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왕비 전하께서 뛰어난 안목으로 브라이어튼 백작의 능력을 알아보신 게지요.”
“…….”
“이번 교류전을 통해, 백작님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저렇게 얼굴에 철판을 깔 수 있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애초에 이네스가 화가로서의 재능을 펼치지 못했던 건, 라이언이 그녀의 공로를 훔쳐 갔기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반박하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네스는 교류전의 운영진으로서 최대한 마찰을 줄여야 하는 입장이니까.
‘내 입장이 곤란하다는 것을 알아서, 일부러 말을 붙이는 거겠지.’
이네스가 미간을 좁히던 차.
라이언이 유들유들한 어조로 지껄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 제가 보냈던 선물을 받아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
순간 이네스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비록 입으로는 감사한답시고 지껄이고 있지만, 그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으니까.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건, 너도 나를 완전히 꺼리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그 증거로 주변 귀족들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선물을 받아 주셨다고요?”
“하지만 두 분께서는 이미 이혼하시지 않았나요?”
“굳이 전남편에게 선물을 받을 이유는…….”
동시에 이네스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이런, 제가 미리 전해 드렸어야 하는데 워낙 바빠서 깜빡 잊고 있었네요.”
……전해 준다고? 무엇을?
라이언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매끄러운 말이 이어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이네스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근처의 시종을 손짓해 불렀다.
“내가 짐 보관소에 맡겨 둔 서류가 하나 있는데, 그를 가져다주겠나?”
“예, 백작님.”
시종이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으로 멀어지는 시종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라이언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서류라니요?”
“아마 보시면 알 겁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라이언은 기대감으로 풍선처럼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설마, 고트 자작가의 자금줄을 조금 풀어 주려고 그러나?’
사실 라이언이 이네스에게 이런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받을 서류가 무엇이 있겠는가.
‘역시 이네스는 날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 게 분명해!’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려 했으나, 라이언의 입술은 이미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네스는 그런 라이언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 후.
돌아온 시종의 손에는 꽤 고급스러운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네스는 그를 받아 라이언에게 건넸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희희낙락한 얼굴로 서류 봉투를 받아든 라이언의 얼굴은, 이내 잔뜩 굳어지고 말았다.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서류였기 때문이었다.
“……이건?”
고급 서류 봉투 위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소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터너 고아원.’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열어 보세요.”
이미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잔뜩 쏠린 상태.
그 시선들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라이언이 주춤주춤 서류를 꺼내 들었다.
고아원의 인장이 박혀 있는 서류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트 자작가의 기부에 큰 감사를 표하며, 이번에 기부해 주신 금액은 아이들을 위해 사용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기부 증서?”
라이언이 얼빠진 얼굴로 증서를 내려다보았다.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네. 고트 자작가의 이름으로, 주신 선물의 가격만큼 기부했답니다.”
“…….”
허를 찔렸다.
라이언이 살벌한 눈으로 이네스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네스는 여상하게 말을 이을 따름이었다.
“영식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일전에 고트 자작가에서 선물을 보내 주셨죠.”
“그때는 잘 받아 놓고, 갑자기 왜……!”
“워낙에 급작스럽게 선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일단 받기는 했는데.”
이네스가 라이언의 말을 중간에 뚝 잘라먹으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 보니 저희가 선물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
“브라이어튼 백작!”
“다만 그 선물을 그대로 되돌려 드리면, 외부에 고트 자작가의 면이 서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답니다.”
그도 사실이었다.
기껏 선물을 보냈는데 그를 그대로 돌려보낸다면.
가문끼리 이만큼 서로 사이가 나빠요, 라고 외부에 대놓고 공표하는 셈이지 않은가.
이네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선물은 그대로 받되, 그 선물만큼의 금액을 고트 자작가의 이름으로 기부하였어요.”
“뭐라고!”
라이언의 얼굴이 흉험하게 일그러졌다.
이네스는 속으로 피식 조소했다.
‘고트 자작가 측에서 이렇게 지저분하게 나올 줄 알았지.’
