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64)화 (64/120)
  • 64화

    이네스는 샐쭉한 낯으로 에녹을 흘겨보았으나, 더 타박하지는 않았다.

    “일단 제 목표는 일주일 동안 화방 거리의 사전 조사를 마치고, 보고서를 써서 왕비 전하께 올리는 거예요.”

    이네스가 펜을 곧추세우며 입을 열었다.

    “그 후에 배정받은 예산안에 맞춰서, 이번 교류전을 어느 정도의 규모로 할지를 계획해야 하는데…….”

    종알종알 말을 잇던 이네스가 순간 아차 하며 에녹을 바라보았다.

    “그, 혹시 제가 너무 제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충분히 합리적이니 걱정 마십시오.”

    고개를 가로저은 에녹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오히려 제가 이렇게 얹혀 가도 되는지 모르겠군요.”

    “음, 그건 용서해 드릴게요. 제가 교류전 운영진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건 공작 각하의 덕이니까요.”

    이네스 또한 농담으로 응수했다.

    피식 웃은 에녹이 질문을 던졌다.

    “어쨌든 그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요.”

    “음…… 그러니까,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흰 종이를 끌어당긴 이네스가 그 위에 커다랗게 ‘축제’라고 적었다.

    “저는 이번 교류전을 축제 느낌으로 진행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축제라는 단어 위로 마구 동그라미를 쳐 가며, 이네스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일률적으로 관람하게 하는 형식이 아니게 되겠죠.”

    그녀의 목소리에 어느새 열기가 서렸다.

    “예를 들면…… 한 연주가가 있다고 쳐요.”

    반짝 고개를 들어 올린 이네스가 에녹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 연주가가 길거리에서 음악을 연주한다면 어떻겠어요?”

    “글쎄요, 그 연주의 실력이 뛰어나다면 자연스럽게 관객들이 모여들겠죠?”

    하지만 이네스가 원하는 건 저런 원론적인 대답이 아닌 것 같았다.

    이네스가 재차 에녹을 채근했다.

    “그리고요?”

    “그리고…… 음, 교류전에 참가하는 예술가들은 연주자만 있는 건 아니니까…….”

    한참 고민하던 에녹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를 들어 그 근처에 무용가가 있다면,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거나 할 수도 있겠지요?”

    “바로 그거예요!”

    이네스가 신이 나서 외쳤다.

    “저는 각하께서 말씀하신 그런 것을 바라고 있어요. 예술가들이 서로 자유롭게 교류하고. 서로가 서로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요.”

    이네스가 즐거운 얼굴로 재잘거렸다.

    ‘흠.’

    에녹은 잠시 그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확실히 굉장한 볼거리가 될 것 같기는 하다.

    무엇보다도 교류전에 참석하는 예술가들은 각 나라에서도 고르고 고른 예술가들이니까.

    분명 그들이 펼치는 예술의 질도 뛰어날 터.

    “그렇군요. 자연스럽게 화방 거리에서 다양한 소규모 공연들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겠는걸요.”

    에녹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말을 이어 나갔다.

    “관객들도 내키는 대로 공연을 관람하거나,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금방 일어날 수도 있겠어요.”

    이네스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여 에녹의 말에 호응했다.

    그 반응 때문일까, 에녹은 조금 더 제 생각을 이야기할 마음이 났다.

    “예술가들도 좀 긴장되겠군요, 대중의 호불호를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꽤 독특한 풍경이 될 것 같…….”

    순간 에녹의 눈이 커졌다.

    ‘이렇게 허를 찌를 줄이야.’

    여태껏 공연과 예술이란 귀족들의 문화에 가까웠다.

    값비싸고, 고상하며, 소수만이 독점하고.

    웅장한 오페라 하우스, 고상한 연주회장, 혹은 발레 극장에서 격식을 차려 관람하는 고급스러운 것들.

    그 취미들을 누리는 것 자체가 상류층임을 증명한다.

    또한 그 예술가들을 평가하는 일은 평론가, 혹은 어렸을 적부터 예술적 교양을 쌓아 온 귀족들로 한정되며.

    일반인들은 문외한이라는 이유로, 예술을 평가하는 일에 당연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예술에 관해서는 상당히 깨어 있는 시각을 가진 에녹 스스로도,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할 정도였으니.

    랭커스터 국민들의 시각도 아마 에녹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여태까지 길거리 공연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소수의 아마추어들이 단발성으로 열었던 것에 그쳤죠.”

