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특유의 우아한 동작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며, 에녹이 말을 이었다.
“이미 백작 앞에서도 몇 번이나 평정을 잃은 적이 있어요.”
“평정을 잃는다니, 어째서…….”
“음, 그 이유는.”
연어를 썰어 내던 에녹이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비밀입니다.”
“…….”
사실 별다를 것도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식기를 쥔 손아귀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당신이 평정을 잃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떻게든 캐묻고 싶은 걸까.’
게다가 입 안은 왜 바짝 말라 버렸는지.
내 심장은 자꾸만 제멋대로 떨리고 마는 건지…….
틱.
순간 어두워진 공터 안에 등불 하나가 켜졌다.
웨이터가 주변을 돌아다니며 군데군데 설치된 등불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주홍색 등불들이 별처럼 하나둘씩 떠오르고.
동시에 세상의 소음은 아득히 멀어졌다.
주홍색 불빛이 부드럽게 번져 나가는 세계 속, 오로지 눈앞의 에녹만이 선명할 뿐.
오로지 그녀에게 집중하며, 그녀를 똑바로 들여다보는.
밤의 호수처럼 고요한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며…….
‘아, 그렇구나.’
이네스는 별안간 깨달았다.
‘공작 각하를 이성으로 의식하지 않는 건…… 역시 불가능하구나.’
제멋대로 부푼 마음은 이제 그녀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렇다면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이제 단 하나.
그들의 산뜻한 우정이 어그러지지 않도록, 이 관계가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그저 최대한 숨기는 것만이 최선일 뿐.
“그보다, 음식은 입에 좀 맞으시나요?”
그리하여 이네스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에녹에게 질문을 던졌다.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이네스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녹은,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훌륭하군요.”
“다행이네요.”
억지웃음을 짓던 이네스는, 이내 입술을 앙다물며 파스타 접시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랬기에 이네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한 그 순간.
에녹의 눈동자가 돌멩이가 던져진 호수처럼 짧게 흔들렸다는 사실을.
‘거짓말은 아니지.’
단언컨대, 방금 이네스에게 했던 말에는 거짓이라고는 단 한 점도 없었다.
‘저는 백작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백작 앞에서도 몇 번이나 평정을 잃은 적이 있어요.’
다만 자신의 속마음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을 뿐.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백작이 제 곁에 있을 때마다, 제 감정은 제가 원하는 대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제 평정을 무너뜨려요.’
차마 고백할 수 없는 가장 내밀한 속내.
에녹의 입술 위로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마음을 숨기며 식사에 열중했다.
❀ ❀ ❀
그 후,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제가 이 스테이크를 다 먹을 수 있을 줄은 몰랐군요.”
에녹은 감탄 섞인 시선으로 텅 빈 접시를 바라보았다.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그 엄청난 양에도 불구하고, 음식 접시를 모조리 싹싹 비울 정도로.
그런데 그때.
“아니, 그래서 말이지! 내가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이 말이야……!”
근처에 앉은 손님 한 명이 식탁을 탕탕 치며 불콰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에녹이 그 테이블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비록 누군가를 흘끗거리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아, 그쪽을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휴, 이 인간 누가 술 줬어? 벌써 목소리 커지는 것 좀 봐!”
“내가 내 마음대로 술 한 잔도 못 마셔?!”
사실 에녹은 지금의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무척 신기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식사할 때에는 예의범절을 엄격하게 지키라고 배웠었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었는데…….
“와하하,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 웃지만 말고 내 말 좀 들어 보라고! 그래서 내가 그 자식에게 딱 경고했는데!”
여기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웃거나, 남들의 눈치라고는 전혀 보지 않고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낯설다 하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워.’
이 즐거움이 이 경쾌한 분위기 덕인지, 혹은 눈앞에 앉아 있는 이네스 덕인지.
혹은 둘 다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아까 교류전 이야기를 하셔서 말인데요.”
때마침 디저트로 나온 초콜릿 푸딩을 야무지게 떠먹던 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칼도로프도 정말 웃기지 않나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예전만 해도 그렇잖아요.”
이네스는 뾰로통한 얼굴이 되어 스푼으로 푸딩을 쿡쿡 찔러 댔다.
