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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63)화 (63/120)
  • 63화

    하지만 아직 그 누구도 대놓고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반발하지는 못했다.

    왕비도 그렇거니와, 왕국 예술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서식스 공작까지도 백작을 완전히 믿고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말문을 열었던 사내가, 시가 연기를 뿜어내며 비꼬듯 말을 덧붙였다.

    “뭐, 어쨌든 지금까지는 백작가에 이래저래 호재만 겹치는군요.”

    브라이어튼 백작가는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였지만, 이네스의 부모인 선대 백작 부부가 세상을 뜬 이래로 사회 전면에 나온 적이 없었다.

    유일한 상속녀였던 이네스는 라이언과 결혼한 이후 외부 활동을 삼갔었고.

    이네스와 결혼하여 브라이어튼 백작 작위를 이었던 라이언은, 고트 자작가의 이권을 챙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이네스가 왕비를 도와 교류전을 진행하게 되면서, 브라이어튼 백작가도 다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클럽에 모여 있던 신사들이, 곁에 앉은 두툼한 몸집의 중년 사내를 채근했다.

    “이대로 가만히 계실 겁니까, 어셔 후작님?!”

    “맞습니다. 교류전은 본디 유서 깊은 왕립예술협회에서 진행해 왔던 행사잖습니까?”

    제게 쏠리는 화살에, 어셔 후작이 입 안으로 끙 앓는 소리를 뱉었다.

    어셔 후작.

    그는 왕립예술협회의 회장이자, 왕국에서도 꽤 명망 높은 귀족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어셔 후작이 랭커스터 귀족 예술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한들, 이 상황에서 대놓고 왕가에게 운영진 인사에 문제가 있노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문제는, 교류전의 운영진을 지정하는 권리는 왕가에서 가지고 있다는 거지요.”

    어셔 후작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의자에 푹 몸을 기댔다.

    “운영진에서 브라이어튼 백작을 빼 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어요. 자칫 잘못하다가는 왕가에 대한 항명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만 합니까?”

    귀족 중 한 명이 발끈했다.

    그러자 어셔 후작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누가 가만히 있으라 했습니까?”

    “……설마, 후작께서 뭔가 혜안이 있으신 겁니까?”

    “왕실에서 이번 교류전을 중히 여기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왕립예술협회를 운영진으로 선택했어야지요.”

    사실 왕실은 이번 교류전에서 왕립예술협회를 배제하지 않았다.

    이네스를 운영진으로 선택하기에 앞서, 왕립예술협회에게 자문을 구했던 것이다.

    여태까지 교류전을 치러 왔던 왕립예술협회를 존중하는 의미에서였다.

    그러나 어셔 후작은 그 부분을 입에 담는 대신, 신사들을 은근슬쩍 부추겼다.

    “왕립예술협회 대신, 경험이 일천한 브라이어튼 백작을 선택한다는 건…….”

    주변을 커다랗게 휘둘러본 어셔 후작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어찌 보면 우리를 향한 모욕 아니겠습니까?”

    어셔 후작이 씩 눈매를 접어 내렸다.

    음험한 미소였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행동해야겠지요.”

    “행동이라면, 어떤…….”

    “이번 교류전.”

    어셔 후작이 두 눈을 빛냈다.

    “보이콧합시다.”

    ❀ ❀ ❀

    한편 사람들이 뒤에서 무어라 떠들어 대든, 이네스는 교류전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왕궁에 마련된 커다란 회의실 안.

    이네스와 에녹은 나란히 앉아 서류들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널찍한 6인용 책상 위로는 화방 거리의 전체 조감도와 자세한 지도, 펜 따위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그 광경 자체가 그들이 얼마나 격무에 시달리는지를 증명했다.

    “교류전까지 약 두 달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네스가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주어진 시간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고, 무엇보다도 이네스는 이번 교류전을 진심으로 성공시키고 싶었다.

    ‘이번 교류전은 정말 잘 해내야 해.’

    사실 교류전을 성공시킴으로써 그녀 자신이 얻는 이득도 이득이지만, 에녹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훨씬 더 컸다.

    ‘게다가 왕비 전하께서도 이번 교류전에 큰 기대를 걸고 계신 것 같고 말이야.’

    그도 그럴 것이, 왕비는 이번 교류전을 위해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편히 말해요.’

    왕비, 헬레나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그리고 헬레나는 자신의 말을 철저하게 지켰다.

    예산안 승인은 물론이고, 그들의 업무를 도울 행정관들까지 배치해 준 것이다.

    그리고 그 행정관들은 벌써 3일째 철야 중이었다.

