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74)화 (74/120)
  • 74화

    “그거 아세요?”

    자리에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을 맞추고는, 세상에서 가장 큰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아이에게 소곤거린다.

    “신사님이 그린 건 애벌레예요. 아직 나비로 완전히 자라지 못해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지, 진짜요?”

    아이가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이네스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걱정 마세요, 제가 마법을 부려서 금방 나비로 변신시켜 드릴 테니까요!”

    마법?

    아이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 어렸다.

    그 후.

    아이가 대충 그었던 선은 화려한 날개를 팔랑이는 호랑나비가 되었다.

    주변에서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아이들의 얼굴 위로 환희가 서렸다.

    “저도, 저도요!”

    “저도 해 볼래요!”

    그렇게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심지어는 아이들의 부모까지 두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본의 아니게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이네스가 난감하게 미소 지었다.

    “그, 어린이 여러분. 그럼 조금만 기다려 줄래요?”

    “네에!”

    아이들이 입을 모아 합창을 했다.

    한편 에녹은 한 걸음 물러서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이네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말 특별했다.

    나이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럼없이 교류하고, 차별하지 않으며, 모두에게 환하게 웃어 준다.

    저 구김살 없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러던 중.

    문득 에녹 쪽을 돌아본 이네스가 활짝 웃어 보였다.

    ‘이것 보세요, 벽화를 완성했어요!’

    그렇게 외치기라도 하듯이.

    순간 에녹은 심장이 덜컹 멎는 기분을 느꼈다.

    “언니, 진짜 멋져요!”

    “나는 그럼 꽃! 꽃 보고 싶어요!”

    신이 난 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들어 댄다.

    붉게 내려앉은 황혼, 약간 쌀쌀한 온도, 흥겨운 분위기, 그리고 그녀의 손끝으로 직접 그려 낸 청량한 숲을 배경으로 서 있는 이네스.

    그녀는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든 풍경의 중심이었다.

    이네스의 존재가 지금 이 순간을 완벽하게 만들고 있었다.

    “…….”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이 시간이 뇌리에 아로새겨져, 평생 잊힐 것 같지가 않았다.

    때마침 벽화를 모조리 완성한 이네스가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꼬마 신사 숙녀 여러분들!”

    “누나도 잘 가요!”

    “그림 너무 예뻐요!”

    아이들이 고사리손을 흔들었다.

    그에 일일이 마주 인사를 해 준 후에야, 이네스는 종종걸음으로 에녹에게 다가왔다.

    “각하!”

    “아, 브라이어튼 백작.”

    그녀의 부름에 에녹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녹의 곁에 선 이네스가 가슴 벅찬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보세요, 다들 즐거워하고 있어요.”

    교류전에 참가한 예술가와 관객들 모두 표정이 밝았다.

    바이올린 하나만을 갖고 와 물 흐르듯 연주를 하기도 하고, 그에 맞춰 즉흥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관객들은 바닥에 앉거나, 벽에 기대서서 공연을 구경한다.

    그러던 중.

    “저, 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청년 하나가, 옆자리에 앉은 아가씨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혹시 저와 함께 춤 한 곡만 춰 주시면…….”

    어찌나 부끄러워하는지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한다.

    한편,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아가씨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럼요.”

    그 두 사람을 시작으로, 젊은 남녀 사이로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연인들이 삼삼오오 손을 붙들고 공터로 나선다.

    이네스는 그 풍경을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브라이어튼 백작.”

    그 나지막한 부름에, 이네스가 화들짝 놀라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에녹이 정중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저도 백작께 춤을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공작 각하.”

    불현듯 어제 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보다 모처럼 공작 각하와 파트너가 되었는데, 춤 한 번 제대로 추지 못해서 그게 좀 아쉽네요.’

    동시에 이네스의 입술 위로 엷은 미소가 어렸다.

    곧장 에녹의 손을 맞잡으며 몸을 일으킨다.

    “좋아요.”

    경쾌한 바이올린 연주, 그 위로 부드럽게 얹히는 가수의 허밍.

    빙글빙글 도는 시야와 박자에 맞춰 내딛는 발걸음.

    마주 잡은 손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

    그녀를 바라보는 에녹의 다정한 눈동자.

    그 모든 것이 지나치게 완벽해서.

    ‘즐거워.’

    이네스의 가슴은 터질 것처럼 물결쳤다.

    ❀ ❀ ❀

    그리하여 오늘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타운하우스로 돌아가는 길.

    이네스와 에녹은 나란히 왕실 마차를 타고 귀가했다.

