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65)화 (65/120)
  • 65화

    주머니에 숨겨져 있던 송곳처럼 불쑥 튀어나온 여성 화가.

    심지어는 이네스가 처음 주목받게 된 이유조차, 남편의 부정행위를 폭로하며 제 재능을 증명한 것이었다.

    기성 예술가들에게 있어, 저런 폐단이 외부에 드러난 것 자체가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신분이 낮았더라면 어떻게든 짓밟아 치워 버렸을 텐데.

    이네스는 브라이어튼 백작가라는 명문가의 가주였고, 게다가 서식스 공작의 비호까지 받고 있었다.

    그러니 이미 기득권을 쥐고 있던 왕립예술협회에서 눈엣가시로 여기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동시에 에녹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미리 넣어 두었던 자문까지 거절한 겁니까?”

    “맞아요.”

    헬레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죠.”

    에녹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증명해 주죠.”

    “무엇을?”

    “교류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겸손을 떨었다고 하셨잖습니까.”

    에녹이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차가운 조소였다.

    “그 말 그대로, 교류전에서 아예 왕립예술협회의 존재를 지워 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까요?”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녹이 양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었다.

    “왜 안 됩니까?”

    “그래도 왕립예술협회는 지금껏 교류전을 진행해 온 주축이었는데…….”

    “글쎄요, 말로는 주축이라지만.”

    에녹이 신랄하게 답했다.

    “그 잘난 왕립예술협회에서 여태까지 교류전에서 거둬 온 성과는 무척 초라하지 않습니까?”

    “…….”

    “…….”

    이네스와 헬레나는 나란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에녹은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 듯싶었다.

    평소의 온화한 태도까지 모조리 집어치우고 빈정거리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별개로.

    ‘공작 각하의 말씀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냐.’

    이네스는 에녹의 말을 십분 납득했다.

    애초에 이네스가 운영진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물론 칼도로프에서 랭커스터의 보수적인 예술계를 은근히 아래로 낮춰 본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왕립예술협회가 최근 교류전에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에녹이 날 선 목소리로 되물었다.

    “게다가 왕립예술협회 소속 예술가가 아니라 해도, 랭커스터에 아예 예술가가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설마……?

    이네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제가 이번에 화방 거리를 방문하고, 여러모로 살펴본 바로는.”

    에녹이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쪽의 예술 세계는, 좋은 의미로 왕립예술협회의 엘리트 예술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예술이 생활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고 할까요? 특유의 매력이 있어요. 무척 흥미롭더군요.”

    주류인 왕립예술협회에 인정받지 못하는 비주류.

    자신의 예술을 팔아서 하루의 삶을 버텨 내는 ‘화방 거리’의 사람들.

    하지만 비주류라고 해서 무조건 무시당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또한 브라이어튼 백작이 말씀하셨던, ‘서로의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아, 네.”

    “그 기회를 어째서 왕립예술협회에게 주어야 합니까?”

    응?

    허를 찌르는 질문에, 이네스가 얼떨떨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에녹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들이 보이콧을 한다면, 이쪽에서도 그들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도록 하죠.”

    “그 말씀은…….”

    “왕립예술협회 소속 예술가들에게는 초대장도 생략하도록 해요.”

    놀란 토끼 눈이 된 두 여자 사이에서, 오로지 에녹만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이번 교류전은 화방 거리를 중심으로 진행할 생각이었으니, 처음의 진행 방향과 크게 다르지도 않아요.”

    “그래도 그건 너무 과격하지 않나요?”

    왕비, 헬레나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저는 화방 거리가 어떤 곳인지는 아직 잘 몰라요. 다만 서식스 공작의 방향대로 진행한다면…….”

    잠시 말끝을 흐리던 헬레나가 걱정스럽게 에녹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상당히 파격적인 교류전이 되리라는 건 알겠네요.”

    헬레나가 재차 에녹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건가요? 이러다가 교류전이 실패하기라도 하면, 왕가의 위엄에 큰 손상이 갈 거예요.”

    “예. 믿으셔도 됩니다.”

    에녹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이어튼 백작이 아이디어를 냈고, 제가 그 아이디어를 검증했습니다.”

    “서식스 공.”

    “저는 허투루 누군가의 재능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 양 담담한 목소리였다.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한숨을 푹 내쉬던 헬레나가, 밉지 않게 제 시동생을 흘겨보았다.

    “잘해요. 알았죠?”

    “물론입니다.”

    빙긋 웃으며 대꾸한 에녹이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브라이어튼 백작.”

    “네.”

    이네스가 자세를 바르게 하며 에녹과 시선을 마주쳤다.

