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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69)화 (69/120)
  • 69화

    ❀ ❀ ❀

    그 후.

    사절단 일원은 제각기 연회장에 흩어져 축하연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네스는 그제야 약간 한숨을 놓았다.

    다만 매의 눈으로 연회를 살피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그래도 축하연 분위기는 꽤 괜찮은 것 같네.’

    다행이었다.

    음식과 술도 충분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은 다들 즐거운 얼굴이다.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는 국왕 부부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사람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던 이네스가 힐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공작 각하께서는…….’

    사절단 대표와 함께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네스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아.’

    사절단도 에녹과의 대화에 흡족해하는 듯했고.

    무엇보다도 라이언이 당장 시야에 보이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다.

    아까 이네스와 사절단 사이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얼굴이 벌겋게 물든 채 꽁무니를 빼던 게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는데…….

    “이네스.”

    “…….”

    ……분명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이네스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에, 끈질기기도 하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라이언이었다.

    이네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뒤를 돌아보았다.

    라이언이 절박한 시선으로 이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우리 얘기 좀 해.”

    라이언이 간절하게 그녀에게 말을 붙였으나,

    “싫어.”

    이네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가 사이좋게 대화나 나눌 관계는 아닐 텐데.”

    그 대답에 라이언이 발끈했다.

    “잘못했다고 몇 번이나 사과했었잖아! 언제까지 이렇게 화만 내고 있을 거야?!”

    이네스는 그저 기가 막혔다.

    사과를 하면 당연히 그녀가 마음을 풀어야 한다는 것처럼, 라이언은 그저 당당한 태도다.

    오히려 제가 피해자가 된 것처럼 이네스에게 따지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이 들을까 걱정스러웠는지, 목소리를 낮춰 윽박지르는 꼴이 우스웠다.

    “이혼 소송을 거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 그런데 진짜로 이혼을 한다고?”

    “라이언, 이혼 소송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해? 당연히 이혼을 하기 위함이 아니겠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던 라이언은, 미간을 와락 구기며 다시 목소리를 억눌렀다.

    “그래, 이혼은 조금 이따 따지기로 하고. 그럼 투자금은 왜 갑자기 모조리 회수했는데?”

    “내 가문에서 투자한 금액을, 가주인 내가 결정하여 다시 회수한다는데.”

    이네스가 양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뭐가 문제야?”

    “지금 너 제정신이야? 지금 우리 가문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알아?!”

    라이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물들었다.

    “아하, 그러니까 요점을 정리하자면.”

    그런 라이언을 마주하며, 이네스가 삐딱하게 미소 지었다.

    “고트 자작가의 사업이 휘청거리니까, 이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아서 나를 찾아왔다 이거네?”

    “……이네스.”

    그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라이언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심정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고함을 지르며 이네스를 윽박지르고 싶었으나.

    라이언은 간신히 분노를 억눌렀다.

    “네가 화난 건 잘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하자.”

    “도대체 뭘 그만하자는 거야?”

    “이번에는 충실한 남편이 될게. 밖으로 나돌거나 하지도 않을 테니까, 이런 감정싸움은 그만하고…….”

    그 애원조의 말에, 이네스의 눈썹이 꿈틀 굳어졌다.

    그녀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누구 마음대로?”

    라이언은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네스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여기서 확실히 할게.”

    “확실히 한다니, 그게 무슨…….”

    “라이언 당신과의 결혼 생활은 정말 끔찍했어.”

    라이언이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런 그에게, 이네스가 재차 못을 박았다.

    “그러니 다시는 재결합이니 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말도 안 된다니, 우리는……!”

    “내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평생 당신과 얽히지 않고 사는 거니까.”

    순간 라이언은 이성이 뚝 끊겼다.

    ‘감히 이네스가 날 거부한다고?’

    한때 자신을 애정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봤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아무리 회유하고, 매달려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선을 긋는다.

    그리고 라이언은 그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네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어?’

    자신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불변하는 것이라고, 감히 자신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면전에서 부정당하자.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겨 짓밟히기라도 한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 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악에 받친 라이언이 이네스의 손목을 바짝 틀어쥐었다.

    밀려드는 통증에, 이네스가 헛숨을 들이쉬었다.

    “이것, 놔……!”

