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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67)화 (67/120)
  • 67화

    처음에 라이언과의 이혼 문제로 만났을 적만 해도, 저 푸른 눈동자는 그저 무감하기만 했었는데.

    그 시선에는 어느새 염려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에녹이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어서.

    그 찰나의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됐다.

    ‘조금……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아.’

    그 증거로, 딱딱하게 굳어졌던 어깨가 부드러워졌다.

    동시에 왕비가 에녹과 이네스를 가리켰다.

    “또한, 서식스 공작과 브라이어튼 백작을 소개합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이네스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명문가의 단 하나뿐인 후계자로서 평생을 교육받아 왔던 귀족적인 태도였다.

    ‘예전에는 분명 굉장히 소극적이고, 존재감조차 없던 여인이었는데…….’

    ‘지금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넘쳐 보여.’

    속마음이야 어떠하든, 겉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는 자신감 넘치는 그 모습에.

    사람들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두 사람은 이번 교류전의 핵심으로, 운영을 총괄하였습니다.”

    때마침 헬레나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감히 자신하지만, 이번 교류전은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순간 사람들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 국가의 왕비가 그렇게 직접 누군가를 치하하는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으니까.

    한발 양보하여, 이미 예술적 안목이 높기로 유명했었던 서식스 공작은 그렇다 치더라도…….

    ‘왕비 전하께서는 브라이어튼 백작도 분명히 언급하셨어.’

    적어도 헬레나가 이네스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다.

    헬레나가 나긋하게 말을 맺었다.

    “이번 교류전에서 불철주야 고생했던 두 사람에게 큰 박수를 부탁합니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이네스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와 가장 비슷했던 감각은…….

    에녹의 미술전에서 처음으로 그녀의 존재를 인정받았을 때 느꼈던, 그 압도적인 만족감.

    ‘공작 각하가 아니었더라면, 평생 이런 감각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야만 했겠지.’

    그러고 보면, 그녀의 모든 긍정적인 변화는 에녹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나.

    이네스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에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녹은.

    “감사합니다. 다만 제 이름과 브라이어튼 백작의 이름이 같이 언급되는 건 부끄럽습니다.”

    이네스에게 공을 돌리며, 자신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응?’

    당황한 이네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에녹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번 교류전의 첫 발상은 모조리 브라이어튼 백작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발상을 확장했을 뿐이지요.”

    “고, 공작 각하.”

    “그러니 이 박수 또한, 온전히 브라이어튼 백작이 받아야 함이 마땅합니다.”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에, 이네스는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받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헬레나가 기품 있게 웃어 보였다.

    “그럼 즐거운 연회 되시기를.”

    그 말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에녹은 연회장의 다른 귀빈들을 접대하고, 이네스는 칼도로프의 사절단에게로 향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네스 브라이어튼입니다.”

    “아, 이번 교류전의 운영진이시군요.”

    “맞습니다. 이리 축하연에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별말씀을요. 저희야말로 이런 환대에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사절단의 반응도 꽤 호의적이었다.

    방긋 웃은 이네스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부디 이번 교류전을 통해, 랭커스터와 칼도로프 양국이 조금 더 발전적인 관계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동감입니다. 내일 교류전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한편 사람들은 능숙하게 칼도로프의 사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네스를 보며, 내심 놀란 얼굴이었다.

    “브라이어튼 백작, 예전에 비해 무척 많이 변한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타국의 사절단을 대하면서도 전혀 긴장하지를 않네요.”

    “그러고 보니 왕비 전하께서도 백작을 꽤 신뢰하고 계신다던데…….”

    “정말이지, 브라이어튼 백작가가 이렇게 삽시간에 부상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주변에서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소곤거리거나 말거나, 이네스는 사절단과의 대화에 열중할 따름이었다.

    사절단 대표가 호기심으로 두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면 백작께서는 수채화를 주로 그린다 하던데, 랭커스터의 주류는 유화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비주류도 한 사람쯤 있어야 장차 미술계가 다채로워지지 않을까요?”

    이네스의 재치 있는 대답에 대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그렇군요.”

    다만 그 훈훈한 분위기를 모두가 만족스러워하는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왕립예술협회에 소속된 기성 예술가들은, 이네스를 다소 떨떠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왕립예술협회의 예술가가 아니라,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서 한 것이다.

