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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61)화 (61/120)

61화

“형님께서도 왕비 전하께 이미 들어서 아실 텐데요.”

왕과 왕비 부부의 금슬은 무척 좋았고, 왕비가 아는 건 왕의 귀에도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

도리어 에녹이 당당하게 되물었다.

“형님께서도 내심 확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백작의 발상 그대로만 진행한다면 교류전은 성공적일 거라고요.”

“뭐…… 신선한 발상이라고는 생각해.”

에드워드는 다소 분한 얼굴로 대꾸했다.

“화방 거리라니, 그 장소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솔직히 허를 찔린 건 사실이었다.

화방 거리는 평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으니까.

평생을 왕족으로 살아온 에드워드가 곧바로 떠올리지 못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왕인데.’

브라이어튼 백작이 그 장소의 가치를 먼저 알아봤다는 사실이 못내 분하면서도.

사실 조금은 백작에게 고맙기도 했다.

‘평민 지구에까지 관심을 가지는 귀족은 드문데.’

심지어 브라이어튼 백작은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의 가주이지 않은가.

내 나라의 장점을 유심히 살펴보며 기억하고 있다가, 시의적절한 도움을 주는데 기특하지 않을 리가.

에드워드가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화방 거리라. 랭던 외곽에 형성되어 있다는 건 아는데…… 여태껏 실제로 방문해 본 적이 없군.”

“저도 백작 덕택에 이번에 처음 가 봤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에녹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글쎄요,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 어떤 생각을 했는데?”

“저는 왕족이고, 당연히 내 나라의 구석구석을 잘 알아야 함에도.”

에녹의 목소리는 어느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가 모르는 장소가 참 많다고 느꼈습니다.”

“흐음.”

“제 무지함을 반성하게 되더군요.”

에녹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런 제 동생을 빤히 바라보던 에드워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적어도 브라이어튼 백작이 네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건 인정해야겠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야, 내가 아는 너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라고는 한 톨도 주지 않던 녀석이었는데.”

순간 에녹은 말문이 턱 막혔다.

에드워드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네가 먼저 주변에 관심을 갖는 거, 이번이 처음이잖아?”

“…….”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모든 것에 무관심하게 굴었다.

하나뿐인 소중한 형과 왕위 문제로 대립하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에녹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들에게 욕심을 불러일으켰으니까.

‘내가 지지하는 왕자가 왕위를 차지한다면, 나도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욕심 말이다.

에녹은 사람들의 그 욕심이 그야말로 지긋지긋했다.

그랬기에 더더욱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고.

그렇게 십 년 가까이 살아가다 보니, 특유의 무심함이 몸에 배게 되었다.

에드워드와 헬레나가 그런 자신을 걱정하는 건 알고는 있었으나.

차라리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사는 게 낫다고, 그편이 훨씬 더 편하다고 여겼었는데…….

‘어쩐지 지금은 좀…… 다른 것 같아.’

누군가에게 온 신경이 쏠리는 감각.

자꾸만 마음이 갈팡질팡하고, 흔들리며,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그녀의 미소 하나에 온 세상이 밝아지는 그 느낌은.

솔직히.

‘나쁘지 않아.’

동시에 에드워드가 씩 웃었다.

“그거 알아? 너는 브라이어튼 백작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항상 멍청한 표정을 짓더라.”

에녹은 그만 질색하고 말았다.

“꼭 그렇게 저급한 어휘로 제 표정을 묘사하셔야만 하겠습니까?”

“이거 봐, 내 표현에 화를 낼지언정 내 말을 부정하지는 않잖아.”

에드워드가 재차 얄밉게 되물었다.

“너도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

“…….”

정곡을 찔렸다.

차라리 여기서는 말을 아끼는 게 나을 것 같았으므로, 에녹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에드워드는 더 놀릴까 하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뭐, 어쨌거나 저 녀석도 스스로의 감정을 웬만큼 눈치챈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 들쑤시고 지켜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하, 나처럼 관대한 형도 없어.’

에드워드는 속으로 스스로의 관대함을 자화자찬했다.

❀ ❀ ❀

시간이 흘러,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각.

헬레나와의 티타임을 끝마친 이네스는,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대기시켜 둔 마차를 타러 가기 위함이었다.

‘그러고 보면 왕비 전하께서는 내 이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셨었지.’

이네스는 오늘 있었던 왕비와의 대화를 되새겨 보았다.

