으로서 가문을 다스리는 능력도 그럭저럭 호평이었다.

    특히 백작가의 사업을 대리 경영하는 전문 경영인들은, 라이언이 브라이어튼 백작일 적보다 훨씬 사업 진행이 편해졌다며 입을 모았다.

    다만 이네스의 행보에 모두가 만족하지는 못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혼이라니요.’

    ‘부부끼리 대화도 좀 나누고, 조금 더 마음을 다잡아서 잘 살아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네스의 이혼을 은근히 지지하는 귀부인들과는 달리, 신사들은 아무래도 라이언의 입장에 좀 더 감정 이입을 하고는 했다.

    비록 소수이기는 했으나 그런 의견들이 알음알음 나올 정도로 말이다.

    거기다 예술계에서도 이네스에 대한 평판은 반반으로 나뉘었다.

    ‘이번 교류전으로 예술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화방 거리에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고, 그림이나 조각을 사겠다는 사람들도 늘어났어요.’

    아직 빛을 보지 못한 무명 예술가들은 이네스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이었으나,

    ‘브라이어튼 백작이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너무 튀는 것 아닙니까?’

    ‘혼자서만 잘났다고 이것저것 일을 벌이는 게 능사가 아니에요.’

    ‘우리 예술계에 적응할 생각을 해야지, 천둥벌거숭이처럼 굴기는…… 쯧.’

    기성 예술가들은 여전히 날이 선 시선으로 이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칼도로프에 가는 것 말이야.”

    에드워드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에녹을 바라보았다.

    “너는 빠지는 게 어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에녹의 푸른 눈동자가 삽시간에 날카로워졌다.

    에드워드가 한숨을 섞어 대꾸했다.

    “브라이어튼 백작만 보내고, 너는 그냥 랭커스터에 남아 있으란 소리야.”

    “어째서입니까?”

    “그야 넌 하나뿐인 내 동생이니까.”

    에드워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미 주변에서 너와 브라이어튼 백작에 관하여 말이 많아.”

    “그런 것 따위, 저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쯤 잘 아시잖습니까.”

    “하지만 내가 신경 쓰여.”

    에드워드가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동시에 형제의 시선이 마주쳤다.

    “…….”

    에녹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였더라면 어떻게든 반발했을 텐데, 이렇게 말문이 막히는 이유는.

    에드워드가 진심으로 자신을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가 다소 날 선 어조로 에녹에게 쏘아붙였다.

    “네 평판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르는데, 나더러 너와 브라이어튼 백작을 함께 보내라고?”

    “형님.”

    “아까 말했잖아. 예술계에서 이미 브라이어튼 백작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고.”

    에드워드가 신경질적으로 의자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녹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저건 에드워드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 말들 중에 무슨 말까지 있었는지 알아?”

    에드워드가 미간을 좁히며 말을 맺었다.

    “이번 교류전에서 브라이어튼 백작이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네 후광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

    “그건 말도 안 되는……!”

    “알아, 내 아내는 그렇게 허투루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아내로서 마음 깊이 사랑하고, 왕비로써 굳건히 신뢰하는 헬레나를 떠올린 후에야.

    에드워드는 조금이나마 차분해질 수 있었다.

    “너와 브라이어튼 백작,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네가 물러나는 게 좋지 않을까?”

    “…….”

    에녹은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에드워드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하지만 형님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에드워드의 제안이 얼마나 합리적인지를 깨닫는 것과는 별개로.

    “제 평판보다도 브라이어튼 백작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에녹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라도 하듯, 에녹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남들이 무어라 지껄이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브라이어튼 백작을 지킬 겁니다.”

    “…….”

    “그녀의 천재성은 여기서 꺾여서는 안 돼요. 국가적인 손실입니다. 그러니 저는…….”

    에녹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그녀의 곁에 있을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절대로요.”

    정말로 그것뿐이야?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희미한 의심이 그에게 속살거렸다.

    그러나 에녹은 그 질문을 묵살해 버렸다.

    나중에 고민해도 될 문제다.

    “…….”

