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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60)화 (60/120)

60화

헬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잠깐 옛날이야기를 하자면, 서식스 공작은 뭐랄까…… 그래요, 어렸을 적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이었어요.”

“공작께서는 워낙에 뛰어난 분이시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뛰어나다는 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랍니다.”

헬레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낯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서식스 공작이 워낙에 출중하다 보니, 현 국왕 폐하가 아닌 공작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건 어떠하냐는 여론이 형성되었어요.”

“…….”

이네스는 무척 놀란 기색이었으나, 그에 함부로 말을 얹지는 않았다.

그리고 헬레나는 이네스의 그런 신중함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선대 국왕 부부께서는 두 왕자의 분열을 바라지 않았고, 현 국왕 폐하께서 왕위를 잇게 하려는 의지 또한 확고하셨기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헬레나의 입술 사이로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마 그 상황 자체가, 어린 서식스 공작에게는 무척 부담스럽게 다가왔을 테지요.”

헬레나는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그녀 나이 열다섯 살 때, 그녀의 약혼자였던 에드워드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책봉식에 참석하면서, 헬레나는 에녹을 처음 만났다.

어른이 입기에도 무척 불편해 보이는 화려한 예복을 걸친 채, 얌전히 서 있던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

‘형님께서 왕세자로 책봉 받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이의 말간 얼굴에는 그야말로 안도한 기색이 가득했다.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하듯, 나지막하게 속삭이던 그 앳된 목소리.

‘저는 왕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왕자님.’

‘……그러니 형님께서도 저를 싫어하시지는 않겠지요?’

형에게 미움받을까 못내 두려워하는 그 자그마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연했다.

하지만 에녹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고, 에녹은 더더욱 사람들의 눈을 피해 칩거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달리기를 몇 년.

에녹의 감정은 계속해서 메말라 갔다.

그리하여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에녹은 감정이 옅고 무심한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다.

감정 표현이 풍부한 제 형, 에드워드와는 다르게 말이다.

한편 헬레나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이네스는, 문득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렇다면, 서식스 공작께서 엘튼지의 사주가 되신 것도…….”

“맞아요. 자신이 왕권에 전혀 관심이 없음을 피력하기 위해서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헬레나가 찻물로 목을 축였다.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은 찻물이 씁쓸한 뒷맛을 입 안에 남겼다.

“실제로 엘튼지에 관심을 쏟게 되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꽤 줄어들었어요. 적어도 정치권 인사들의 접근은 거의 사라졌다고 하죠.”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일까, 서식스 공작은 아닌 척해도 엘튼사를 꽤 소중하게 여겨요.”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헬레나가 여유롭게 이네스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그 엘튼지에, 브라이어튼 백작에 관한 기사를 몇 번이나 실어줬잖아요?”

순간 이네스가 어깨를 움찔 굳혔다.

헬레나는 부드럽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물론 교차 검증을 통해, 확실한 내용의 기사만을 싣기는 했을 테지만요.”

“그, 그건.”

“그 자체가, 서식스 공작에게 있어 브라이어튼 백작이 의미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다시 한번 붉게 달아오르는 이네스의 얼굴을 마주하며, 헬레나는 짓궂게 말을 맺었다.

“그 ‘특별함’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완전무결.

에녹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였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언제나 평연하다.

사실 왕족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자질이었다.

에녹이 가진 침착함과 철두철미한 판단력은 자연스럽게 주변이 그를 경외하게 하니까.

하지만.

‘……어렸을 적에도, 지금도. 그 애는 단 한 번도 즐거워 보였던 적이 없었지.’

그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고.

흠잡을 데 없이 예의 바르며, 상대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으려 몸가짐을 조심하지만…….

그 정중함은 어찌 보면 타인을 향해 세워 둔 견고한 벽이었다.

흠이 잡힐 일을 배제함으로써, 남들과 최대한 얽힐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도, 헬레나도.

하나뿐인 피붙이인 에녹이 완벽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은 서식스 공작이 다채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편이었다.

