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십시오.”
“하지만, 어셔 후작님……!”
“다들 예술에 대한 욕심이 너무 커서 그런 게지요.”
어셔 후작은 관대한 척 미소를 머금었다.
“다만 여러분들도 잘 알지 않습니까? 랭커스터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려면 여러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요.”
“경력이라면…… 아!”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귀족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역시 후작님께서는 다 생각이 있으시군요!”
“대단하십니다!”
어셔 후작은 흐뭇한 얼굴로 수없이 쏟아지는 칭찬을 즐겼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왕립예술협회장으로 있는 이상, 브라이어튼 백작은 절대로 왕립예술협회의 인증을 받지 못할 겁니다.”
어셔 후작의 눈동자 위로 비열한 빛이 스쳤다.
“당연히…… 개인전도 치르지 못하겠지요.”
❀ ❀ ❀
교류전은 무사히 끝났고, 적어도 칼도로프와 대중에게는 극찬을 받았다.
왕립예술협회의 반발이야 처음부터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으니,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네스는 여전히 고민에 빠져 있었다.
“하아.”
이네스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왕립예술협회가 이네스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민하게 대응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날 견제한다 해도, 이런 식으로 훼방을 놓을 줄은 몰랐는데.’
랭커스터에서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중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개인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교류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김에, 이네스는 개인전도 함께 진행하려 했다.
그러던 와중, 의외의 벽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왕립예술협회가 여기서도 내게 트집을 잡을 줄이야.’
이네스가 미간을 좁혔다.
교류전은 예술가로서 분명 커다란 성과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시 모자랐다.
여태까지 이네스가 참가했던 전시회는, 에녹이 주최한 미술전의 수상작들을 전시했던 것뿐이었으니까.
다만 자신이 자비로 개인전을 여는 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재능이 없어서 돈을 발라 개인전을 한다며, 은근히 뒤에서 비웃음을 받을 테니까.
그리하여 보통의 예술가들은 왕립예술협회의 인증을 받아 개인전을 열고는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랭커스터에서 왕립예술협회는 꽤 영향력 있는 집단이었고.
그런 왕립예술협회의 인증 자체가, 예술가의 재능을 공식 기관에서 일정 부분 인정해 주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랬기에 당연히 이네스는 왕립예술협회에 인증 요청을 넣었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반려당했지.’
오기가 생긴 이네스도 계속해서 요청을 넣었고, 줄줄이 반려당했다.
‘아무리 이번 교류전에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한들, 이렇게 치졸하게 훼방을 놓을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면 랭커스터에서 교류전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아예 막혔다고 봐야 한다.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이네스가 책상 위에 축 늘어지던 그때.
똑똑똑.
짧은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네스가 책상에 몸을 기댄 채 힘없이 대답했다.
“들어와.”
방에 들어온 메리가 도끼눈을 떴다.
“가주님,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체통은 왕립예술협회더러 먼저 지키라고 해. 자기들 기분 나쁘다고 개인전 인증조차 안 내주는 게 어디 있어?”
“아…….”
이네스의 뚱한 대답에, 메리가 다소 안쓰러운 표정이 되었다.
최근 이네스가 개인전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건 메리도 잘 알았으니까.
“그래서 무슨 일이야?”
“아, 그게.”
메리가 자세를 바르게 하며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왕실에서 전갈이 왔어요. 왕비 전하께서 입궁하시라는 하명을 내리셨다고요.”
“날?”
이네스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교류전도 이미 끝났으니, 이제 더 이상 왕비와 얼굴을 볼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네스는 전혀 몰랐다.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던 개인전 문제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해결될 거라고는.
❀ ❀ ❀
왕성에 입궁한 이네스는 뜻밖의 사람을 마주했다.
“서식스 공작 각하?”
그 사람은 바로 에녹이었다.
“아, 브라이어튼 백작.”
에녹은 보기 좋은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를 반겼다.
“백작께서도 왕비 전하의 부름을 받아 오신 겁니까?”