    전면 보이콧을 했으면 차라리 오지를 말 것을.

    그 와중에도 왕과 왕비는 물론이고, 외국의 귀빈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기회를 놓치기는 싫었던 것이다.

    아마 그들 스스로도 저들의 행동이 치졸하다는 건 아는지, 이네스에게 직접 다가오지는 않았으나.

    입만큼은 쉬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댔다.

    “정말로 이번 교류전이 잘 될까요?”

    “뭐, 왕비 전하께서 저리 호평하시기는 하는데…….”

    “그래도 한 번 봐야 알지요.”

    이네스를 곁눈질하는 눈동자 위로, 질투와 질시, 음험한 악의가 뒤섞여 반질거렸다.

    그들의 대화 사이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속내는, 사실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차라리 망하는 꼴을 보는 게 속 시원하겠군.’

    그리고 그런 악의를 품은 사람들 중에는, 물에 기름 떠다니듯 연회장에서 겉돌던 라이언도 있었다.

    ‘제기랄, 이네스가 저렇게 승승장구하는 꼴을 내 눈으로 봐야 한다니…….’

    라이언은 그야말로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 라이언은 혼자였다.

    애초에 왕가에서 고트 자작가에 배분해 준 초대장은 단 한 장뿐이었으니까.

    사실 라이언은 그 자체도 자존심이 상했다.

    ‘브라이어튼 백작가에서는 인원수에 제한 없이 초대장이 들어왔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야!’

    랭커스터 왕가가 고트 자작가와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중요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자체로도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는가.

    왕실 연회에 가문의 일원들 중 몇 명이 초대되는가.

    그 자체로 가문의 세력을 어림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이번에 고트 자작가에서는 고트 자작 영식 한 명만 참석했다면서요?’

    ‘어쩜, 예전에 브라이어튼 백작이었을 시절과는 너무 다르네요.’

    어쩔 수 없이 뒤에서 그런 은밀한 비웃음을 듣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라이언은 오늘 초대 대상도 아니었다.

    보통은 왕실 연회는 한 가문의 가주, 그리고 그 배우자가 참석하고는 하니까.

    다만.

    ‘어떻게든 이네스를 설득해 볼게, 응?’

    라이언이 부득불 참석하겠다고 우겨 댔다.

    ‘아니, 내가 도대체 널 어떻게 믿고?’

    고트 자작은 짜증스럽게 쏘아붙였으나, 결국 라이언에게 초대장을 양도했다.

    그래, 그나마 브라이어튼 백작이 예전에 너에게 껌뻑 죽기는 했었으니까.

    비록 일전에 잔뜩 술을 퍼마시고 이네스를 찾아갔다가 대차게 까이기는 했으나.

    이네스와의 관계 개선에 있어서는, 자신보다야 라이언이 조금이나마 승률이 높을 거라는 계산속이었다.

    하지만 그 소동을 벌이며 축하연에 참석했음에도, 여태까지 라이언은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했다.

    이네스가 수많은 귀족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던 탓이었다.

    ‘어떻게 여태까지 말 한마디조차 붙여 보지 못할 수가 있어!’

    그렇게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던 중.

    ‘잠깐.’

    순간 라이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문득 일전에 이네스와 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네스가 고트 자작가에 투자했던 투자금을 몽땅 회수했던 그날.

    고트 자작은 직접 선물을 준비해 이네스를 찾아갔었으나 허사였다.

    이네스가 자신이 보낸 선물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다며, 노발대발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그렇다면 이건 선물을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지 않나?’

    비록 치졸하다 한들, 이걸로 말을 붙여 볼 빌미는 되지 않은가.

    라이언이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좋아.’

    마침 이네스는 사절단을 포함한 다른 귀족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태.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든다 한들, 다른 사람의 눈을 고려해서라도 매몰차게 선을 긋지는 못할 터였다.

    그런 계산속으로, 라이언이 슬그머니 이네스에게 말을 붙였다.

    “이번에 브라이어튼 백작께서 교류전의 운영진으로 참여하셨다지요?”

    “…….”

    이네스는 떫은 얼굴로 라이언을 응시했다.

    하지만 라이언은 뻔뻔하게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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