    서식스 공작과 브라이어튼 백작이 퇴궁할 생각을 안 하니, 자연스럽게 휘하의 행정관들도 퇴근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좋아, 좀 더 열심히 하자.’

    이네스가 그렇게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행정관들이 알면 통곡을 할 생각을 하던 중.

    그녀는 문득 에녹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진녹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곁의 에녹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 얼굴이었으니까.

    더 정확히는 오늘 자 엘튼지를 확인한 이후부터 묘하게 누그러진 기색이었는데…….

    ‘신문에는 별다른 내용은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네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엘튼지의 메인 기사는 왕비가 교류전 개최를 발표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교류전에 관한 사안은, 이네스와 에녹 입장에서는 왕비에게 미리 전달받아 알고 있었지 않은가.

    그러니 굳이 그 기사에 영향을 받을 이유가 없는데?

    “공작 각하,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글쎄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으나, 에녹은 애매모호한 답만을 내어놓을 따름이었다.

    이네스가 와락 미간을 좁혔다.

    ‘어째 글쎄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치고는…….’

    입술에 서린 미소가 더더욱 짙어지고 있지 않은가.

    ‘이거 뭔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때.

    “그래도 기분 좋을 이유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에녹이 이네스를 돌아보며 짓궂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브라이어튼 백작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요.”

    “…….”

    순간 이네스는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라며 평범한 일상 이야기를 하는 듯.

    그저 평연한 목소리였다.

    ‘아마 공작 각하께서는…… 별다른 의미 없이 저렇게 말씀하신 것일 텐데.’

    그런데도.

    이네스는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또 한 번 일일이 휘말리고 마는 것이다.

    ‘정신 좀 차려, 이네스.’

    그녀가 입 안의 부드러운 살갗을 지그시 깨물었다.

    ‘업무에 집중하지는 못할망정, 별것도 아닌 말로 이렇게 사사건건 설레면 어떡해?’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은 이네스가 매끄럽게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께서 저와 보내는 시간을 그렇게 귀히 여겨 주신다니, 정말 기쁘네요.”

    진녹색 눈동자가 말끄러미 에녹을 마주 보는가 싶더니, 생긋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공작 각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업무에 충실해야겠죠?”

    그 말과 함께, 이네스는 서류들을 책상 위로 늘어놓았다.

    사각사각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울렸다.

    “일단 이번 교류전에서 저희가 중점적으로 살펴야 할 부분은, 제가 생각하기로는…….”

    “…….”

    에녹은 그런 이네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네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그는 현재 도무지 업무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좀.’

    차창 너머로 눈부시게 부서져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머리카락 한 올조차 흘러내리지 않도록 꼼꼼하게 틀어 올린 다갈색 머리채 위로 흩어져 반짝거렸다.

    서류에 온통 집중하여 반짝이는 진녹색 눈동자와, 바쁘게 움직이며 자신이 떠올린 발상들을 메모하는 새하얀 손.

    열의에 가득 찬 저 모습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

    자꾸만 마음이 수런거렸다.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 역시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기에.

    그저 에녹은 이네스의 저 열정적인 모습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브라이어튼 백작을 적대하는 사람들을 차근차근 배제해야 하는데…….’

    순간 짙푸른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건 그렇고, 최근 제이슨 남작 영애는 계속 두문불출하고 있다지.’

    에녹이 오늘 자 엘튼지를 확인하고 기분이 좋은 연유도 여기에 있었다.

    샬럿은 여태껏 이네스를 사교계에 진출하는 발판으로 이용했었다.

    게다가 딱 보기에도 사교계에 관한 욕심도 상당해 보였으니, 오늘 자 기사가 상당히 뼈아프게 다가오기는 할 터.

    이네스는 왕비와 직접 교류할 정도로 사교계의 중심으로 다가간 반면, 샬럿은 이제 사교계에서 거의 퇴출되기 직전 아닌가.

    이 정도면 이네스의 뺨을 때렸던 것에 대한 앙갚음은 될 것 같다.

    ‘나, 조금 유치한가.’

    그렇게 생각하던 에녹이 미간을 좁히며 쓴웃음을 지었다.

    상관없다.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제가 이네스에게 가진 호감이 상당히 크기는 한가 보다.

    어쨌든 에녹은 이네스를 향한 공격을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이네스가 부담스러워할 것을 고려하여,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기울여야 할 테지만.

    그런데 그때.

    “공작 각하?”

    뾰로통한 목소리가 에녹을 불렀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에녹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이네스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 브라이어튼 백작?”

    그러자 이네스가 미간을 좁히며 펜을 까닥였다.

    “공작 각하, 조금만 집중해 주시겠어요?”

    “음, 죄송합니다.”

    에녹은 머쓱한 얼굴이 되어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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