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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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교류전이 열리는 화방 거리.
그야말로 쾌청한 날씨였다.
햇볕이 쨍하니 내리쬐고, 하늘은 푸르다 못해 눈이 아릴 정도다.
헬레나와 이네스, 에녹은 칼도로프 사신단을 인솔해 화방 거리로 향했다.
“왕비 전하께서 이번 교류전에 자신이 있노라고 직접 말씀하실 때부터 기대는 했습니다만.”
“확실히 그렇게 말씀하실 만하군요.”
“랭커스터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이야…….”
사절단의 눈동자에는 호기심과 흥미로움이 가득 들어차 반짝거렸다.
일단 거리 자체가 무척 독특했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하나둘씩 모여 만들어진 미로 같은 거리는, 그 자체로도 무척 특색 있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제각기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뽐내고 있었다.
거리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소규모 인형극을 한다.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린다거나, 즉흥적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와중 자유롭게 관람객들이 오가며 그 광경을 구경하거나, 혹은 초상화의 모델이 되는 식으로 직접 참여하기도 하는 것이다.
헬레나가 사절단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번 교류전이 즐거운 시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유롭게 즐겨 주세요.”
사절단 사람 중, 성질 급한 한 사람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럼 지금 한 번 살펴보러 가도 되겠습니까?”
비록 겉으로는 점잔을 빼고 있지만, 한시바삐 구경하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게 다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칼도로프 특유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이번 교류전은 딱 들어맞았으니까.
헬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편히 감상하세요.”
그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칼도로프의 사절단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잔뜩 흥분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저쪽부터 가 볼까? 레반느의 왈츠곡을 연주하고 있던데!”
“아니, 난 그것보다는 인형극을 먼저 보고 싶네!”
한편, 사절단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녹이 피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치안 유지에 더 힘써야겠는걸요.”
“부탁할게요, 서식스 공작.”
헬레나는 에녹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려 보였다.
에녹은 미간을 좁혔다.
‘그래, 일단 사람을 갈아 넣으면 된다 이거지…….’
부부는 자연스럽게 닮는다더니, 휘하의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자연스럽게 부려 먹는 모습이 에드워드와 꼭 닮지 않았는가.
물론 일국의 왕과 왕비로서 인재를 등용하는 능력은 필요하지만…….
갈려 나가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서러운 것이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행정관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 에녹은, 당장에 치안 담당자를 불러들였다.
“이쪽 거리는 가로등이 없어서 위험하니, 자주 순찰을 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지도를 펼쳐 두고, 담당자와 이것저것 논의를 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헬레나가 힐끔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손목은 좀 어떤가요?”
“……아.”
이네스는 조금 얼떨떨해져졌다.
무려 왕비 전하께서 직접 그녀의 안부를 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요.”
“그렇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무리하지는 말아요.”
헬레나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브라이어튼 백작은 내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이네스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저 지나치게 달콤한 목소리에서, 어째 ‘쓸모 있는 인재’를 향한 집착이 느껴지는데.
이건 아마 내 착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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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이네스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리하여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
헬레나는 칼도로프의 사절단을 이끌고 먼저 자리를 뜨기로 했다.
저녁 만찬을 베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화방 거리라고 했나요, 정말 매력적인 장소입니다.”
“물론 왕비 전하의 만찬이 중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다만 미련이 뚝뚝 흘러넘치는 눈으로 뒤를 흘끗거리는 것을 보아, 사절단은 이 화방 거리가 단단히 마음에 든 게 분명했다.
왕비가 직접 베푸는 만찬보다도 화방 거리에 더 머물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사절단은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마음에 드신다면 내일 또 방문하시면 되죠.”
헬레나의 권유에 힘입어 결국 다시 왕궁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네스와 에녹은 계속 화방 거리에 남아 있기로 했다.
교류전 진행 양상을 계속 살펴보며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으-드디어 짬이 좀 났네요.”
이네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번에 톡톡히 배웠다니까요?”
때마침 교류전 곳곳에 파견해 두었던 직원들의 보고를 받던 에녹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교류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것 같군요.”
“동감이에요.”
방금까지만 해도 질색을 하던 이네스의 눈빛이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비록 엄청나게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뿌듯한 마음이 더 컸다.
