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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77)화 (77/120)

77화

“왕립예술협회의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

순간 곁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에녹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어머?’

그 이상 반응에, 헬레나가 에녹을 힐끔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한편 에녹의 저조한 기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네스가,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 나갔다.

“솔직히 지금도 왕립예술협회에서는 저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니까요.”

“브라이어튼 백작.”

“이번 제안을 받아들였다가, 저 때문에 예술계에서 분란이 일어나게 되는 건 아닐지…….”

이네스는 말끝을 흐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 이네스가 해 왔던 모든 일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극심히 갈렸다.

대중들은 그녀의 행보에 환호했으나, 막상 왕립예술협회를 위시한 기성 예술계는 그녀를 아니꼽게 보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아예 모르고 있었으면 모르되.

이미 알게 된 이상 아예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네스는 앞으로도 예술 활동을 이어 나갈 생각이었으니, 예술계와 계속해서 충돌해서는 곤란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예술계의 반발을 고려하면, 이번에 칼도로프에 가기보다는 국내에서 조금 더 활동하는 편이…….”

그런데 그때.

“왜 그래야 합니까?”

삐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녹이었다.

깜짝 놀란 이네스가 두 눈을 깜빡였다.

“공작 각하?”

“외눈박이가 사는 마을에서는 두 눈을 가진 사람이 비정상 취급받는다는 말이 있지요.”

에녹은 그답지 않게 신랄한 말을 쏟아 냈다.

“어째서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외눈박이에게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 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에녹은 그대로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누군가에게 휘둘리기에는 백작이 너무 아깝습니다.”

“…….”

다소 화가 난 듯한 에녹을 마주하며,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아마 공작께서는 별다른 뜻 없이, 정말로 내 재능을 중히 여겨서 저렇게 말씀하시는 거겠지.’

하지만.

이네스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각하께서 저렇게 말씀해 주실 때마다, 자꾸만 설레게 되잖아.’

한편 상황을 지켜보던 헬레나의 입술 위로 뜻 모를 미소가 머물렀다.

에녹과 이네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서식스 공작이 저렇게 날을 세우는 때는…….’

언제나 브라이어튼 백작과 연관되어 있을 때뿐이지 않은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당사자들은 전혀 자각조차 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았으므로.

‘조금 등을 밀어줘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한 약간의 사심을 담아서, 헬레나가 짓궂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칼도로프로의 초대에 마가렛이 꽤 힘을 썼다고 하더라고요.”

마가렛?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네스가 귀를 쫑긋 세웠다.

동시에 헬레나가 여상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 마가렛이라고 하면 브라이어튼 백작은 모르겠군요. 애틀리 후작부인을 말하는 거예요.”

“애틀리 후작부인이라면…….”

이네스도 언뜻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현 칼도로프 왕의 사촌 여동생이자, 칼도로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인 애틀리 후작 가문의 안주인이었다.

예술에도 무척 관심이 많아서 신진 예술가를 발굴하는 한편, 이런저런 후원들도 많이 한다고.

순간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힐끔 에녹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어째…… 서식스 공작 각하와 조금 비슷하네.’

왕가와 혈연이 닿아 있는 것이나, 예술가들을 발굴하며 지원하는 그 모습까지.

묘하게 에녹을 연상시켰다.

동시에 헬레나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러고 보면 마가렛을 만난 지도 무척 오래되었네요.”

……마가렛이라.

그 친근한 호칭에 이네스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그도 그럴 것이, 헬레나의 태도를 보면 애틀리 후작부인과 헬레나 사이에 뭔가 친분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그리고 그때.

헬레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떨어뜨렸다.

“그게, 마가렛은 한때 서식스 공작과 혼담이 오갔었거든요. 백작께서도 그건 몰랐죠?”

“……혼담이요?”

순간 이네스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명백히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헬레나는 그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며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뭐, 아주 예전 일이긴 하지만요. 지금은 애틀리 후작가의 안주인으로, 칼도로프의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그, 그러셨군요. 무척 훌륭한 귀부인이세요.”

