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70)화 (70/120)
  • 70화

    라이언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심지어는 칼도로프의 사신단과, 국왕 부부까지 놀란 눈빛으로 두 사람을 주목하는 중이었다.

    “지금 고트 자작 영식께서 브라이어튼 백작을 강제로 끌고 나가려 하신 거예요?”

    “그래서 서식스 공작께서 직접 뜯어말리시는 거고요?”

    “그런 것 같은데요, 심지어 연회장에서 내보내려 하시는데도 저렇게 난리를 치시다니…….”

    “너무 폭력적이잖아요?”

    경악에 가득 찬 수십 쌍의 눈동자들.

    그 눈동자 속에서, 라이언은 채 숨기지 못한 경멸과 한심함을 읽어 냈다.

    라이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러니 조용히 따라 나오는 게 좋을 겁니다.”

    에녹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고트 자작가를 대표하여 축하연에 참석했던 자작 영식이, 개처럼 발광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써서야 되겠습니까?”

    평소 우아한 언사를 사용하던 에녹답지 않은 폭언에, 라이언이 두 눈을 부릅떴다.

    ‘뭐, 개처럼 발광한다고?!’

    하지만 에녹은 싸늘하게 말을 이을 따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축하연이 끝나면, 왕실에서 직접 고트 자작가에게 이번 축하연을 망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텐데.”

    라이언이 소스라쳤다.

    “그, 그게 무슨……!”

    “나라면 최소한의 체면이라도 챙기겠습니다.”

    에녹이 라이언을 버러지 보듯 응시하며 못을 박았다.

    “여기서 계속 버티고 있다가는, 조만간 그 잘난 체면조차 제대로 챙길 수 없게 될 테니 말입니다.”

    “…….”

    라이언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 ❀

    쿵.

    연회장 문이 닫혔다.

    연회장에서부터 흘러나오던 우아한 클래식 선율이 뚝 끊어졌다.

    밖으로 끌려 나온 라이언이, 겁에 질린 눈초리로 에녹을 바라보았다.

    주뼛거리며 입을 연다.

    “가, 가문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건 무슨 말씀이신지…….”

    하지만 라이언은 제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했다.

    라이언을 쏘아보는 새파란 눈동자 위로 살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쾅!

    에녹이 라이언의 멱살을 붙들고 벽에 밀어붙인 것이다.

    “컥!”

    목을 짓눌린 라이언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 이것 좀 놓고……!”

    라이언은 에녹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으나 전혀 소용없었다.

    오히려 멱살을 움켜쥔 손아귀의 힘이 더더욱 강해질 따름이었다.

    “윽, 큭……!”

    목이 점점 조여 오고, 시야가 혼미해진다.

    라이언이 제 목을 짓누르는 에녹의 손을 뜯어 내려 발버둥을 쳤으나, 모조리 허사였다.

    동시에 에녹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다시는 백작 앞에 나타날 생각 마. 알았어?”

    “크억, 헉……!”

    라이언의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었다가, 이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색이 빠졌다.

    그렇게 그의 눈이 뒤집어지려는 찰나.

    “고, 공작 각하!”

    연회장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황급히 달려들어, 에녹에게서 라이언을 떼어 놓았다.

    “그, 일단 진정하십시오!”

    “이러다가 정말로 고트 자작 영식이 까무러치겠습니다!”

    기사들이 한참을 에녹을 설득한 후에야, 에녹은 라이언을 붙든 손에서 힘을 풀었다.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라이언이 미친 듯이 기침을 토해 냈다.

    “콜록, 콜록, 컥, 케엑, 켁……!”

    그런 라이언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며, 에녹은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공작 각하께서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건 처음 보는데…….’

    ‘도대체 연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기사들은 지레 긴장하여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평온했던 에녹이 저렇게 이성을 잃은 모습은 처음 보니까.

    에녹은 한참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깊게 심호흡을 했다.

    ‘침착해야 해, 아직 축하연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브라이어튼 백작.

    이네스가 이번 교류전에 얼마나 큰 정성을 쏟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고작해야 이따위 쓰레기 같은 작자 하나 때문에 축하연을 망칠 수는 없다.

    표정을 정돈한 에녹이 눈짓으로 겁에 질린 라이언을 가리켰다.

    “고트 자작 영식께서 귀택하신다 하십니다. 정중히 모셔다드리세요.”

    이제 에녹은 다시 평소의 우아한 말씨로 되돌아온 상태였다.

    기사들이 반색을 했다.

    “예, 각하.”

    “명 받들겠습니다.”

    황급히 에녹에게 예를 갖춘 기사들은, 라이언에게 정중하게 권유했다.

    “가시죠.”

    “아니, 하지만……!”

    라이언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 했다.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영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뭐야!”

    라이언이 두 눈을 부릅떴다.

    사방에서 달려든 단단한 손아귀가 제 팔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이었다.