    애초에 교류전은 안전을 위해 허가받은 마차만이 움직일 수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휴, 너무 피곤해요.”

    마차 시트에 몸을 기대며, 이네스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무척 즐거워 보이시는데요.”

    “뭐…… 솔직히 뿌듯하기는 했으니까요.”

    에녹의 짓궂은 질문에, 이네스는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요?”

    잠시 말을 고르던 이네스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뭐랄까, 요새는 저도 무언가를 이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음, 저 자신을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요?”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리고 그 계기는 아마도, 공작 각하를 만난 것이겠죠.”

    에녹의 미술전, 이혼 소송, 그리고 교류전까지.

    모조리 에녹을 만남으로써 이루어 낸 것이지 않은가.

    이네스는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모두 공작 각하의 덕이에요. 정말 감사해요.”

    “아뇨, 이건 모두 브라이어튼 백작이 이루어 낸 겁니다.”

    에녹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따지자면, 저는 그저 백작이 마음껏 움직일 수 있도록 약간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을 뿐이죠.”

    “하지만, 각하.”

    이네스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그 발판이 없어서 평생을 남의 그늘 아래에 가려져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도 있는걸요.”

    진녹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회귀 전 과거가 떠오른 탓이다.

    라이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비참하게 살아가야 했던 그 시간들.

    그 당시 이네스에게 없었던 건, 삶을 바꾸려는 의지.

    그리고 에녹이었다.

    그리고 현재.

    에녹을 만남으로써 그녀의 삶 자체가 뒤바뀌지 않았나.

    “…….”

    허를 찔린 에녹을 향해 이네스가 힘을 주어 말을 맺었다.

    “그러니 공작 각하께서는 제게 정말 큰 도움을 주신 거예요.”

    “백작, 그건…….”

    “각하는 제 삶을 구원해 주신 거나 다름없어요.”

    그 진지한 목소리에 에녹이 멈칫했다.

    “겸양도 좋지만, 제 감사 인사를 받아 주셨으면 해요.”

    흔들림 없이 고요한 이네스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에녹은 문득 생각했다.

    ‘백작은…… 진심이구나.’

    그녀는 정말로 에녹을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쁘군요.”

    “저야말로 그래요. 언젠가 이 은혜를 꼭 갚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또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에녹이 장난스럽게 이네스를 타박했다.

    “아마 역사에 제 이름이 남는다면, 브라이어튼 백작을 발굴한 후원자의 공로로 남게 될 텐데요.”

    “네에?”

    “그러니까 오히려 제가 백작에게 은혜를 입은 거죠. 안 그렇습니까?”

    반농담 반 진담으로 그렇게 말하자, 이네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풋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좋겠네요.”

    “그렇게 될 겁니다.”

    에녹은 아주 당연하다는 양 말했다.

    그녀를 향한 순연한 믿음에, 이네스는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래도.

    ‘역시 기뻐.’

    그 후 이네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오늘 있었던 교류전의 일들이라거나, 낮에 만났던 예술가의 어떤 점이 좋았다거나…….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몇 번 하품을 깨물어 참는가 싶더니,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며 창문을 노려보았다.

    최대한 잠들지 않으려는 그 노력이 가상했으나…….

    ‘잠드셨군.’

    에녹은 짧게 혀를 찼다.

    밀려드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이네스의 고개가 그만 툭 옆으로 꺾인 것이다.

    창문에 기대어 잠든 모습이 무척 불편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에녹은 정장 재킷을 벗어 들었다.

    그를 접어서 고개에 괴어 주자, 이네스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

    에녹은 곤히 잠든 이네스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 ❀ ❀

    한참의 시간이 흘러, 왕실 마차는 브라이어튼 타운하우스에 도착했다.

    “으악, 죄송합니다!”

    잠에서 깬 이네스가 질겁을 하며 에녹을 바라보았다.

    “잠든 것도 죄송한데 재킷까지 빌려주시다니, 이걸 어쩌면 좋지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고개를 가로저은 에녹이 부드럽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그냥 제가 해 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요.”

    “아니, 그래도…….”

    이네스는 그만 울상이 되고 말았다.

    “그, 재킷은 깨끗하게 세탁해서 돌려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작 각하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에녹과 인사를 나눈 이네스는, 괜히 민망한 마음에 후다닥 타운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

    이네스는 품 안의 재킷을 내려다보았다.

    깃털로 문지르는 양 가슴 깊은 곳이 간질거렸다.

    ‘세탁을…… 부탁해야 하는데.’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네스는 한참을 재킷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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