지금처럼 무감하다 못해, 만사가 지루하다는 얼굴이 아니라.

‘그렇다면 브라이어튼 백작은…… 공작에게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물론 그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헬레나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서식스 공작이, 꼭두새벽부터 무례를 무릅쓰고 제 형수를 찾아오게 만들었잖아요.”

순간 이네스는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네, 네?”

“솔직히 정말 놀랐답니다. 도대체 브라이어튼 백작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무려 그 시간에 왕비를 찾아오는지…….”

으아, 어떡해……!

이네스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헬레나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면, 그때 만났던 에녹은 평소와는 전혀 달랐었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드물게 들뜬 목소리로 이네스의 발상을 설명하지 않았나.

‘백작은 천재입니다.’

그 확고한 믿음은 또 어떤가.

‘아마 제 이름이 역사에 남게 된다면, 그 이유는 바로 그녀라는 예술가를 발굴한 사람이어서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헬레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서식스 공작이 백작에게 거는 기대가 큰 만큼, 나 또한 백작에게 거는 기대가 있다는 건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순간 이네스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그녀가 허리를 곧게 세우며 왕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가 가장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서식스 공작 각하라는 겁니다.”

이네스는 에녹을 떠올렸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새파란 눈동자, 그리고 그 눈동자에 담겨 있는 신뢰를.

그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아니, 저버리고 싶지 않아.’

최대한 공작 각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를 바란다.

그가 그녀로 인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약속드리겠습니다. 공작 각하, 그리고 왕비 전하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순간 헬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이네스는 방금 왕비인 헬레나보다도 에녹을 먼저 언급했다.

아마 무심결에 말한 것 같지만…….

‘그만큼 에녹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지.’

왕비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그럼 기대할게요.”

❀ ❀ ❀

그 시각.

에드워드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제 남동생을 맞아들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기다렸잖아.”

“…….”

“뭐야, 이 형님이 이렇게나 애타게 동생을 기다렸다는데.”

“…….”

“너 정말,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만 있을 거야?”

에드워드가 몇 번이나 채근한 후에야, 에녹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셨다면 사죄드립니다. 왕비 전하께 언질을 받은 후 바로 왔는데, 조금 늦어졌나 봅니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에녹의 등을 팡팡 치며 경쾌하게 외쳤다.

“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사과야!”

……어쩌라는 거지?

에녹은 기가 막힌 얼굴이 되어 제 형을 바라보았다.

물론 에녹이 그러거나 말거나, 에드워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했지만 말이다.

“앉아, 앉아! 차? 아니면 술?”

“……이 아침부터 술이라니, 왕비 전하께 말씀드리면 한 소리 듣기에 딱 좋겠군요.”

대꾸하는 목소리가 어째 뾰족하다.

에드워드가 피식 웃었다.

“설마 백작과 함께 있는 시간을 방해했다고 토라진 거야?”

“…….”

아무래도 정곡을 찔렀나 보다.

에녹이 살벌한 눈빛으로 에드워드를 노려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에드워드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말을 이었다.

“그래, 뭐. 헬레나가 싫어할 건 사실이니까, 지금은 차로 하지.”

그리하여 두 형제는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러고 보니 너, 이번에 교류전 관련으로 내 아내를 꽤 귀찮게 굴었다지?”

에드워드가 두 눈을 반짝이며 에녹을 응시했다.

“공과 사를 명확하게 분리하는 내 동생께서는, 여태껏 나와 내 아내에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던 것으로 아는데.”

“…….”

“우리 동생께서는, 그만큼 브라이어튼 백작을 특별하게 여기나 봐?”

에드워드가 짓궂게 캐물었다.

하지만 에녹은 아무래도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계속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에드워드는 더 채근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너, 백작을 엄청 믿고 있기는 한가 보지? 내 아내에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백작을 소개할 정도라니, 조금 놀랐어.”

그러자 에녹이 처음으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럼요.”

아주 당연하다는 어조였다.

‘어라, 이것 봐라?’

에드워드는 내심 조금 놀랐다.

저렇게까지 확언할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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