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66)화 (66/120)

6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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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보고서가 완성되었다.

에녹과 이네스, 그리고 수많은 행정관들의 시간과 노력을 갈아 넣어서일까.

보고서는 그야말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완벽한 보고서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데.”

왕성의 내정을 보살피며, 수많은 궁내관을 거느린 헬레나마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에녹이 은근슬쩍 헬레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왕립예술협회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뭐, 예측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요.”

아마 왕립예술협회는 자신들이 자문에서 물러난다는 초강수를 두면, 왕가에서 알아서 굽히고 들어올 거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기는커녕 ‘그렇다면 왕립예술협회는 이번 교류전에서 완전히 빠지는 것으로 알겠다’라는 회신이 돌아오자, 상당히 당황했다고.

‘왕립예술협회 없이 교류전을 진행하겠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여태까지 그런 전례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저들이 자문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건 까맣게 잊었는지, 왕립예술협회 일원들은 펄펄 뛰었으나.

에녹은 말끔하게 그 반발을 무시해 버렸다.

헬레나는 비록 그런 에녹의 반응을 미심쩍어 했으나.

이미 이네스와 에녹 측에게 힘을 실어 주기로 한 상황이었으니, 더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그 후의 일정은 일사천리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일정은, 교류전이 열릴 화방 거리를 왕비가 직접 시찰하는 것이었는데.

“랭던에 이런 독특한 곳이 있었을 줄이야.”

화방 거리에 방문한 헬레나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이런 장소를 발굴해 내다니, 브라이어튼 백작이 큰 공을 세웠네요.”

“이곳은 평민 지구라서, 아마 왕비 전하께서 직접 오실 일은 거의 없었을 거예요.”

“고마워요. 이번 교류전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건 모조리 백작 덕택이에요.”

헬레나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정도면 왕립예술협회 앞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어도 되겠는데요?”

“……과찬이십니다.”

이네스는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 했으나, 내심 뿌듯했는지 양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에녹은 그런 이네스에게서 영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귀여울 수가 있지?’

어쩌겠는가.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것을.

한편 그런 두 사람의 묘한 기류를 유심히 관찰하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오호라.’

바로 왕비, 헬레나였다.

그녀는 반짝 두 눈을 빛내는가 싶더니.

“그건 그렇고, 이번 교류전 축하연에서는 두 사람이 파트너로 참석하는 건 어떤가 싶은데. 두 사람의 생각은 어때요?”

갑자기 폭탄 발언을 떨어뜨렸다.

“예?”

“네?”

이네스와 에녹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 모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왕비를 돌아보았다.

‘어째 놀란 표정까지 닮았는걸.’

왕비가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짓궂게 눈웃음을 지었다.

“왜, 두 사람은 이번 교류전의 운영진이잖아요.”

“그, 그렇기는 하지만.”

“그러니 축하연에서도 파트너가 되어서 함께 움직이라는 말이, 그렇게나 이상하게 들리나요?”

헬레나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편이 여러 일에 대처하기에도 훨씬 수월할 텐데요.”

이미 저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었는지, 헬레나의 말은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사실 당사자인 두 사람이 듣기에도 구구절절 옳은 말이기는 했다.

다만…….

‘어, 어떡하지?!’

이네스는 어찌할 바 몰라 하다가 에녹을 휙 돌아보았다.

혹여나 그녀만 에녹을 의식하는 거라면 어쩌나,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는데.

‘어라?’

순간 이네스가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평연했던 에녹 또한 드물게 당황하고 있었으니까.

‘각하께서는 이런 문제는 철저히 업무로만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만약 이네스를 전연 의식하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당황하는 기색을 보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사실이 다소 멋쩍으면서도 역시 기쁘다.

‘그래도 나와 파트너를 하는 게 싫은 기색은 아니니까, 다행이지?’

무심결에 그렇게 생각하던 이네스가 순간 바짝 어깨를 굳혔다.

‘……나, 언제부터 공작 각하의 표정 하나하나에 이렇게 일희일비하게 되었지?’

