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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72)화 (72/120)
  • 72화

    그런데 그때.

    “아뇨.”

    뜻밖에도 이네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를 위해서 화를 내 주신 거잖아요.”

    에녹이 놀란 눈으로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 보는 건 역시 부끄러웠기에, 이네스의 고개는 계속 아래로 떨어졌다.

    “공작 각하께서…… 저를 신경 써 주셔서.”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애써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마했다.

    “제게 행패를 부리려는 라이언을 막아 주셔서…….”

    그래도 이네스는 꿋꿋하게 말을 맺었다.

    “기뻤어요.”

    “…….”

    에녹은 드물게 멍한 얼굴이 되었다.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린 이네스가, 에녹을 마주하며 방긋 미소 지었다.

    “그보다 모처럼 공작 각하와 파트너가 되었는데, 춤 한 번 제대로 추지 못해서 그게 좀 아쉽네요.”

    순간 에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이네스가 멀거니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그, 공작 각하?”

    “잠시 쉬고 계십시오.”

    에녹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금방 의사를 보낼 테니까요.”

    “네? 의사요? 의사의 진료까지는 필요 없는데…….”

    “안 됩니다. 치료를 받으신 후에 연회장으로 복귀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는 제가 귀빈들을 접대하고 있겠습니다.”

    줄줄 말을 늘어놓은 에녹은 그대로 휴게실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이네스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아니, 갑자기 의사라고?”

    아무리 봐도 그녀의 손목은 의사의 치료까지는 받을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공작 각하께서 이미 다 치료해 주셨잖아……?”

    제 손목을 내려다보던 이네스는, 그만 오묘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 ❀ ❀

    황급히 밖으로 빠져나온 에녹이 벽에 기대어 섰다.

    “……후우.”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녹은 슬쩍 시선을 들어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여 그녀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들킬까, 허겁지겁 뛰쳐나온 보람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창 안 에녹의 얼굴은.

    “답이 없군.”

    손을 대면 붉은 물이 묻어날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 ❀ ❀

    그 시각.

    고트 자작가는 발칵 뒤집어진 상태였다.

    자신만만하게 축하연에 참석했던 라이언이, 축하연이 끝나기 한참 전에 귀가한 것으로도 모자라.

    한쪽 손목에는 금이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 전체가 퉁퉁 부어 있는 꼴이 마치 소시지처럼 보였다.

    “세상에, 내 아들!”

    고트 자작 대부인은 의사를 불러온다, 라이언을 간병한다,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라이언,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데?”

    한편 고트 자작은 혹여나 제 동생이 또 무슨 사고를 쳤는지 전전긍긍했으나,

    “지금 애가 다쳤는데 그게 할 말이니?!”

    고트 자작 대부인이 정색을 하며 핀잔을 주는 바람에 더 묻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리하여 한밤의 소란이 지나고, 다음 날.

    “……으으.”

    라이언은 침대에 대자로 누운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다 말고, 저를 간병해 주는 하녀에게 잔뜩 성을 낸다.

    “아, 아프잖아!”

    고트 자작가에서 오래 일했던 늙수그레한 하녀가 흠칫 어깨를 굳혔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사람 수발조차 제대로 못 들어? 이러기야 정말?”

    “…….”

    그 비아냥거림에 하녀가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사실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었다.

    하녀는 그저 라이언의 시중을 들고 있었을 뿐, 라이언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라이언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릴 따름이었다.

    “아오, 아파 죽겠네. 어떻게 사람에게 이따위로 폭력을 휘두르고…….”

    그렇게 구구절절 엄살을 부리던 것도 잠시.

    라이언은 빠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기사를 불러다 날 연회장에서 내쫓을 수가 있지?’

    손목을 옥죄는 강한 힘.

    라이언을 벌레처럼 내려다보던, 얼음처럼 시린 푸른 눈동자.

    ‘개처럼 발광한다’는 폭언을 내뱉을 때조차 우아했던 그 자태.

    모든 것이 라이언의 열등감을 자극시켰다.

    게다가 라이언의 심사를 가장 크게 뒤틀리게 하는 부분은…….

    ‘……이네스 그 계집애, 운영진이랍시고 서식스 공작과 어울리는 꼴이 아주 마음에 안 들어.’

    이네스와 에녹이 함께 있는 모습이 지독하게 잘 어울렸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자, 치밀어 오르는 질투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 버릴 것만 같았다.

    “아, 됐어! 당장 나가!”

    결국 라이언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괜히 성질을 내며 하녀를 내쫓아 버렸다.

    “진짜 짜증 나게…… 윽.”