    검을 오래 쥔 기사들의 손아귀는 마치 쇳덩이처럼 단단했다.

    “이, 이거 놔!!”

    라이언이 마구 몸부림을 쳐 기사들의 손길을 떼어 냈다.

    그 후, 이를 악물며 쏘아붙인다.

    “내 발로 가면 될 거 아니야!!”

    그러고는 잔뜩 구겨진 옷자락을 탁탁 쳐서 펼친다.

    못내 버리지 못한 허세였다.

    에녹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런 라이언의 꼴을 지켜보는가 싶더니, 휙 돌아섰다.

    쿵!

    연회장 문이 닫혔다.

    화려한 풍경 안으로 에녹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단호한 뒷모습은,

    ‘작위조차 없는 하잘것없는 고트 자작가의 영식인 당신은. 다시는 이런 화려한 세계에 발을 들일 일조차 없을 겁니다.

    브라이어튼 백작이 아닌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주제를 좀 파악하세요.’

    마치 그렇게 못을 박는 것만 같아서.

    “이 망할……!”

    라이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 ❀ ❀

    에녹이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녹의 시선은 단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이네스였다.

    에녹은 성큼성큼 이네스에게로 다가갔다.

    안절부절못하던 이네스가 황급히 에녹에게 말을 붙였다.

    “저, 공작 각하. 고트 자작 영식은…….”

    “손목은 좀 어떻습니까?”

    응? 손목?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던 것도 잠시, 이네스는 반사적으로 옷소매를 내려 손목을 가리려 했다.

    “아, 손목이요.”

    하지만 에녹은 이미 보고 말았다.

    이네스의 손목 위로 거무죽죽하게 멍이 올라오는 것을 말이다.

    성인 남자의 손아귀에 강제로 붙들린 탓이었다.

    에녹의 눈동자에 새파랗게 날이 섰다.

    “……치료해야겠군요.”

    “괜찮아요. 이 정도쯤은 참을 수 있…….”

    “괜찮기는 뭐가 괜찮습니까?”

    에녹은 다소 날카롭게 대꾸했다.

    놀란 이네스가 헛숨을 삼켰다.

    “각하.”

    아차.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화를 내려 함은 아니었는데.

    에녹은 복잡한 눈빛으로 이네스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짓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간신히 분을 억누른 에녹이 똑바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를 지켜보던 국왕 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국왕 부부는 조금 놀란 낯을 했다.

    에녹이 곧장 자신들에게로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저, 공작 각하…….”

    반사적으로 에녹을 만류하려던 이네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왕과 왕비 앞에 선 에녹이 뻣뻣하게 사죄의 말을 꺼냈다.

    “소란을 일으킨 점은 죄송합니다.”

    비록 입으로는 죄송하다고 말하지만 전혀 죄송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의례적인 사과의 말로 포문을 연 에녹은, 곧이어 제 용건을 줄줄 내뱉었다.

    “브라이어튼 백작이 크게 놀랐을 것 같아,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하려고 합니다.”

    에녹의 목소리는 일견 무덤덤하게 들렸으나, 하지만 왕은 그 목소리에 서린 미묘한 불쾌감을 눈치챘다.

    동시에 에녹이 어금니를 깨물며 말을 덧붙였다.

    “……손목을 다치기도 했고요.”

    바짝 날이 선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에녹 저 자식, 완전히 눈이 뒤집어졌는데?’

    사실 그러지 않고서야, 에녹이 공식 석상에서 사람들 시선을 무릅쓰고 직접 고트 자작 영식을 끌어낼 리 없었다.

    언제나 침착하다 못해 무심하기까지 한, ‘그’ 에녹이 말이다.

    에드워드는 단언할 수 있었다.

    에녹과 형제로 살아왔던 서른다섯 해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에녹이 저렇게 격하게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에녹이 분노했다는 뜻이며, 이네스가 당한 겁박을 중대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그건 즉.

    ‘적어도 에녹에게 있어, 백작이 무척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아무래도 에녹이 이네스에게 품은 감정은 꽤 진지한 것 같다.

    에드워드가 내심 짐작하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말이다.

    “백작의 상처가 심합니다. 한시바삐 치료받아야 합니다.”

    때마침 에녹이 채근하듯 말을 덧붙였다.

    ‘나 참, 지금은 연회 중간에 빠져나간다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고 있으니…….’

    에드워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에녹은 ‘물러나도 좋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아예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결국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한편 뒤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이네스가 경악했다.

    ‘아니, 정말 가도 되는 거야? 나는 운영진인데?’

    그런 의미를 담아 힐끔 에녹을 올려다보았으나, 에녹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네스를 데리고 연회장 밖으로 빠져나갈 따름이었다.

    결국 이네스는 허겁지겁 국왕 부부에게 예를 갖추고 에녹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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