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75)화 (75/120)
  • 75화

    잠시 후.

    이네스는 재킷을 꼭 끌어안고 후다닥 자신의 침실로 달려갔다.

    침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주변에 인적이 있는지 슬그머니 살펴본 이네스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재킷을 몸에 걸쳐 본다.

    재킷에서 에녹 특유의 우아한 체향이 묻어났다.

    옷소매가 손을 완전히 덮고, 옷자락은 허벅지까지 덮고도 남는 길이다.

    남성복 특유의 묵직한 무게감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에녹에게 꼭 안긴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어떡해…….’

    이네스가 얼굴을 훅 붉혔다.

    이렇게 된 이상,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 공작 각하가 좋아.’

    더 이상 이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없을 정도로.

    ❀ ❀ ❀

    교류전은 그야말로 대호평이었다.

    “정말 흥미로운 교류전이었습니다!”

    “조금 더 머무르고 싶은데, 돌아가야 해서 아쉬울 정도입니다.”

    칼도로프 사절단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만족스러운 반응이 못내 못마땅했던 왕립예술협회 소속 예술가들은,

    “이번 교류전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아무래도 기존과는 다른 방식이다 보니, 다소 낯설지는 않으셨을까 걱정스럽습니다만.”

    은근슬쩍 사절단 사람들에게 돌려 질문을 던졌으나.

    “무척 재미있고 신선했습니다!”

    우리 칼도로프에도 저런 방식을 도입해 볼까 싶어요!

    도리어 사절단들이 잔뜩 흥분하여 칭찬만 쏟아 내는 결과만 가져왔다.

    결국 예술가들은 오묘한 표정으로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교류전이 마무리된 후.

    “공작 각하, 브라이어튼 백작가에서 소포가 왔습니다.”

    에녹은 뜻밖의 소포들을 받았다.

    첫 번째 소포는 깨끗하게 세탁한 정장 재킷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소포는…….

    ‘……초상화로군.’

    이네스가 작업하고 있던 에녹의 초상화였다.

    초상화 속 에녹은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라,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에녹은 무심결에 손을 들어 제 입가를 어루만졌다.

    ‘초상화 속의 내가…… 저렇게 웃고 있다는 건.’

    아마도 브라이어튼 백작의 눈에는, 자신이 저렇게 미소 짓고 있다는 뜻일 터.

    “…….”

    에녹은 오래오래 초상화를 들여다보았다.

    이 그림 자체가 증거였다.

    그가 이네스에게 품고 있는 감정에 대한 증거.

    ‘그녀는…… 특별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

    처음 에녹을 매혹시켰던 이네스의 천재성조차, 이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만, 이네스와의 이 애매한 관계가.

    ……참을 수 없이 목이 탔다.

    ❀ ❀ ❀

    교류전 이후, 이네스의 이름은 랭커스터에서 단연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다들 그거 들으셨어요?”

    귀부인들이 모여 앉은 티타임 테이블.

    그중 한 명이 부채를 활짝 펼치며 말문을 열었다.

    “최근 왕비 전하께서 브라이어튼 백작을 무척 가까이 하신다지요?”

    최근 랭커스터 국민들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주제.

    그 주제는 바로 ‘이네스 브라이어튼’이었다.

    랭커스터 사교계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서, 최근 귀부인들의 살롱이며 신사들의 클럽에서는 연일 이네스에 관련한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이번 교류전을 엄청나게 성공시켰잖아요.”

    “그거 들었어요? 이번 교류전 덕택에, 화방 거리의 매출도 엄청나게 늘었대요.”

    교류전에 참석한 예술가들은, 화방 거리에서 그리거나 제작했던 벽화나 조각상 같은 물건들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갔다.

    이네스가 미리 관련 예산을 책정해 뒀다가, 적절한 보상으로 작업물들을 사들인 것이다.

    예술가들의 입장에서도, 벽화 같은 예술품들은 따로 옮겨 가기가 애매했으므로.

    상대적으로 이네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쉬웠다.

    그 예술품들이 관광 포인트가 되어, 교류전이 끝난 이후에도 관광객들이 계속 유입됐던 것이다.

    “요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화방 거리에서 데이트를 하는 게 인기라던데요.”

    “하기야, 사실 저도 교류전이 열렸던 당시에 놀러 가기는 했었어요.”

    “한 번은 우리 집 아이들도 데리고 간 적이 있었는데, 다시 가 보고 싶다며 어찌나 떼를 쓰는지 원.”