    한편 에드워드의 두 눈이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그는 뚫어져라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에녹은 그 시선을 똑바로 맞받았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너는 분명 예전에, 브라이어튼 백작의 천재성 때문에 그녀를 돕겠다고 말했었지.”

    에드워드가 무겁게 입술을 떼어 냈다.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백작을 돕는 거야? 정말로?”

    폐부를 찌르는 되물음에, 에녹은 허를 찔린 표정이 되었다.

    그가 애써 묵살했던 질문이, 형의 입술을 통해 형체를 가지고 에녹에게로 되돌아온 것이다.

    에드워드가 재차 캐물었다.

    “천재를 알아보았다는 명예욕, 그것뿐이냐고 묻는 거야.”

    “…….”

    에녹은 차마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침묵에서, 에드워드는 에녹의 내밀한 진심을 읽어 냈다.

    에드워드가 툭 말을 뱉었다.

    “역시 아닌 것 같네.”

    “…….”

    잠시 고민하던 에녹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뭐?”

    “저는, 제 욕심 때문에 브라이어튼 백작을 따라가겠다고 주장하는 게 맞아요.”

    에녹이 허리를 바르게 펴며 에드워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이기적이라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브라이어튼 백작이 제 재능을 한껏 펼치는 모습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요.”

    “에녹.”

    제 하나뿐인 동생의 이름을 불러 둔 채, 에드워드는 계속 말이 없었다.

    에드워드의 표정은 무척 복잡했다.

    에녹은 입 안의 부드러운 살을 지그시 짓씹었다.

    비록 에녹이 이네스에게 여러 가지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그녀가 예술가로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진심이었다.

    자신의 감정보다 그녀의 재능을 꽃피우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브라이어튼 백작의 입장은 어떻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이네스는 아직 이혼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왕립예술협회의 조직적인 훼방 때문에 개인전 또한 막힌 상태였다.

    그나마 간신히 칼도로프의 초대로 활로를 찾게 되지 않았나.

    에녹은 스스로에게 떳떳하니, 남들이 무어라 떠들어대든 신경 쓰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나.

    ‘백작은…….’

    에녹의 얼굴이 구름 낀 하늘처럼 흐려졌다.

    그런 에녹의 표정을 면밀히 관찰하던 에드워드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대로 시큰둥하게 말을 잇는다.

    “칼도로프에는 너와 브라이어튼 백작, 두 사람 모두 방문한다고 연락해 두지.”

    “…….”

    “뭐 해? 이만 돌아가지 않고.”

    그러나 에녹은 에드워드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 대신 한참을 복잡한 눈으로 제 형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불쑥 에드워드를 부른다.

    “형님.”

    “왜?”

    그 불퉁한 대꾸에, 에녹이 처음으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형님께서 저를 얼마나 염려하고 걱정해 주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뭐?”

    순간 에드워드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번 뻣뻣하게만 굴던 에녹이 저렇게 순순하게 나오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항상 감사합니다.”

    “…….”

    이제 에드워드는 ‘오늘 아침 태양이 서쪽에서 떴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녹은 에드워드를 향해 깊숙하게 고개를 숙여 보일 따름이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에녹은 제 할 말을 다 했다는 양 홀가분한 얼굴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나 참, 한 방 먹었네. 저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다 들을 줄이야…….”

    홀로 남겨진 에드워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야 잔소리도 더 못 하겠어.”

    ❀ ❀ ❀

    한편, 그 시각.

    “브라이어튼 백작 말입니다.”

    응?

    걸음을 옮기던 이네스가, 문득 들려온 제 이름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저 멀리서 한 무리의 귀족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예술에 접근하는 방식이 너무 천박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어딜 감히 평민들까지 축제랍시고 교류전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는지…….”

    아마 저들은 이네스를 발견하지 못했나 보다.

    언사가 아주 거침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심지어 이번 교류전에서는, 길거리에서 하루를 벌어먹으며 예술입네 하는 작자들도 함께 어울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래서야 원, 랭커스터의 예술계가 어떻게 되겠어요?”

    “말세예요, 말세.”

    “정말 오만방자합니다.”

    그 노골적인 험담을 듣던 이네스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