혹여 헬레나가 그녀의 이혼에 대해 물으면 어떡하나, 왕비가 그녀의 이혼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의외로 헬레나는 아예 이혼에 관한 화제 자체를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이네스의 예술적 성취에만 관심을 보였다.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서식스 공작이 백작에게 거는 기대가 큰 만큼, 나 또한 백작에게 거는 기대가 있다는 건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헬레나의 그 말이 문득 떠올랐다.

동시에 다시 에녹에게로 온 신경이 쏠렸다.

‘공작 각하께…… 엘튼지가 그런 의미인 줄은 전혀 몰랐어.’

그런 사연을 듣고 나니, 새삼스럽게 자신이 에녹에게 얼마나 무리한 부탁을 했는지 알 것 같다.

진녹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런데도 내 부탁을 들어주셨었지.’

에녹이 그녀에게 보여 준 다정함에 어쩐지 가슴이 아렸다.

그의 다정함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리고.

자칫 에녹의 다정함에 흔들렸다가, 그와 그녀 양쪽에게 큰 상처를 입힐까 봐 두려워서…….

‘또, 또!’

순간 이네스가 스스로를 질책했다.

‘그새 또 공작 각하 생각만 하고 있네, 정말!’

그런데 그때.

“브라이어튼 백작.”

……내가 공작 각하에 대한 생각에 너무 과하게 몰입해 있는 건가?

어째 환청까지 들리는 것 같네?

“백작.”

“…….”

“백작,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제야 화들짝 놀란 이네스가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고, 공작 각하?!”

“예, 접니다.”

에녹이었다.

이네스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두 눈을 깜빡였다.

“공작 각하? 먼저 타운하우스로 돌아가셨을 줄 알았는데요.”

“음…… 그러니까.”

별다를 것도 없는 질문이었는데, 에녹의 대답이 이상하게 늦는 것 같다.

그러고도 한참을 머뭇거리던 에녹이 입을 열었다.

“그냥 퇴궁하는 건 조금 아쉽게 느껴지더군요.”

“어, 왜요?”

“브라이어튼 백작과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어, 그러니까.

이네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나 때문에?’

눈앞의 에녹은 다소 민망한 얼굴이었다.

“얼굴을 뵙고, 직접 인사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역시 부담스러우실지요?”

“음, 아뇨.”

잠시 멍해졌던 것도 잠시.

이네스는 이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저야말로 감사 인사를 드려야지요. 교류전에 참가하게 해 주셨잖아요?”

“그건 백작의 발상이 훌륭해서 그런 거지요.”

“하지만 그 발상을 왕비 전하께 전달해 주시고, 저를 추천해 주신 건 공작 각하잖아요.”

그러던 중.

이네스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흐려졌다.

아마 라이언이었다면 어땠을까?

애초에 저 아이디어를 왕비에게 전해 주기는커녕,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며 공로를 가로챘을 터.

순간 이네스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막막해졌다.

‘……이제 라이언은 그만 떠올리고 싶은데.’

나는 왜 아직도 라이언의 그림자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지.

한편 에녹은 이네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녀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아마 고트 자작 영식 때문이겠지.’

에녹은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미 이혼 소송을 성공리에 끝마쳤고, 라이언과 이네스는 이제 남남이 되었음에도.

이네스는 가끔 저렇게 먹먹한 얼굴을 하고는 한다.

결혼 생활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마도 어쩔 수 없이 라이언의 행적을 되새기게 되는 거겠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브라이어튼 백작이…… 다른 남자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싫어.’

그게 솔직한 본심이었다.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안다, 하지만.

이네스와 관련될 때만큼은 이성이 느슨해지고 만다.

에녹은 가만히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고트 자작 영식에 대해, 이쪽에서 먼저 언급하는 게 불쾌할 수도 있으니까.’

섣부른 위로는 가끔 의도치 않게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그리하여 에녹은 괜히 라이언에 대한 말을 꺼내는 대신, 부드럽게 화제를 전환하는 쪽을 택했다.

“어쨌든 이번에도 또 한 번 백작과 협업하게 되었군요.”

일전의 미술전과 이혼 소송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네스는 금방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게요. 각하와 함께 일할 수 있어서 기뻐요.”

“동감입니다.”

싱긋 웃은 에녹이, 악수를 청하려 이네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이네스는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가족을 돌보며 가정을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랭커스터.

하지만 에녹은 언제나 그녀를 파트너로 생각하고, 동등하게 대해 준다.

그 사실이 못내 기뻐서.

이네스는 에녹의 손을 굳게 맞잡고, 비 갠 하늘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에녹은 이네스의 미소가 그야말로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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