    “뭐, 사방에 유명한 예술가들의 조각이며 그림이 전시되어 있으니까요. 교육적으로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사교계 인사들은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요즘은 왕비 전하와 교류하려면 브라이어튼 백작을 먼저 공략하라는 말도 있던데요?”

    “뭐, 왕비 전하께서 그만큼 백작님을 곁에 두신다고 하니까요.”

    “세상에, 저도 한 번 브라이어튼 백작님께 초대장이라도 보내 봐야겠는걸요.”

    귀부인들이 나란히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것도 잠시.

    개중 한 명이 재차 말을 이었다.

    “우리들끼리만 있으니 하는 말인데, 브라이어튼 백작 말이에요.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대단하다고요? 물론 이번 교류전이 꽤 호평이라는 건 알지만…….”

    “아뇨, 그거 말고요. 이혼 소송 말이에요.”

    그렇게 운을 뗀 귀부인이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렇잖아요? 솔직히 이혼 소송을 걸 때만 해도 저걸 이길 수 있나 싶었는데, 그걸 이기더라고요.”

    그 말에, 서로서로 얼굴을 마주 보던 다른 귀부인들이 제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요.”

    “물론 대리 화가로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 왔다는 근거가 있다지만…… 이혼 소송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은데.”

    “어찌 보면 국왕 폐하께서도 파격적인 판결을 내려 주신 거죠.”

    사실 귀부인들은 이네스의 행보에 은밀한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보수적인 랭커스터 사회에서 자신의 힘으로 이혼을 쟁취한 여자.

    가정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자신의 작위와 예술을 되찾고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하는 여자.

    여태까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가뿐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니, 어쩔 수 없이 선망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귀부인들의 대리 만족과는 별개로, 이번 상황이 꼭 모두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었다.

    다른 귀부인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하지만 브라이어튼 백작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있어요.”

    “으음…….”

    “그렇기야 하죠.”

    정곡을 찔린 귀부인들이 침음을 흘렸다.

    그 말대로였다.

    이네스의 행보를 두고, 랭커스터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평가를 내릴 수는 없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 교류전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이번 교류전의 주축인 칼도로프에서는 단연 호평이었다.

    또한 평민이나 아마추어 예술가들, 기본적으로 사회에서 배제되어 있던 여성들의 호응도 좋았다.

    다만 랭커스터 예술계의 주류를 이루는 왕립예술협회를 포함하여, 기성 예술가들에게는 혹평을 받았는데.

    “그런데 뭐, 이건 확실한 건 아니지만요.”

    귀부인 중 하나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왕립예술협회 소속 분들도 이번 교류전에 관람을 가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아, 맞아요. 저도 이번에 켈튼 경을 뵈었는걸요.”

    “네? 켈튼 경이라면 이번에 영지로 내려가신다고 들었는데요?”

    다른 귀부인이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그러자 차를 홀짝이던 어린 레이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 사실은 저도 보았어요. 윌버 경이랑 같이 다니지 않았나요?”

    “맞아요, 레이디 그레이. 레이디께서도 보셨군요?”

    켈튼 경과 윌버 경.

    두 사람 모두 왕립예술협회 사람들이었다.

    “설마……?”

    귀부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 ❀ ❀

    그 시각.

    왕립예술협회에 소속된 귀족들은 제각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제가 다 들었습니다!”

    귀족 중 한 명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예술협회 사람들이 교류전을 보러 갔다면서요?!”

    그러자 다른 귀족들이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크흠, 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교류전이 그렇게나 흥할 줄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요새 교류전에 방문하지 않으면 대화가 안 통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소심하게 항변하자, 처음 말을 꺼냈던 귀족이 거세게 탁자를 내리쳤다.

    쾅!

    귀족들이 움찔 어깨를 굳혔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시겠습니까?”

    “그, 그건.”

    “왕비 전하께서 브라이어튼 백작을 왕립예술협회 회원으로 임명하려 하셨다지 않습니까!”

    사실이었다.

    헬레나는 이번 교류전의 성과를 굉장히 높게 평가했고, 그리하여 이네스에게 왕립예술협회 회원 직위를 주려 했었다.

    다만 기존 회원들의 반발이 워낙에 거셌기에, 잠정 보류한 상태였는데.

    “예술협회장이신 어셔 후작님조차 교류전에 참석하지 않으셨는데, 어찌 이럴 수가!”

    처음 말을 꺼냈던 귀족이 재차 언성을 높였다.

    한편 그 난리 통을 지켜보던 어셔 후작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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