“네, 맞아요.”
이네스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교류전이 끝난 이후로는 에녹과 제대로 얼굴을 볼 일이 없어서 그런지,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공작 각하께서도 조금이나마 나를 반갑게 여겨 주시면 좋을 텐데.’
괜히 에녹을 힐끔거리던 이네스가 이내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세상에, 내가 무슨 생각을?’
그 순간.
이네스는 에녹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제가요?”
“예. 아까 전부터 계속 웃고 계시는군요.”
“아…….”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왕립예술협회와는 나날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지, 개인전의 인증조차 받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좋은 일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에녹이 저렇게 말할 정도로 그녀가 헤실헤실 웃고 있던 이유는…….
‘역시…… 공작 각하를 만나서 그런 거겠지.’
이네스는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그녀가 에녹에 대한 연정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었어도, 그를 티 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지금의 원만한 관계가 망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이네스의 복잡한 속내는 전연 모르는 에녹이, 부드럽게 권유했다.
“가실까요?”
“네, 가요.”
어쨌든 지금은 왕비의 부름을 받아 입궁한 거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이네스는 일부러 에녹에게서 시선을 떼 내어, 정면만 바라보며 걸었다.
그러지 않으면 쿵쾅대는 심장 소리를 그에게 들킬 것만 같았기에.
❀ ❀ ❀
“이번에 왕립예술협회 회원으로 임명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마음 같아서는 꼭 임명하고 싶었는데…….”
왕비, 헬레나는 진짜로 미안한 얼굴이었다.
이네스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저는 전혀 개의치 않으니 왕비 전하께서도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헬레나는 못내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헬레나 자신도 이네스를 왕립예술협회의 회원으로 어떻게든 임명해 주고 싶었으니까.
이번 교류전을 성공적으로 끝낸 공로도 있거니와, 이네스는 라이언의 대리 화가로서 오랫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한때 라이언의 것이었던 예술협회 회원이 된다는 건, 분명 이네스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을 터.
‘하지만 반대가 너무 심했지…….’
헬레나는 지끈지끈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브라이어튼 백작이 이번에 세운 공을 치하하시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왕립예술협회의 예술가들은 제각기 목소리를 높이며 이네스의 임명을 반대했다.
‘왕립예술협회에서는 여태껏 여성을 받은 전례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브라이어튼 백작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한들, 우리 예술협회의 역사와 전통을 이렇게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고려해 주십시오!’
……라고 말이다.
그 수많은 반대에 부딪혀, 이네스는 결국 왕립예술협회의 회원이 되지는 못했다.
헬레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요. 그보다 오늘 이렇게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칼도로프에서 정식으로 요청이 왔기 때문이에요.”
“요청이라니, 어떤 말씀이십니까?”
“칼도로프 예술계에서, 브라이어튼 백작이 이번 교류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것에 큰 감명을 받았나 봐요.”
응?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이네스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동시에 헬레나가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이번 교류전의 주역인 브라이어튼 백작과 서식스 공작을 정식으로 초청을 하고 싶다고 하네요.”
“저를요?”
“네. 교류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운영진들의 경험을 듣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어깨를 으쓱인 헬레나가 이네스에게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브라이어튼 백작은 아직 개인전을 연 경험이 없죠?”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네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헬레나가 장난스럽게 윙크를 해 보였다.
“잘됐네요, 칼도로프에서는 백작의 첫 개인전을 자신들이 맡아서 진행하고 싶은 모양이더라고요.”
“아…….”
이 기분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이 목 끝까지 짓쳐 올랐다.
이네스는 차마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야말로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저런 제안을 받은 것 자체가 예술가로서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는 회귀 전 과거, 이네스를 대리 화가 삼아 예술가로 승승장구하던 라이언도 저런 경험을 하지는 못했다.
다만.
“……정말로 제가 칼도로프에 가도 될까요?”
이네스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헬레나가 어리둥절한 낯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그게…….”
잠시 고민하던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