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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59)화 (59/120)

59화

“그 발상에 대해 전해 들었는데, 그야말로 마음에 쏙 들더군요.”

“과찬이십니다.”

“과찬은요. 저는 진심이랍니다.”

그렇게 못을 박은 헬레나가 눈매를 휘어 웃어 보였다.

“어쨌든 왕비 체면이 있지, 이대로 입을 씻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음, 영광이 밥 먹여 주는 건 아니니까요.”

“…….”

고아한 입술에서 신랄한 농담이 흘러나왔다.

‘와, 왕비 전하께서 이런 농담까지 하시는 분이셨나?’

한때 연회에서 가끔 뵈었을 때에는, 그저 흠잡을 데 없이 기품 있는 왕비 전하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네스는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보상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이왕이면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편이 좋을 거라 여겼거든요.”

“와, 왕비 전하.”

“재물은 이미 브라이어튼 백작가에 차고 넘치니, 백작에게 그리 유용하지 않을 것 같고.”

헬레나가 양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최근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따져 보면, 역시 예술가로서 재능을 펼칠 기회가 가장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내 생각이 틀렸나요?”

“아닙니다, 전하. 사려 깊음에 감사드립니다.”

이네스가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동시에 헬레나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브라이어튼 백작이 조금 탐이 나기도 했고요.”

“……저를요?”

“그럼요. 그도 그럴 것이…….”

헬레나가 장난스러운 시선으로 에녹을 곁눈질했다.

“서식스 공작이 어찌나 브라이어튼 백작을 칭찬하던지요.”

순간 에녹이 미간을 좁히며 헬레나를 돌아보았다.

“그, 왕비 전하. 그건…….”

에녹이 다급하게 헬레나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헬레나는 들으란 듯이 말을 이었다.

“브라이어튼 백작은 화가로서 출중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니, 꼭 영입해야만 한다고요.”

……각하께서?

이네스가 두 눈이 동그래져서 에녹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애써 모른 체하며, 에녹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저는 거짓을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헬레나의 눈에는 보였다.

평소 무표정했던 에녹이 드물게 당황해하는 모습 말이다.

그 증거로, 에녹은 현재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헬레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헬레나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뭐래요? 저도 브라이어튼 백작이 뛰어난 예술가임을 부정할 생각은 없답니다.”

“…….”

그렇게 대번에 에녹의 말문을 막아 버린 헬레나가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미술전에 출품했던 <화방 거리> 연작은 잘 봤어요. 무척 아름답고 독특하더군요.”

“마음에 드셨다니 광영입니다, 왕비 전하.”

“오늘은 얼굴을 한 번 보려고 부른 거고, 자세한 이야기는 조만간 따로 하게 될 거예요.”

헬레나가 솜털처럼 보드라운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앞으로 교류전도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꼴깍 마른침을 삼킨 이네스가 다시 한번 예를 갖추었다.

“이렇게 멋진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공작 각하께 꼭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려야지.’

이네스가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먹던 차.

헬레나가 제안했다.

“이렇게 브라이어튼 백작을 만난 것도 반가우니,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 백작은 어떤가요?”

……차까지?

“감사합니다.”

비록 얼떨떨한 기분이기는 해도, 이네스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당황스러울지언정 왕비 전하와 독대하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으니까.

동시에 헬레나가 부드럽게 에녹을 돌아보았다.

“그럼 백작은 나와 같이 가는 것으로 하고, 서식스 공작께서는 국왕 폐하를 찾아가 보세요.”

그러자 에녹이 대놓고 싫은 표정을 했다.

“국왕 폐하는 갑자기 왜…….”

“그야 국왕께서 아침부터 서식스 공작을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헬레나가 들으란 듯이 말을 덧붙였다.

“심지어 하나뿐인 아우와 대화를 꼭 나누고 싶다 하시며, 오늘 국정 회의도 내일로 미뤄 두셨답니다?”

“…….”

외통수였다.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하고, 에녹이 되물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입니까? 제가 추후에 다시 찾아뵈어도…….”

하지만 에녹의 그런 희망은, 헬레나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그만 산산조각이 났다.