    라이언은 버릇처럼 금이 간 오른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려다, 밀려오는 통증에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수북하게 쌓여 있는 편지 봉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름은.

    <샬럿 제이슨.>

    심지어 발신인이 샬럿인 편지는 한 통이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도 다섯 통은 넘어 보이는 편지들을 바라보며, 라이언은 짧게 혀를 찼다.

    ‘정말, 샬럿도 지긋지긋하게 편지를 보내네.’

    라이언은 편지 봉투 하나를 집어서, 대충 뜯어 읽어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편지를 구겨서 아무렇게나 휙 던져 버린다.

    ‘뭐, 지금은 샬럿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어떻게든 이네스를 붙들어야만 한다.

    라이언은 침대에 벌렁 누운 채, 초조한 눈빛으로 천장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서식스 공작이 끼어드는 바람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지만…….’

    순간 라이언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도대체 서식스 공작은 왜 자꾸 날 방해하는 거지?!’

    처음에 미술전에서 이네스와 실랑이를 했을 적에는 그럴 만하다고 여겼다.

    어쨌든 그건 에녹이 주최하는 미술전이었고, 라이언이 거기서 소란을 피우는 건 역시 보기 싫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라.’

    비록 서식스 공작이 교류전의 운영진이라 한들, 이번의 행동은 분명 과한 구석이 있었다.

    ‘어떻게 사람을 개처럼 끌고 나갈 수가 있지? 자기가 공작이고, 국왕 폐하의 동생이면 다인가?’

    라이언은 제가 저지른 무례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뻔뻔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그 표정.

    당장이라도 라이언을 찢어 죽일 것처럼 살벌했던 그 표정은…….

    ‘제기랄.’

    에녹에게 잡혔던 손목이 다시 한번 욱신거렸다.

    라이언이 억울한 표정으로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쾅!!

    어찌나 문을 세게 밀어젖혔는지, 벽에 부딪힌 방문이 부서질 듯했다.

    그 너머로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고트 자작이 있었다.

    “형?”

    라이언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고트 자작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도대체 왜 그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고트 자작의 얼굴은 그야말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으니까.

    “이 새끼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온 고트 자작이 냅다 주먹을 휘둘렀다.

    퍽!

    “억!!”

    라이언이 침대에 푹 쓰러졌다.

    갑자기 얻어맞게 되니, 고통보다도 어리둥절함이 훨씬 더 컸다.

    라이언은 얼얼한 뺨을 붙들고 형을 노려보았다.

    “아니, 이게 무슨 짓……!”

    “도대체 축하연에서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왕실에서 직접 항의 서한을 보내왔다고!!”

    “무, 뭐?!”

    순간 라이언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보면 어제 에녹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는 하다.

    ‘고트 자작가를 대표하여 축하연에 참석했던 자작 영식이, 개처럼 발광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써서야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오늘 축하연이 끝나면, 왕실에서 직접 고트 자작가에게 이번 축하연을 망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텐데.’

    ……하지만 정말로 이렇게 항의 서한을 보낼 줄이야?

    그건 그냥 이쪽을 압박하기 위해 했던 말이 아니었던가?

    라이언은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트 자작은 빠득빠득 이를 가는가 싶더니, 왼손에 움켜쥐고 있던 항의 서한을 라이언의 얼굴 위로 내던져 버렸다.

    “자, 두 눈 똑바로 뜨고 봐!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라이언이 멍하니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왕가의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진 고급스러운 종이 위로, 정갈한 글씨로 라이언이 저지른 짓들을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고트 자작 영식은 교류회의 운영진인 브라이어튼 백작을 겁박하였으며, 그녀를 강제로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습니다.

    브라이어튼 백작은 왕비인 나, 헬레나가 직접 임명한 교류전의 운영진입니다.

    그러니 왕실에서는 이번 사안에 대하여 엄중히 대처할 것이며…….>

    “이거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고트 자작이 그야말로 돌아 버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라이언을 노려보았다.

    “무능한 새끼 같으니라고, 네가 인생에서 했던 일 중에 가장 잘했던 건 브라이어튼 백작과 결혼한 것뿐이었는데!”

    “혀, 형! 나는……!”

    “형이라고도 부르지 마! 이 쓰레기 같은 자식!”

    살벌하게 쏘아붙인 고트 자작이, 치를 떨며 다시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라이언과 말조차 섞기 싫다는 태도다.

    “……이번 사안에 엄중히 대처한다고? 이게 도대체 무슨!!”

    홀로 남은 라이언의 얼굴이 절망과 분노에 얼룩져 흉험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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