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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62)화 (62/120)

62화

❀ ❀ ❀

그 후.

교류전에 관련한 소식들이 엘튼지에 대서특필되었다.

그중 사람들의 이목을 가장 집중시킨 건, 브라이어튼 백작이 교류전 운영진에 합류한다는 기사였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기절할 것처럼 놀란 라이언이, 오늘 자 신문을 움켜쥐며 언성을 높였다.

두 눈을 부라린 라이언이, 엘튼지의 가장 상단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머리기사를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칼도로프와의 교류전 확정! 왕비 전하께서 직접 운영진으로 브라이어튼 백작을 지목하다!

금일 왕비 전하께서 칼도로프와의 교류전이 열린다는 사실을 전격적으로 발표하셨다.

왕비 전하께서 직접 교류전을 주최하시며, 서식스 공작과 브라이어튼 백작이 왕비 전하를 돕는 운영진으로 참여하기로 결정되었다.

왕립예술협회는 브라이어튼 백작의 성과에 의문을 표하였으나, 왕비 전하께서는 단박에 그를 일축하셨으며…….>

그렇게 글자 한 자, 한 자를 씹어 먹듯 기사를 읽어 내려간 끝에.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라이언의 입술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네스가 교류전의 운영진이라고?!”

신문을 움켜쥔 손아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최소한 랭커스터 왕가가 이번 교류전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무려 왕비 헬레나가 직접 주도하여 교류전을 열 정도이니까.

그리고 교류전의 운영진으로 이네스가 발탁되었다.

여태껏 교류전에 여류 화가가 운영진으로 참가한 전적이 없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네스가 운영진이 된 것 자체가, 현 왕가가 그녀를 얼마나 중요한 예술가로 여기는지를 증명한다.

“내가, 내가 이네스와 이혼만 하지 않았더라면……!”

라이언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만약 이네스를 아직도 제 곁에 붙들어 놓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라이언은 스스로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움켜쥘 수 있었을 것이다.

명성과 왕가의 총애, 사람들의 선망까지.

모조리 말이다.

천재 화가이자 사교계의 총아였던 브라이어튼 백작은 능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라이언이 처한 현실은 어떠한가.

“나는 아직도 밖에 얼굴조차 내밀지 못하는데,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데…… 이네스는!”

분을 이기지 못한 라이언이 빠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여태껏 누려 왔던 모든 걸 잃은 것만으로도 뼈가 아픈데, 거기다 더 큰 문제는.

“……이대로라면 우리 집안에 너무 타격이 커.”

라이언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이네스가 고트 자작가에게 투자하던 투자금을 모두 거둬들인 지 고작 이주일.

그 짧은 시간 동안, 고트 자작가는 자신들이 얼마나 브라이어튼 백작가에 기생하여 살아가고 있었는지 실시간으로 깨닫고 있었다.

간신히 고트 자작가의 영지까지 팔아넘기지는 않았지만, 당장 모자란 자금을 막기 위해서 자작가의 건물들은 이미 몇 채 팔아넘긴 상태.

이네스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만만하게 브라이어튼 타운하우스로 떠났던 형이 씩씩거리며 돌아왔던 모습이 아직도 시야에 선했다.

그리고 형의 초조한 목소리도.

‘이네스, 그 계집이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고트 자작은 어떻게든 사업체를 건사하려 애를 썼으나 전혀 소용없었다.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고트 자작 가문의 사업체는 점점 무너지는 중이었다.

고트 자작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업체를 구제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으나, 모조리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라이언!’

쾅!

부서져라 문이 열렸다.

고트 자작은 술에 절어 잠들어 있던 라이언의 멱살을 와락 붙들고 끌어 올렸다.

‘콜록!’

숨이 턱 막히는 감각에, 라이언이 마구 발버둥을 쳤다.

‘컥, 컥! 형, 이게 무슨……!’

‘어떻게 좀 해 봐, 그 계집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다!’

제 동생을 마구 흔들어 대는 자작의 눈동자는 거의 광기에 절어 반들거렸다.

‘벌써 사업체 하나는 폐업 수순을 밟았어. 이러다가는 정말로 사업 전체가 파산할 위기란 말이다!’

‘이, 일단 이 손 좀 놓고……!’

‘이따위로 술이나 퍼먹고 퍼질러 누워 있을 때가 아니라고!’

그 비명 같은 목소리가 아직도 귓속에 맴돌고 있었다.

언제나 제 머리 꼭대기에 올라간 것처럼 굴었던 형이, 저렇게 절박한 모습을 보였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제기랄.”

이제 손에 움켜쥔 신문은 원래 형태를 잃고 구겨져 있었다.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최대한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게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업체가 망할까?’

설마, 설마 하면서 상황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트 자작가의 부동산이며 현물 재산들이 하나둘씩 처분되고, 형과 어머니의 얼굴에 점차 수심이 깊어지면서.

