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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58)화 (58/120)
  • 58화

    “그으…… 예산이 조금 드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역시 가게 주인들에게 적당한 보상금을 책정해 주는 게 제일 무난하겠죠?”

    어떤 일이든 가장 큰 문제는 자금이었다.

    무려 왕비 전하께서 주최하시는 국가 간 교류 행사니, 예산 자체는 넉넉할 테지만.

    그래도 쓸데없는 지출이라고 생각하시면 어쩌지?

    이네스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으나.

    “보상금이라. 나쁘지 않은 방안이군요.”

    도리어 에녹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방 거리는 예산을 집행할 가치가 있는 장소니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감사하고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네스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리고 화방 거리에 있는 예술가들도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면, 화방 거리를 교류전 장소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발도 적을 거예요.”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여태까지 몰랐던 새로운 예술가들을 발굴할 수도 있겠군요. 좋은 생각입니다.”

    어떡하지, 기분이 너무 좋아.

    이네스가 헤실헤실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녹과의 대화는 무척 즐거웠으니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모조리 간파하여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단순히 실마리로 남아 있던 아이디어를 단숨에 확장시켜 준다.

    마치 에녹이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때마침 에녹이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지금 백작께서 해 주셨던 이야기들을 왕비 전하께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네? 네, 그럼요.”

    이네스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조악한 구상이지만, 공작 각하께 도움이 되었다면 기쁘겠네요.”

    “전혀 조악하지 않습니다. 무척 신선했어요.”

    에녹은 정색을 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이네스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백작께 큰 도움을 받게 되었군요. 감사합니다.”

    “…….”

    이렇게 솔직한 칭찬과 감사 인사를 받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이네스는 괜히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식사도 모두 마쳤으니, 이만 타운하우스로 돌아갈까요?”

    “……예. 그래야죠.”

    한껏 물이 올랐던 대화가 정리가 되어서일까.

    에녹은 묘하게 아쉬운 얼굴이었다.

    이네스는 미묘한 기분으로 그런 에녹을 흘끔거렸다.

    ‘공작 각하께서는 알고 계실까?’

    에녹이 저렇게 아쉬운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녀의 마음이 폭풍우에 휘말린 바다처럼 헝클어지는 것 말이다.

    지금도 그렇다.

    또 한 번 제멋대로 마음이 요동치고 있지 않은가.

    ‘됐어, 내가 예민한 탓이지.’

    이네스는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으며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에녹은 복잡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서식스 공작가의 문장을 매단 마차가, 미끄러지듯이 브라이어튼 타운하우스 앞에 멈춰 섰다.

    그 안에서 내린 이네스가 정중하게 에녹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굉장히 즐거웠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저도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답하고도 에녹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네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공작 각하?”

    “다시 한번.”

    뜻밖의 말에, 이네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백작과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네스가 멍하니 에녹을 응시했다.

    에녹이 싱긋 웃은 후 눈짓으로 타운하우스의 정문을 가리켰다.

    “피곤하실 텐데 얼른 들어가시지요.”

    “그, 공작 각하께서 가시는 모습을 보고…….”

    “아뇨, 백작께서 타운하우스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당사자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기도 뭐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이네스는 결국 타운하우스로 들어갔다.

    차르르-찰캉!

    정문이 닫혔다.

    이네스는 창문 너머로 에녹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네스가 타운하우스 안으로 안전하게 귀가하였음을 확인한 후에야, 에녹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마차가 대로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후.

    ‘어, 어떡해.’

    이네스는 가슴을 부여잡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두근거려……!’

    양 뺨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녹색 눈동자가 깊게 침잠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개인적으로 만날 일은 없겠지.’

    초상화는 거의 완성되었고, 이네스가 혼자 마무리해서 보내 주겠다고 직접 말하기까지 했으니.

    더 이상 에녹을 만날 명분이 없는 것이다.

    비록 에녹은 ‘다시 한번 백작과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해 주었지만.

    아직도 그 목소리가 귓속에 아른거리지만…….

    ‘됐어, 이제 미련은 그만 가지자.’

    그러면서도 어쩐지 입 안이 쓰디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네스는 벽에 기댔던 등을 떼어 내어, 느릿하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던 중.

    그녀가 문득 멈칫했다.

