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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71)화 (71/120)
  • 71화

    ❀ ❀ ❀

    ‘이, 이걸 어쩌면 좋지?’

    얼떨결에 대연회장 밖으로 빠져나온 이네스가, 난처한 얼굴로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에녹은 내내 굳은 얼굴이었다.

    ‘공작 각하, 화나신 것 같아.’

    슬쩍 에녹의 눈치를 살피던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각하.”

    “…….”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순간 주변의 온도가 확 낮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화를 더 돋웠나?’

    이네스는 내심 찔끔했으나, 그래도 이렇게 돌아가는 건 역시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축하연은 칼도로프의 사절단까지 참석한 중요한 자리잖아요. 최대한 조용히 상황을 수습하는 편이…….”

    “브라이어튼 백작.”

    동시에, 내내 침묵을 지키던 에녹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 어떤 것도 백작의 안위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

    이네스가 침묵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미는 통에, 에녹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어째서 브라이어튼 백작은 항상 자기 자신보다도 다른 것부터 걱정하는 것일까.’

    이네스가 자기 자신을 좀 더 우선시했으면 싶었는데.

    제 안위보다도 축하연을 걱정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속이 뒤집어졌다.

    이성적으로는 이네스가 저러는 건 당연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화가 나서…….

    “손목을, 다쳤잖습니까.”

    치받는 감정 때문에 말이 툭툭 끊어졌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사신단도 이해해 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머리에 바짝 열이 올랐다.

    ‘침착해.’

    스스로가 너무 흥분해 있다는 생각에, 에녹이 두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떴다.

    그러고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내어 말을 이었다.

    “일단 휴게실로 가서 손목부터 치료합시다. 지금도 계속 손목이 부어오르고 있으니…….”

    “…….”

    이네스는 그런 에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눈앞의 공작 각하께서는 잔뜩 화가 나 계신데.

    ‘……나는 어째서 자꾸만 가슴이 간질거리는 걸까.’

    그러던 중.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그건 아마도, 공작 각하께서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계셔서.’

    순간 귀 뒤가 화끈하게 뜨거워졌다.

    ‘칼도로프의 사절단이 참석한 축하연조차, 나보다는 중요하지 않다고 표현해 주시니까…….’

    에녹의 날 선 반응까지도 그녀를 향한 염려임을 알아서.

    자꾸만 사람의 마음을 제멋대로 휘저어 놓는데, 그게 의도하고 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더욱 심장이 뛰었다.

    이네스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솔직히…… 속이 시원했었어.’

    에녹의 손아귀에 붙들려 벌레처럼 버둥거리며 무도회장 밖으로 끌려가던 라이언을 보는 것 말이다.

    귀부인으로서 기품 있게 굴어야 한다는 그 압박감 때문에.

    항상 상상만 했을 뿐, 차마 저지르지 못했던 일들을 에녹이 대신해 주었지 않은가.

    저 고고하고 우아한 남자가…….

    오로지 그녀를 위해.

    “…….”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녀의 일에 제 일처럼 저렇게 화를 내 주었던 사람이 몇이나 있었는지.

    어쩐지 목이 콱 메어 와서, 잠시 머뭇거리던 이네스가 모깃소리만 하게 속삭였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에녹이 멈칫했다.

    잠시 후.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감사 인사보다는, 백작께서 빨리 손목 치료를 받으시는 편이 저는 더 좋습니다.”

    “네, 그럴게요.”

    이네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에녹의 살뜰한 염려를 받을 때마다, 흡사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서 조금은 낯이 간지러웠다.

    하지만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기뻐.’

    에녹을 뒤따라 걷던 이네스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행복한 미소였다.

    ❀ ❀ ❀

    두 사람은 휴게실에 도착했다.

    다만 문제는, 일반 귀족들을 위해 개방된 휴게실이 아닌 왕족 전용 휴게실이라는 것이다.

    별생각 없이 에녹의 뒤를 따라 들어가려던 이네스가 멈칫했다.

    “여긴 왕실 분들만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실인데, 제가 들어와도 되나요?”

    “안 될 건 또 뭡니까.”

    에녹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일반 휴게실은 지금쯤 사람으로 가득 차 있을 텐데, 브라이어튼 백작을 그 소란스러운 곳에 둘 생각은 없습니다.”

    “그, 그래도.”

    “왕족인 제가 괜찮다는데 뭐 어떻습니까?”

    에녹은 머뭇거리는 이네스를 자리에 앉히고는, 미간을 좁히며 신신당부를 했다.

    “백작은 그냥 마음 편히 쉴 생각이나 하세요.”

    “…….”

    에녹이 저렇게까지 말해 준 덕일까.

    이네스는 긴장감으로 바짝 굳어 있던 온몸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에녹은 몸을 돌려 휴게실에 놓인 서랍장으로 향하고는, 능숙하게 구급상자를 꺼내 왔다.