라이언도 점차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네스와 재결합해야만 해, 그러지 않으면……!”

하지만 도무지 방법이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이네스는 계속 라이언에게 냉랭할뿐더러, 심지어는 샬럿 때문에 일이 더욱 꼬인 상황.

“제기랄!”

라이언은 미칠 것 같은 기분으로, 구겨진 신문 뭉치를 바닥에 내던졌다.

“젠장, 젠장……!”

그로도 모자라 쿵쿵거리며 신문 뭉치를 마구 짓밟아 댄다.

하지만 답답한 속은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한편, 그 시각.

오늘 자 엘튼지를 확인하고 눈이 뒤집어진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으니.

“아아악!”

그 사람은 바로 샬럿이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그녀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네스, 그 계집애가 도대체 뭐라고!!”

자신은 이렇게 쓰레기처럼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데, 이네스는 매번 승승장구하고 있지 않은가!

“뭐? 교류전의 운영진? 운영지이인?!”

머리에 뜨겁게 열이 올랐다.

샬럿은 도끼눈을 뜨고 신문을 노려보았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섬세한 세밀화가 눈에 들어왔다.

환하게 웃고 있는 왕비와, 그 곁에 선 에녹과 이네스.

그림 속 그들이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싫어, 싫다고!”

샬럿은 그만 참지 못하고 신문을 갈기갈기 찢어 내던져 버렸다.

신문 조각들이 눈처럼 새하얗게 주변에 쏟아져 내린다.

“왕비 전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야, 이네스 그 계집애와 독대를 하셨다니!!”

샬럿이 이렇게까지 분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왕족과의 독대 자체가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왕족이 상대를 인정한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자면.

현 랭커스터 사교계의 중심인 왕비가 누군가를 곁에 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교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단숨에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속된 말로, 왕비의 선택을 받은 자가 ‘사교계의 명사’가 된다는 거다.

그리고 샬럿은 언제나 사교계의 여왕이 되기를 바라 왔었다.

“나는, 나는 단 한 번도……!”

왕비와의 독대는커녕, 제대로 대화조차 나누어 본 적이 없는데!

분노와 막막함이 눈앞을 새하얗게 불태워서, 샬럿은 파들파들 어깨를 떨었다.

위컴 남작부인의 티타임 후.

샬럿은 수많은 사교계 모임들 중, 그 어느 곳에서도 초대받지 못했다.

모든 귀부인들은 샬럿이 흡사 역병 환자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슬슬 피해 다녔다.

염치 불고하고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교계 모임에도 얼굴을 들이밀어 봤으나, 싸늘한 반응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저만 제이슨 남작 영애가 불편한가요?’

‘저도 그래요. 우리를 무시할 때는 언제고…….’

‘평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면서, 왜 자꾸 친한 척하는 거예요?’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잖아요, 저건.’

한때 샬럿과 친해지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던 사람들도, 샬럿에게 호감을 보였던 남자들까지도 일제히 연락을 끊었다.

심지어는 라이언까지도 이네스의 눈치를 보느라 샬럿의 연락을 묵살하는 중인데…….

“다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샬럿은 다시 한번 비명을 내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여전히 처참했다.

❀ ❀ ❀

한편 이네스의 교류전 참가는 사회 각지에서 여러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으로 기성 예술가들이 모인 왕립예술협회가 있었다.

시가 연기가 매캐하게 차 있는 클럽 안.

“아무리 왕비 전하께서 브라이어튼 백작을 믿고 계신다지만, 교류전은 양 국가 사이의 커다란 행사 아니오?”

신사 중 한 명이 볼멘소리로 그렇게 운을 떼자, 다른 신사들도 벌떼처럼 그 말에 동조했다.

“맞습니다. 물론 백작의 예술적 재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뭐, 백작이 여태껏 사회생활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건 사실이잖습니까?”

“여태껏 집 안에 들어앉아서 안살림만 보살폈을 뿐인데요.”

“왕비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여 행사를 진행할 수 있을지, 영 의심스럽습니다.”

그에 더하여, 이네스가 제시했던 교류전 방식에 대한 불만도 튀어나왔다.

“게다가 이번 교류전은 축제 형식으로 진행된다지요?”

“이것 참, 귀빈들을 모시기에는 너무 격의가 없는 것 아닙니까?”

“다들 이번 교류전에 거는 기대가 큰 것 같은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백작의 입지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아요.”

“혹여 칼도로프의 사신단이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수많은 수사, 그리고 걱정을 가장한 견제의 말들.

그 모든 것들을 걷어 내고 노골적인 본심만 표현하자면 대충 이러했다.

‘여자인 브라이어튼 백작이, 남성들의 영역이었던 교류전에서 활약하는 게 아니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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