“그야 서식스 공작께서 매번 국왕 폐하를 피해 다니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

솔직히 저 말에는 에녹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에드워드가 하나뿐인 남동생을 엄청나게 놀려 대는 그만큼, 에녹 또한 귀찮다는 이유로 에드워드를 피해 다니고는 했었으니까.

때마침 헬레나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신신당부를 했다.

“아 참, 그리고. 폐하 앞에서 그런 표정 지으시면 서운해하시는 거 아시죠? 적당히 표정 관리하세요.”

“……알겠습니다.”

에녹은 결국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이네스를 바라본 후.

에녹은,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는 응접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동시에 헬레나가 혀를 차며 조그맣게 혼잣말을 했다.

“어휴, 정말. 저렇게 미련이 철철 넘쳐서야 원.”

동시에 이네스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미련이 철철 넘친다니?

하지만 그 의문을 풀 기회는 없었다.

헬레나가 이네스를 돌아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우린 여자끼리 오붓하게 차라도 마실까요?”

❀ ❀ ❀

향기로운 차 향기가 공기 중으로 번져 나갔다.

이네스에게 직접 차를 따라 준 헬레나가 부드럽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차가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아, 감사합니다.”

이네스는 다소 긴장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그 와중에도 차를 마시는 동작은 예법에 하나 어긋남 없이 우아하다.

대화하는 말씨며 예의 바른 태도까지, 좋은 집안에서 잘 교육받은 태가 난다.

헬레나는 눈앞의 여인을 탐색하듯 관찰했다.

이네스 브라이어튼.

한때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유일한 상속녀였고, 지금은 왕국에서도 몇 안 되는 여성의 몸으로 작위를 이은 여인.

한 번의 결혼, 그리고 이혼을 거쳤음에도 이네스는 여전히 앳된 얼굴이었다.

‘하기야…… 올해 나이가 스물셋이라고 했던가.’

듣기로는 사교계에 데뷔한 열여덟 살에 곧바로 라이언과 결혼했다고 했었다.

예전에 몇 번 파티에서 마주쳤을 적에는, 그저 기가 약하고 연약한 귀부인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녀의 어떤 점이 에녹을 매혹시킨 건지, 헬레나는 못내 궁금했다.

‘그러고 보면, 아까 전에도 서식스 공작은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지.’

에녹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온 신경을 기울이는 모습은 정말로 처음 보았다.

방금 전 만났던 에녹의 모습을 떠올리던 헬레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거 아시나요? 서식스 공작은 백작을 정말로 높이 평가하고 있답니다.”

“……아.”

순간 이네스의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그…… 공작께는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헬레나는 그런 이네스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에녹’이 화제에 오른 그 순간.

여태껏 단정한 귀부인의 얼굴을 하고 있던 건 간데없이, 이네스는 삽시간에 평정을 잃어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흡사 첫사랑의 달큼함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 소녀처럼 보였다.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이건 마치, 서식스 공작의 일방적인 관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쌍방으로 감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그때.

“저, 왕비 전하.”

헬레나의 눈치를 살피던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그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순간 헬레나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네스는 지금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에녹에 대해 묻고 있었으니까.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라면, 상대가 왜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굳이 묻지 않을 텐데.

심지어 상대는 왕비.

함부로 질문을 하기에는 까마득히 높은 상대였다.

그렇다는 건즉, 헬레나에 대한 부담감보다도 에녹에 관한 호기심이 더욱 크다는 뜻이었다.

헬레나는 선선히 대꾸했다.

“그야, 서식스 공작이 타인에게 이토록이나 신경을 쓰는 건 처음 보니까요.”

“그, 그런가요?”

“설마 몰랐다고 말할 건 아니죠?”

그 짓궂은 되물음에, 이네스가 두 눈을 내리깔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각하의 감정을 함부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흐음.”

비록 이네스는 무난한 답을 내어놓았으나, 헬레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의 귀부인은 헬레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잠시 생각에 잠겼던 헬레나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서식스 공작이 어째서 엘튼사의 사주로 재직하고 있는지, 브라이어튼 백작은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네? 사실 특별한 이유를 듣지는 못하였습니다만.”

“그건 현 국왕 폐하를 배려해서예요. 적어도 저와 국왕 폐하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죠.”

뜻밖의 사실에 이네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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