    구급상자를 열자 소독약과 붕대, 가벼운 찰과상과 타박상에 바르는 연고 등등.

    약품의 종류가 상당했다.

    그를 지켜보던 이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휴게실에 구급상자까지 마련되어 있나요?”

    게다가 그냥 구색만 갖춰 둔 게 아니라, 의외로 꽤 본격적이지 않은가.

    그러자 에녹이 와락 미간을 구겼다.

    “그야 존경해 마지않는 국왕 폐하 때문이죠.”

    “네? 폐하요?”

    “폐하께서는 술을 좋아하시는데, 가끔 과음하시는 바람에 자잘하게 다치실 때가 있어요.”

    그러고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인다.

    “물론 그 뒤처리는 다 제가 해야 하고요.”

    “아…….”

    “비록 폐하를 두고 하기에는 불경한 생각이지만, 애초에 제가 뒤치다꺼리를 해 드릴 것을 알고 계셔서.”

    에녹이 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곁에 있을 때에만 과음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의심이 들 지경입니다.”

    ……어째 국왕 폐하에 대한 쓸데없는 지식이 하나 늘어난 것 같다.

    그나마도 폐하에 대한 존경심이 후드득 떨어져 버리는 지식 말이다.

    차마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이네스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에녹이 연고 뚜껑을 열었다.

    “조금 따끔할 수 있습니다.”

    “아, 네.”

    에녹은 조심조심 이네스의 부은 손목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손등에 스치는 손가락의 감촉이 간지럽다.

    이네스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에녹을 응시했다.

    내리깐 금빛 긴 속눈썹과 그 아래의 푸른 눈동자와 유려한 선을 가진 조각 같은 얼굴…….

    ‘어떡해.’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었다.

    온몸의 솜털이 올올히 일어나고,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정신 좀 차려, 이네스.’

    이네스는 속으로 자신을 질책했다.

    ‘고작해야 연고를 발라 주시는 것뿐인데, 나 혼자 이렇게 긴장하면 어쩌란 말이야?’

    적어도 눈앞의 에녹은 그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순수하게 그녀의 다친 손목만을 걱정하고 있는데…….

    ‘이래서는 안 돼.’

    자꾸만 머리를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털어 낼 겸, 이네스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어째 공작 각하와 있으면 자주 휴게실에 오게 되는 것 같네요.”

    “휴게실이라면…….”

    “일전에도 그랬었잖아요. 공작 각하께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요.”

    당시에도 라이언은 그녀를 겁박하려 들었고, 에녹은 그런 라이언을 단호하게 차단해 주었다.

    그때와 지금이 어째 상황이 조금 비슷한 것 같지 않은가.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공작 각하께서는 언제나 저를 도와주시는군요.”

    그러고는 지레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문다.

    ‘어쩌면 좋아, 속마음이 제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어!’

    그 말에, 내내 이네스의 손목에만 집중하던 에녹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선과 시선이 맞닿았다.

    새파란 눈동자는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같았다.

    ‘옛 속설에…… 깊은 물을 오래 바라보면 그에 홀린다는 말이 있던데.’

    에녹의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가끔 이네스는 그 속설을 떠올렸다.

    저 시선 안에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무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점은.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상대가 에녹이라면…… 차라리 기꺼이 매혹당하고 싶은 이 기이한 마음.

    “…….”

    이네스는 복잡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이윽고 에녹이 순순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전 백작을 제힘이 닿는 한 최대한 돕고 싶어요.”

    “그건 왜…….”

    “글쎄요,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에녹이 덤덤한 어조로 불쑥 되물었다.

    이네스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에녹은 그런 그녀를 더 채근하지 않았다.

    그저 알아서 고민해 보라는 것처럼 이네스의 손목 치료에만 집중할 뿐.

    “…….”

    “…….”

    그렇게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자, 다 됐습니다.”

    에녹은 꼼꼼하게 붕대까지 감아 준 후에야, 이네스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이네스는 붕대가 감긴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마음이 영 복잡하다.

    ‘글쎄요,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고작해야 질문 하나를 들었을 뿐인데, 자꾸만 마음이 진정이 안 된다.

    동시에 에녹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연회장에서는 제가 거칠게 굴었지요. 사죄드리겠습니다.”

    사실 불가항력이었다.

    이네스의 손목을 움켜쥔 라이언을 보는 순간, 에녹은 처음으로 ‘분노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온몸으로 느꼈으니까.

    ‘그래도…… 브라이어튼 백작은 아까 내 행동 때문에 다소 곤란했겠지.’

    머리가 식은 후에야 이네스의 입장을 고려하게 되다니.

    조금 더 세심했어야 한다며, 에녹은 속으로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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