스푼 밑에서 부드러운 푸딩이 형편없이 뭉개졌다.
“그때도 엄청나게 랭커스터를 무시했다고 들었는데요.”
이네스가 얼굴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뭐라고 했더라? 랭커스터는 전체적으로 너무 경직되어 있다고 했던가요? 웃겨, 정말.”
사실 마지막으로 있었던 교류전에서 여러모로 칼도로프에게 무시당했던 건, 랭커스터의 예술가로서 자존심 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자기들은 자유로운 예술적 분위기를 중시한다며 허세를 떨던데. 누가 보면 자기들만 그런 줄 알겠어요?”
머리에 잔뜩 열이 오른 이네스는 이제, 푸딩마저 뒷전인 것처럼 보였다.
“보세요, 이 화방 거리만 해도 그래요! 그 작자들이 젠체하는데, 우리도 충분히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니까요?”
하기야 그렇기는 하다.
에녹 자신도 귀족적인 상류층 문화에만 젖어 살아서 몰랐을 뿐.
여러 예술가들이 어울려 사는 이 거리만 해도, 여태껏 단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품고 있지 않은가.
그러던 중.
이네스가 무언가를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멈칫했다.
그러고는 골똘히 고민에 빠져든다.
“……으음.”
보다 못한 에녹이 이네스를 독려했다.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편히 말씀하십시오.”
에녹이 그렇게 말한 후로도, 이네스는 한참을 망설인 후에야 미심쩍은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그, 갑자기 생각난 건데요. 여태까지 교류전은 왕족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나요?”
“예, 그랬었죠.”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네스가 슬그머니 미간을 좁혔다.
“이건 제가 교류전에 대해 잘 모르는 채로 말씀드리는 거니까, 만약 제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면 흘려 넘겨 주세요.”
“경청하겠습니다.”
에녹이 자세를 바르게 했다.
이네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표현이었다.
‘정말, 라이언이라면 내 말은 귓등으로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겠지?’
새삼스럽게 라이언을 떠올리던 이네스는, 이내 질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치러졌던 교류전은, 어찌 보면 상류층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렇죠?”
“굳이 따지자면 그런 셈이죠.”
“그렇다면 그 교류전을 상류층뿐 아니라, 평민들도 즐길 수 있도록 확대하는 건 어떨까요?”
그 질문에 에녹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지금 이 주변만 해도 예술가가 이렇게나 많은걸요. 이 사람들이 모조리 귀족은 아니잖아요?”
이네스가 눈짓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은 즉, 귀족 계층이 아니면서도 예술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이네스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공작 각하께서는 평민 화가들이 생활을 유지하는 방법이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아무래도 그림에 관련한 일을 하려나요?”
“정답이에요. 저렴한 그림을 그려서 거리에서 판매하거나, 가끔은 가게 주인들의 의뢰를 받아서 간판 작업도 해요.”
이네스는 보란 듯이 양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것만 봐도 평민들도 예술을 향유하려는 욕구 자체는 가지고 있어요. 다만 그럴 기회가 없었을 뿐이죠.”
“…….”
완전히 허를 찔렸다.
조곤조곤 설명이 이어졌다.
“게다가 랭커스터에는 화방 거리라는 아주 독특한 장소도 있잖아요?”
화방 거리.
수도 랭던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장소.
자연적으로 가난한 거리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그 거리 자체가 일종의 거대한 예술 지구로 형성된 곳.
“화방 거리처럼 독특한 장소를 활용하지 않고 그대로 버려두는 건, 개인적으로는 바보짓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얼큰하게 술에 취한 사람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네스가 제안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교류전에 화방 거리 전체를 이용하는 건 어떤가 싶어요.”
“화방 거리 전체를요?”
“네. 그리고 교류전 자체를 축제처럼 치른다면, 귀족뿐 아니라 평민들의 접근성도 용이해지지 않을까요?”
상대방이 제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음을 깨닫자, 이네스의 목소리에도 저절로 열기가 서렸다.
“이건 제 생각이지만, 교류전을 통해 관람객들이 유입된다면 화방 거리의 상권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이네스가 두 눈을 반짝였다.
“물론 화방 거리의 원주민들의 반발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무마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 방식으로 무마하죠?”
아차.
순간 이네스가 슬그머니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