‘칼도로프의 사신단도, 그리고 왕비 전하께서도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기색이었지?’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었다.
이네스는 힐끔 에녹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게다가 공작 각하께서도 흡족해하시는 것 같으니까.’
에녹만큼은 절대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게, 솔직한 마음이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시선이 교류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커다란 벽을 화폭 삼아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바라본다.
동시에 에녹이 짓궂게 입을 열었다.
“어째 백작께서도 벽화에 흥미가 있으신 것처럼 보입니다만.”
“…….”
순간 이네스가 움찔했다.
운영진으로서 교류전에 집중해야 하는데,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었던 게 못내 부끄러워서였다.
이네스는 괜히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그,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것치고는, 아까 전부터 계속 벽화에서 눈을 떼지를 못하고 계시는데요.”
“글쎄요? 공작 각하께서 잘못 보신 거겠지요.”
이네스가 딱 잡아뗐다.
그러자 에녹이 씩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지 말고 한번 그려 보시지 그러십니까?”
“네?”
순간 이네스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그, 그래도. 저는 운영진인데…….”
그러면서도 괜히 벽 쪽을 흘끔흘끔 바라보는 모습이, 역시 그림을 그려 보고 싶은 건 맞는 것 같다.
하기야 그녀 자신도 화가인데, 이번 교류전을 준비하기만 하고 직접 참가할 기회가 없었으니 아쉬울 만도 하다.
에녹이 이네스를 은근슬쩍 부추겼다.
“그러니까 더더욱 교류전을 방문한 여러 사람에게 백작의 예술 세계를 보여 줘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으음…….”
“애초에 백작께서 이번 교류전 운영진으로 임명된 가장 큰 이유는, 백작께서 뛰어난 화가이시기에 그런 것이니까요.”
이, 이렇게까지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실 줄이야……?
이네스는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백작의 후원자로서, 그리고 이 나라의 왕족으로서. 백작의 그림을 여러 사람이 즐길 수 있었으면 하는데요.”
에녹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백작을 후원하는 입장에서 백작의 재능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 그런가요?”
“그럼요. 또한 이 나라의 왕족으로서 랭커스터의 예술이 좀 더 무르익었으면 하는 것도 사실이고요.”
무덤덤한 얼굴로 저렇게 설득하니, 오히려 정말로 ‘그런가?’라며 혹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이네스는 한참을 고뇌했으나 결국 벽화의 유혹을 떨쳐 낼 수는 없었다.
“그, 그렇다면.”
이네스는 조심조심 벽 쪽으로 다가갔다.
대부분의 멀쩡한 벽들은 이미 벽화로 뒤덮여 있었으나, 단 한 군데가 비어 있었다.
그 벽 위로는 푸른 물감이 엉망으로 쏟아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물감들이 제멋대로 흩뿌려져 있어, 영 벽화를 그릴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마 벽화를 그리려고 시도하다가, 실수로 물감 통을 엎어 버린 것 같은데…….
“흠.”
이네스는 잠시 그 벽을 살펴보는가 싶더니, 과감하게 커다란 붓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흘러내린 푸른 물감 자국 위로 다른 물감들을 덧바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우와, 폭포야!”
길을 지나던 아이 하나가 이네스가 서 있는 벽 쪽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파란 물감은 어느새 거세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로 변모해 있었다.
폭포수 아래로 하얗게 포말이 이는 모습까지 생동감 있게 구현되었다.
사방팔방 튀어 나간 물감 자국들은 폭포에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되었다.
물에 젖은 바위는 햇빛을 받아 반질거렸고, 그 너머로 펼쳐진 푸른 숲이 청량함을 더한다.
“우와아…….”
아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이네스의 벽화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이네스가 피식 웃으며 붓을 건네주었다.
“우리 어린 신사분께서도 한 번 그려 보실래요?”
“네, 네!”
아이는 신이 나서 붓을 움켜쥐었다.
신중한 표정으로 선을 쭉 긋는다.
그러고는 한참을 낑낑거리며 열심히 붓을 놀렸으나, 막상 결과물은 도무지 형상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아이는 그만 울상이 되었다.
“나비를 그리고 싶었는데…….”
“나비?”
이네스가 고개를 갸웃하는가 싶더니, 이내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