“이번 교류전만 해도 마가렛이 편지를 몇 통이나 보내왔더라고요. 교류전에 참석하지 못해서 아쉬워 죽겠다고요.”

“…….”

이네스는 입 안의 여린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에녹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헬레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애틀리 후작부인은 당연히 교류전에 참석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임신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국경을 넘을 정도로 긴 여행을 하기는 어렵다고요.”

그러자 에녹이 피식 미소 지었다.

“이런, 안드레아는 동생이 생겨서 기뻐하겠군요.”

“이번에 칼도로프에 방문하면 직접 안드레아에게 물어보지 그래요? 동생이 생겨서 기쁘냐고요.”

헬레나와 에녹 모두 후작부인에 대해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 대화를 듣던 이네스는 어쩐지 기분이 저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애틀리 후작부인의 가정사는 물론이고, 후작 영애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그만큼 친밀한 관계라는 거겠지.

게다가…….

‘혼담이라니.’

이네스는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에녹은 혼인 적령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적령기를 이미 살짝 넘어선 나이였다.

그러니 혼담이 오가도 이상한 상황은 아니다.

에녹보다 어린 이네스 자신만 해도, 이미 한 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사실들은 잘 알고 있는데도…….

‘가슴이 답답해.’

누군가가 기다란 꼬챙이로 가슴 깊은 곳을 마구 들쑤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때마침 헬레나가 이네스를 돌아봤다.

“어쨌든, 이번에 칼도로프에 가면 한번 만나 볼 수 있을 거예요.”

“아, 네. 저도 후작부인과의 만남이 무척 기대됩니다.”

이네스는 황급히 표정을 고치며 방긋 웃어 보였다.

헬레나는 그런 이네스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마주 웃어 주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어째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네스는 괜히 헬레나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 ❀ ❀

그리하여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늦은 오후.

마침내 헬레나와의 대화가 마무리되고, 이네스와 에녹은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

똑똑.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등장한 왕실 시종이, 에녹을 향해 깊숙하게 허리를 조아려 보였다.

“서식스 공작 각하, 국왕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또 말인가?”

에녹이 기가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째 왕성에 입궁할 때마다 형님에게 예고 없이 불려가는 것 같은, 그러한 기시감이 들어서였다.

“도대체 이번에는 무슨 이유로 부르시는 건가?”

“그건 저도 모릅니다. 다만 국왕께서 공작 각하를 꼭 모셔 오라시며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

에녹은 지긋지긋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렇다 하여 지엄하신 국왕 폐하의 부름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그가 한숨을 삼키며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브라이어튼 백작. 아무래도 오늘은 백작 먼저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이네스는 여전히 스스로의 감정이 낯설었다.

도대체 그녀가 뭐라고 아쉬워한단 말인가.

어차피 마차를 대기시켜 둔 곳까지만 같이 이동하는 것뿐.

귀택할 때에는 각자의 마차를 타고 간다.

고작해야 그 짧은 이동 시간을 같이 있지 못한다고 서운해하다니…….

동시에 에녹이 아쉬운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백작과 함께 돌아가지 못해서 아쉽군요.”

“…….”

분명 공작 각하께서는 별다른 의도 없이 말씀하신 것일 텐데.

어쩐지 제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네스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몸을 돌렸다.

❀ ❀ ❀

“형님.”

응접실에 성큼 발을 들이며, 에녹이 질린 목소리로 에드워드를 불렀다.

“이제 이렇게 예고조차 없이 저를 부르시는 건, 그만하시면 안 됩니까?”

소파에 기대앉아 서류를 살펴보던 에드워드가 힐끔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럼 미리 언질하고 부르면 올 거야?”

“음, 그건 아니죠.”

그 뻔뻔한 대답에 에드워드가 두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이 녀석이?”

“하여간, 그래서 왜 부르신 겁니까?”

성큼성큼 다가온 에녹이, 에드워드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라면 버르장머리 없다며 장난스러운 타박이라도 한마디 할 법하건만.

지금의 에드워드는 드물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예술계에서, 브라이어튼 백작에 대한 반발이 상당하다는 것쯤은 너도 알고 있지?”

에드워드는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에녹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왕립예술협회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인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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