    진녹색 눈동자가 열의에 가득 차 반짝거렸다.

    에녹은 그런 이네스를 홀린 듯이 응시했다.

    ‘브라이어튼 백작은.’

    그런 문화 자체를,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누리며 누구든 자유롭게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누구든 접근이 용이한 곳에서, 무려 교류전에 초청된 프로들의 수준 높은 공연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거예요.”

    한편 이네스는 대화에 열중하느라, 에녹의 놀란 표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즐겁게 말을 이었다.

    “관객들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고, 무엇보다도 화방 거리의 아마추어 예술가들에게도 도움이 되겠죠.”

    잠시 어리둥절했던 것도 잠시.

    ‘아!’

    에녹의 눈이 커졌다.

    “그렇군요, 이 행사는 교류전이니까요.”

    “맞아요. 교류전은 각자의 예술적 사상에 대해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는 자리잖아요?”

    이네스가 씩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몸값 높은 프로들의 공연을 직접 보고 들으며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잖아요. 아마 화방 거리의 예술가들도 눈에 불을 켜고 오려고 할걸요?”

    그러고는 심술궂게 말을 덧붙인다.

    “왜, 칼도로프가 매번 하는 말 있잖아요? 랭커스터의 예술은 귀족들의 전유물이다, 우리는 그와 다르다.”

    이네스는 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고는, 가상의 자존심 강한 예술가를 흉내 냈다.

    그 후.

    그녀가 힘을 주어 말을 맺었다.

    “이번 교류전을 통해 우리도 칼도로프만큼, 아니, 칼도로프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자고요.”

    “…….”

    에녹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교류전은 엄연히 왕실과 귀족층이 주로 주도하는 상류층의 행사였다.

    하지만 이네스의 발상대로 진행하면, 정말로 신분이나 부유함을 가리지 않고 ‘화방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취향에 맞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신선하고…… 놀랍군.’

    이미 저 발상에 대해 몇 번이나 설명을 들었음에도, 계속해서 새롭게 느껴진다.

    “……물론 왕비 전하께서 납득하고 허락하실 수 있도록 보고서를 잘 써야 할 테고, 예산 또한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하겠지만요.”

    한편, 한참 열이 올라 이야기하던 이네스가 살그머니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내, 내가 너무 흥분했나?’

    뒤늦게 그런 자각이 들어서였다.

    동시에 에녹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너무 확언하시는 거 아니에요?”

    이네스가 멋쩍게 되물었다.

    “저도 굳이 따지면 아직까지는 구상만 있는 거라서, 실제 계획은 세워 봐야만…….”

    “아뇨, 백작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녹이 다시 한번 확고하게 대답했다.

    이네스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세요.”

    그 말을 덧붙이며, 에녹이 설핏 미소 지었다.

    “저 또한 백작을 도울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

    이네스는 홀린 듯이 에녹을 응시했다.

    순연한 신뢰만으로 가득 차 있는, 저 아름다운 눈동자.

    푸른 시선 안에 갇힌 것만 같다.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아, 역시.’

    이네스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생각했다.

    ‘나, 공작 각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그저 가벼운 호의로 건넨 말 한마디에 이렇게나 가슴속이 헝클어질 리 없으니까.

    “……네.”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인 이네스가 눈매를 휘어 보였다.

    “공작 각하께서 하신 말씀이니, 믿어요.”

    그 대답에, 에녹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 선명한 미소가, 눈 안에 도장이라도 찍힌 양 오래오래 남아서.

    이네스는 못내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그때.

    똑똑똑.

    짧은 노크와 함께 행정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가?”

    “저, 서식스 공작 각하. 그리고 브라이어튼 백작님.”

    행정관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왕비 전하께서 두 분을 급히 찾으십니다.”

    “……우리를? 지금 당장?”

    “예.”

    에녹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왔어요?”

    두 사람을 돌아보는 헬레나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러고는 폭탄을 떨어뜨린다.

    “왕립예술협회에서 이번 교류전에 참여하지 않겠노라고 전해 왔어요.”

    “네? 그게 무슨…….”

    놀란 이네스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머리가 아픈지, 헬레나가 지그시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보이콧을 하겠다는 소리 같아요.”

    “……어째서인가요?”

    “표면적인 이유야 뭐, 자신들이 교류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며 겸손을 떨었죠. 하지만 진짜 이유는…….”

    헬레나의 시선이 흘끗 이네스에게로 가 닿았다.

    이네스가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저 때문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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