고요했던 호수에 조약돌 하나가 던져지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마음이 술렁거린다.

“하여간 파트너 문제는 생각해 보고 말해 줘요. 알았죠?”

헬레나는 그렇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두 사람의 마음을 헤집어 둔 채.

먼저 왕궁으로 돌아가 버렸다.

동시에 에녹이 조심스럽게 이네스에게 말을 붙였다.

“브라이어튼 백작.”

“네, 네?”

이네스가 파드득 놀라 에녹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에녹이 무겁게 입술을 떼었다.

“이번 축하연 파트너 문제는…… 왕비 전하께서 독단으로 제안하신 것일 뿐입니다.”

“아, 네. 알고 있어요.”

“그러니 부담스러우시다면 편히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

순간 이네스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에녹은 분명 이네스가 부담스러워할 것을 염려하여, 그녀를 배려하고 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여기서 가장 무난한 대답은…….

‘각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축하연 파트너는 각자 찾아보는 것으로 해요.’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

에녹이 모처럼 저렇게 제안해 주기도 하고, 자꾸만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라도.

에녹과의 거리는 최대한 멀리 두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왕비 전하께서 명령하신 거잖아.’

이네스는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헬레나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왜, 두 사람은 이번 교류회의 운영진이잖아요.’

‘그러니 축하연에서도 파트너가 되어서 함께 움직이라는 말이, 그렇게나 이상하게 들리나요?’

‘그편이 여러 일에 대처하기에도 훨씬 수월할 텐데요.’

……그래, 그편이 합리적이니까.

그렇게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예?”

뜻밖의 대답을 들은 에녹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이네스는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왕비 전하께서 직접 제안하신 건데,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왕비 전하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제가 따로 말씀드릴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에녹이 고지식하게 대답했다.

‘저 눈치 없는 남자가!’

이네스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뜨고 에녹을 노려보았다.

“아뇨!”

“……브라이어튼 백작?”

“파트너, 할게요.”

이네스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그 말씀은…….”

“이번 교류전을 위해서라면 그쯤이야 받아들일 수 있어요.”

사심 따위는 전혀 없다는 것처럼, 그러니 의심조차 말라는 것처럼.

이네스는 지레 못을 박았다.

에녹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예, 백작께서는 교류전을 위해 제안을 받아들여 주신 겁니다.”

“맞아요, 그런 거예요.”

이네스는 부러 새침하게 대답했다.

동시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달콤한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래도 기쁘군요.”

“…….”

“백작께서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신다니 말입니다.”

수려한 얼굴 위로 천천히 번지는 그 미소가 너무나도 눈이 부셨기에.

이네스는 마음속 깊은 곳에 품었던 의문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왕비 전하께서는 나와 공작 각하의 의견을 물으셨을 뿐, 전혀 강요하시지 않았어.’

그럼에도 왕비의 말을 핑계 삼아, 에녹의 파트너 제안을 받아들인 건 아닌지.

스스로에 대한 의심 말이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칼도로프의 사절단이 입국했다.

칼도로프에서도 이름 높은 예술가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는, 그야말로 호화로운 사절단이었다.

국왕 부부는 직접 그 사절단을 맞이했다.

“칼도로프에서 오신 사절단 여러분, 랭커스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랭커스터의 국왕 폐하, 그리고 왕비 전하께서 이리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 갔다.

이네스와 에녹은 국왕 부부의 바로 뒤편에 나란히 선 채, 사절단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오늘 일정은…… 교류전을 기념하는 축하연이었지.’

이네스는 앞으로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았다.

정식으로 교류전이 개최하는 건 내일이었다.

그리고 내일, 사절단을 수행하여 움직이는 것까지 에녹과 이네스가 전담하여 진행하기로 했다.

그 모든 과정을 떠올리던 이네스는…….

‘어떡해, 긴장돼서 죽을 것 같아.’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은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장갑을 낀 손안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진다.

그런데 그때.

에녹이 흘끗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

“…….”

이네스는 순간 호흡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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