    타운하우스에 임시로 꾸며 둔 아틀리에 방문이 시야에 들어온 탓이다.

    ‘공작 각하의 초상화.’

    아직 마무리가 덜 된 초상화를 타운하우스로 옮겨와서 작업하고 있었다.

    이네스는 충동적으로 아틀리에 안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창문 너머로 흘러드는 달빛 아래에, 이젤에 얹힌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이네스는 의자를 끌어와 그 초상화 앞에 앉았다.

    그림 속 에녹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지적인 푸른 눈동자와 우아한 콧날, 날렵한 턱선과 그 아래로 곧게 떨어져 내리는 목선까지 모두.

    “……하아.”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음이 영 복잡하여, 이네스는 한참을 그림 앞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 ❀ ❀

    하지만 이틀 후.

    이네스는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달았다.

    느닷없이 왕가의 사신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브라이어튼 백작은 왕비 전하의 명령서를 받드시오.”

    “이, 이네스 브라이어튼. 왕비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하지만 왕가의 사신을 그대로 세워 둘 수도 없는 노릇.

    이네스는 일단 예를 갖추어 명령서를 받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명령서를 펼쳐 본 그녀가 그 자리에 빳빳하게 굳어졌다.

    우아한 필체로 쓰여 있는 그 내용은…….

    <브라이어튼 백작을 이번 교류전의 운영진으로 임명한다.>

    뭐라고!?

    이네스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 ❀ ❀

    결국 이네스는 왕궁으로 입궁했다.

    왕비가 직접 그녀를 운영진으로 임명한 상황에서, 차마 그 임명을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게다가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이건 이네스에게도 굉장히 좋은 기회였다.

    ‘무려 왕비 전하를 직접 곁에서 보필하며 국가 행사를 주도하는 거잖아?’

    왕국의 귀족, 그리고 한 명의 예술가.

    두 입장 모두를 고려해 봐도, 교류전의 운영진으로 참여하는 건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왕실에서 그녀의 예술적 안목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네스의 평판은 단숨에 올라갈 것이고, 더하여 ‘라이언에게 작품을 빼앗겼던 불쌍한 아내’라는 수군거림도 말끔히 사라질 터.

    다만 그 와중, 그녀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또 뵙게 되는군요.”

    그는 바로 에녹이었다.

    만개한 장미처럼 화사한 그 미소를 마주하며, 이네스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간신히 마음 정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또 마주치게 되는 거야?!’

    그야말로 심적 타격이 어마어마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에녹이 이 자리에 있는 건 당연하다.

    처음부터 왕비를 도와 교류전을 진행한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무슨,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도 아니고…….’

    이네스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 어쩌다가 제가 교류전에 참가하게 된 건가요?”

    그러자 에녹이 대번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이네스에게 되물었다.

    “혹시 불편하십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물론 영광스러운 일이기는 한데…….”

    그런데 그때.

    “다행이네요, 혹여 백작이 원하지 않는데 강제로 시키는 거라면 미안하잖아요?”

    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놀란 이네스가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왕비 전하를 뵙습니다.”

    우아한 외양의 귀부인이 느긋한 걸음으로 응접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왕비, 헬레나였다.

    밀려드는 긴장감에,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면, 이번 교류전을 왕비 전하께서 직접 주최하신다고 하셨지.’

    아무래도 이번 왕가는 이번 교류전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하다.

    왕비는 물론이고, 현 왕의 하나뿐인 남동생까지도 교류전 운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 자리에 나도 운영진으로 합류한다니.’

    이네스는 어쩐지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때마침 헬레나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 브라이어튼 백작이 교류전에 대해 무척 훌륭한 발상을 해냈다고 들었어요.”

    응?

    순간 이네스가 미심쩍은 얼굴로 귀를 쫑긋 세웠다.

    ‘설마, 화방 거리에서 나누었던 그 대화를 말하는 건가?’

    그녀가 힐끔 에녹을 곁눈질로 바라보자, 에녹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신이 추측한 게 맞다’라는 의미였다.

    이네스는 그만 기겁하고 말았다.

    ‘아니, 그 얘기를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시간상, 이네스와 대화를 나눈 바로 다음 날에 왕비에게 전해 올리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정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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