    이네스는 어떻게든 라이언의 손을 떨쳐 내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분노로 눈이 뒤집힌 성인 남성의 악력은, 평범한 여성이 떨쳐 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잘 갈린 칼날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윽!”

    라이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이네스의 곁으로 다가온 에녹이, 라이언의 손목을 힘을 주어 움켜쥐고 있었다.

    그 악력이 어찌나 강한지, 당장이라도 손목이 부러질 것 같다.

    “으윽……!”

    고통으로 눈이 뒤집힌 라이언이, 손톱을 세워 에녹의 손을 떼어 내려 했으나.

    모조리 허사였다.

    도리어 손목을 죄는 힘이 더더욱 강해지기만 할 뿐.

    “아무래도 현 상황에 대해 설명을 좀 들어야 할 것 같은데요.”

    비록 태도는 침착했으나, 그 목소리에 실린 감정까지 침착하지는 않았다.

    라이언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손, 손목 좀……!”

    하지만 에녹은 차갑게 되물을 따름이었다.

    “왜 놓아주어야 합니까?”

    “그, 윽!”

    무어라 황급히 변명하려던 라이언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손목을 비틀어 댔다.

    손목에 가해지는 힘이 점점 더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고트 자작 영식이 백작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괜찮고.”

    “고, 공작 각하!”

    “자작 영식이 백작에게 했던 짓을 똑같이 되돌려 주는 건, 안 됩니까?”

    소름 끼치도록 싸늘한 어조였다.

    “일전에 내 미술전에서 백작을 협박하던 것도 그렇고, 자작 영식은 단 한 번도 백작을 존중하려 들지 않는군요.”

    에녹이 내뱉듯 말을 맺었다.

    그를 끝으로, 에녹이 라이언의 손목을 움켜쥐고 성큼성큼 연회장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설마 날 내쫓으려고?!’

    라이언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든 제 손목을 붙든 에녹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저, 저도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라이언이 이를 악물며 그 자리에서 뻗댔다.

    “이렇게 강제로 끌고 나가려 하시는 건, 제 가문인 고트 자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예의?”

    “예! 고, 고트 자작가는 왕국의 귀족이잖습니까! 그러니……!”

    동시에 에녹의 눈동자에서 불똥이 튕겨 올랐다.

    더 이상 라이언의 헛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브라이어튼 백작.’

    자신의 등 뒤에 이네스가 있었다.

    그랬기에, 에녹은 더더욱 더 이상 이네스 앞에 라이언이 얼쩡거리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먼저 백작을 강제로 연회장에서 끌고 나가려 했던 건 자작 영식이잖은가?”

    “각하!”

    “손님이 손님다워야 예의를 지키지. 안 그런가?”

    방금까지만 해도, 에녹은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존대는 유지했었으나.

    이제 그는 존대조차 집어치운 상태였다.

    “더 이상 당신 같은 무뢰배를 백작 곁에 둘 수는 없어.”

    그 살벌한 말을 끝으로, 에녹이 다시 한번 거칠게 라이언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아파!’

    라이언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에녹에게 붙들린 손목에서 유리 조각으로 벤 양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왔다.

    아무래도 뼈가 상한 듯하다.

    ‘도대체 뭐야? 자기가 이네스의 대변인이라도 된다는 건가?’

    오기가 생긴 라이언이, 도끼눈을 뜨며 에녹을 노려보았다.

    ‘이네스의 남편은 나였고, 이네스가 사랑했던 남자도 나였는데……!’

    하지만 라이언은 금방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는데.

    “게다가, 지금 고트 자작 영식은 스스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자각하고 있기는 한 건가?”

    에녹이 재차 날카롭게 쏘아붙였기 때문이었다.

    “내, 내가 뭘 했다고……!”

    “칼도로프의 사절단이 참석한, 왕비 전하가 직접 베푸는 축하연에서.”

    흡사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교류전의 운영진 중 하나인 브라이어튼 백작을 겁박하며, 강제로 밖으로 끌고 나가려 하지 않았나?”

    순간 라이언은 차가운 얼음덩어리를 통으로 삼킨 것처럼 뱃속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아니. 저는……!”

    잔뜩 흥분한 머리 위로 찬물이 쏟아진 양, 퍼뜩 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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