    에녹이 힘을 주어 못을 박았다.

    “백작께서는 외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오로지 교류전에만 집중하세요. 대처는 제가 할 테니까요.”

    “아…….”

    이네스는 잠시 멍해졌다.

    그녀가 부담을 느낄까 봐, 그래서 계획한 바를 끝까지 펼쳐 내지 못할까 봐.

    섬세하게 신경 써 주는 에녹의 배려를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네스 또한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에녹의 기대에 부응할 수밖에.

    ❀ ❀ ❀

    그 후.

    이네스는 정말로 에녹의 말에만 따랐다.

    외부의 반응에는 일체 신경을 쓰지 않고, 교류전 준비에 집중했다는 뜻이다.

    매번 화방 거리에 직접 나가서 주변을 살피고, 화방 거리의 사람들에게 교류전 진행에 대한 동의를 얻으며, 본격적으로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특히 예산을 배분할 때에는 에녹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에녹은 정말 훌륭한 조력자여서,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화방 거리의 주민들에게 보상을 충분히 해 주어야 합니다.”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펜을 움켜쥐고 서류에 메모를 남겼다.

    <기존에 배정된 예산에서 최소 2배는 늘려야 한다.

    근거는 이러하다.

    첫째, 거주민들의 거주 공간인 화방 거리를 축제 용도로 대여하는 것이니, 그들의 생활에 지장이 가서는 안 된다.

    둘째, 단기적으로 거주민의 협조를 구하기에 수월한 것은 물론이고, 장기적으로 이런 일이 있을 때에 재차 협조를 구하기 용이해진다.

    셋째…….>

    예산을 늘려야 하는 근거까지 요모조모 적혀 있는 그 서류를 바라보며.

    ‘오늘도 행정관은 야근 좀 하겠는걸.’

    이네스는 그 서류를 처리해야 하는 휘하 행정관을 향해, 마음속으로 애도했다.

    예산을 두 배로 늘리기 위해서, 행정관은 오늘 하루 종일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할 테니까.

    이네스는 진심으로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께서 이번 일을 맡아 진행해 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 말에, 서류에 고정되었던 시선이 슬쩍 위로 올라왔다.

    명민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며, 이네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이번 교류전은, 여태까지 진행했던 행사와는 다소 다른 방식이잖아요?”

    “……백작.”

    “처음 해 보는 것이라 이래저래 난관이 많은데, 각하께서 곁에 계셔 주시지 않았더라면 분명 포기하고 말았을 거예요.”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정말 감사해요.”

    이네스의 그 말에, 에녹은 잠시 허를 찔린 것처럼 두 눈을 깜빡이는가 싶더니.

    “……그, 왕비 전하께 보고하려면 이쪽 예산도 보완해야 합니다.”

    짧게 헛기침을 하며 괜히 말을 돌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네스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부끄러워하시는 건가?’

    어쩐지 공작 각하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이는데.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이렇게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 줄이야. 아무래도 언제 시간을 내서 각하께 예산안 분배 방법을 배워야겠어요.”

    “…….”

    “어쩜 이렇게 못하는 게 없으세요? 저는 각하의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요.”

    뭐, 없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장난기가 돋은 이네스는 일부러 에녹을 계속해서 칭찬했다.

    그러자 에녹의 목덜미가 점점 더 붉어지는 게 아닌가?

    ‘아니, 정말로 부끄러워하시잖아?’

    이네스는 그만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공작 각하께서는 의외로 칭찬에 약하시군요?”

    그러자 에녹이 다소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항변했다.

    “항상 약한 건 아닙니다.”

    “그럼요?”

    “칭찬을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에 따라 반응이 다른 거지요.”

    그러자 이네스가 순진무구하게 되물었다.

    “그 말씀은 즉, 제가 칭찬하는 거라서 부끄러워하시는 거라고 해석해도 되는 건가요?”

    “……됐습니다.”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지는 느낌에, 에녹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풋.”

    동시에 이네스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녹이 미간을 좁히며 이네스를 노려보았다.

    “……꼭 그렇게까지 웃으셔야 합니까?”

    “아뇨, 놀리려거나 비웃으려는 뜻은 절대 아니었고요!”

    이네스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냥 각하께서도 이렇게 귀여운 면모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이네스는 살그머니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에는 여전히 채 감추지 못한 미소가 어려 있었기에.

    그런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이번만 봐드리는 겁니다.”

    결국 에녹 자신도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참 이상했다.

    그저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뿐인데도, 그 대화 상대가 이네스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한없이 유쾌해진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