그래서 처음부터 고아원에 기부한 것이다.
귀족들이 예의를 갖춰 거절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불편한 선물을 받게 됐을 때, 그 선물만큼의 금액을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사용하는 것.
다만 워낙에 예스러운 방식이었기에, 요새는 그런 식으로 선물을 거절하는 일이 극히 적었다.
그래서 고트 자작가에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테지만…….
“마침 오늘 증서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고트 자작가로 보내 드릴까 하다가, 오늘 축하연에서 마주칠까 싶어 챙겨 왔는데.”
이네스가 발랄하게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증서를 드릴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니, 누구 마음대로 기부를 하는……!”
반사적으로 언성을 높여 따지려던 라이언이 순간 멈칫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은근히 이네스 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뭐, 그리 나쁜 거절 방식은 아니지 않나요?”
“아무래도 브라이어튼 백작과 고트 자작 영식 사이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으니, 저만하면 원만한 대응이 아닌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애초에 원하지 않는 선물을 보내지 않았으면 되잖아요?”
라이언은 빠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제기랄!’
영 상황이 불리하다.
이네스가 거기에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듣자 하니 최근 고트 자작가의 기부금이 줄었다지요?”
“그게 도대체 무슨……!”
라이언이 발끈했으나, 이네스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왕국의 귀족으로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제까지나 제가 신경 써 드릴 수는 없잖아요?”
이네스는 거기까지만 말했으나,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그 말의 행간을 읽어 냈다.
이네스와 이혼한 이후 기부금이 줄었다는 건, 그만큼 고트 자작가의 사정이 어렵다는 뜻일 터.
브라이어튼이 고트 자작가에 투자했던 투자금을 회수했다는 소문이 무성하니까.
거기에 이네스가 덧붙인 저 말.
‘언제까지나 제가 신경 써 드릴 수는 없잖아요?’
저 말의 뜻은…….
“설마, 이혼 전에도 백작이 고트 자작가의 기부금까지 챙겼다는 건가요?”
“아무리 결혼했다고 해도 그렇지, 남편 가문의 기부금 같은 것까지 챙겨 주는 건 좀…….”
“브라이어튼 백작이 정말 고생이 많았겠는걸요.”
귀족들의 얼굴에 희미한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
높은 신분을 가진 귀족들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소액이라도 기부하는 게 왕국의 암묵적인 관례였다.
물론 의무까지는 아니지만, 가문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그 정도 기부는 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 기부마저 브라이어튼 백작가에 떠넘겼을 줄이야!
심지어 라이언은 이네스와의 결혼을 통해, 브라이어튼 백작 작위를 누렸던 전적이 있지 않은가.
백작가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수많은 혜택은 모조리 누렸으면서, 최소한의 체면치레마저 백작가에게 떠밀어 버리다니…….
‘좋아, 이쯤이면 분위기는 제대로 형성된 것 같고.’
이제 라이언을 대화에서 배제해 버리면 완벽하다.
그런 판단으로 이네스는 다시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미안한 얼굴로 웃어 보인다.
“죄송해요, 제 개인사 이야기가 너무 길었네요. 그래서 이번 교류전에서 저희가 집중하고자 하는 부분은…….”
그렇게 화제는 자연스럽게 이번 교류전과 예술 전반에 대해 넘어갔다.
그리고 라이언은 아교라도 바른 것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정확히는 화제에 끼어들 수 없는 거였다.
‘일부러 저런 화제를 고른 거야!’
라이언의 얼굴 위로 수치심과 분노가 얼룩졌다.
라이언이 예술에 대한 조예가 얕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대화에서 소외시키기 위해!
애초에 일반 귀족들이 교양으로 배우는 정도만 간신히 익힌 그가, 사절단과 이네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완전히 따라갈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라이언의 사나운 눈빛을 눈치챘는지, 이네스는 라이언을 살짝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생긋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뭐가 문제인데?’
마치 그렇게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결국 라이언은 대화가 끝날 때까지 완전히 소외되고 말았다.
‘망할!’
흡사 투명 인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라이언의 얼굴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벌겋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