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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56)화 (56/120)
  • 56화

    “저도 미력하나마 각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

    순간 에녹은 허를 찔린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사랑스러울 수가 있는지.’

    저런 건 반칙이지 않은가.

    불시에 저렇게 예쁜 미소를 보여 주는 건…….

    한편 번뇌하는 에녹의 속마음 따위 전혀 모르는 이네스는, 두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저도 공작 각하께 도움받은 게 많잖아요?”

    비록 에녹은 거래였고, 이미 충분한 대가를 받아 냈다고 몇 번이나 말했으나.

    그 자체가 이네스를 배려하여 하는 말임을 모르지 않았다.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러니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아셨죠?”

    “…….”

    물끄러미 이네스를 바라보던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겠습니다.”

    동시에 에녹은 목 끝까지 뒤따라 치밀어 오르는 말을 간신히 되삼켰다.

    ‘교류전을 진행할 때, 백작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비록 아직 왕비가 이네스의 참가에 대해 확언하지는 않았기에, 차마 이네스에게 함께하자고 제안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왕비 전하의 허락을 받아 내야겠어.’

    에녹이 그렇게 다시 한번 단단히 마음을 먹던 차.

    때마침 이네스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조금 이르지만 저녁 식사라도 하러 갈까요? 제가 아는 맛집이 있거든요.”

    그렇게 자랑스럽게 운을 뗀 이네스가, 살그머니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다만 공작 각하께서 평소 다니시는 고급 레스토랑은 아니에요. 그 점은 감안하시고…….”

    “괜찮습니다.”

    에녹은 싱긋 웃었다.

    “백작과 함께 있을 수 있으면 어디든 좋습니다.”

    “…….”

    이네스는 멍하니 그런 에녹을 마주 보았다.

    ‘저, 저렇게 달콤하게 말하는 건 조금 치사하잖아?’

    그야말로 레이디들이 오해하기에 딱 좋은 모습이었다.

    저런 사소한 모습 하나하나가, 서식스 공작에 대해 레이디들이 품은 수많은 환상들에 더욱 부채질을 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공작 각하께서는 분명 별다른 의미 없이 저렇게 말씀하신 거겠지.’

    그런 행동 하나하나에 일일이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역시 자존심이 상한다.

    게다가, 혹여나 만약 저 말에 의미가 있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더더욱 흔들려서는 안 돼.’

    그러한 마음으로, 이네스는 부러 도도하게 몸을 돌렸다.

    “그럼 가요.”

    어쨌든 노을이 유난히도 붉은 날이어서 다행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 ❀ ❀

    이네스가 향한 곳은 뜻밖에도 화방 거리의 뒷골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식당인데, 이런 골목 구석에 위치하고 있으면 손님을 맞기에 불편하지 않나?’

    에녹은 조금 어리둥절했으나, 이네스가 워낙 자신만만했으므로 일단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후.

    푸른 눈이 조금 커졌다.

    레스토랑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못 한 뒷골목 공터에, 식탁과 의자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상당히 자유분방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식탁 높이가 맞지 않아서 다리에 종이를 접어 괴어 놓은 건 예사.

    낡은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에녹은 짧고 격렬한 고민한 끝에, 이 레스토랑의 유일한 장점을 찾아냈다.

    ‘……그래도 식탁과 의자들이 동일한 디자인이기는 하군.’

    그나마도 갖추지 않았더라면, 레스토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물상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한편 이네스는 이곳이 무척 익숙한 것 같았다.

    척척 공터 안으로 들어가더니, 능숙하게 자리를 잡고 앉는 모습만 해도 그렇다.

    얼떨결에 에녹도 이네스 맞은편에 앉았다.

    “조금 낯설죠? 자기 마음대로 아무 자리에나 앉는 거 말이에요.”

    동시에 이네스가 에녹 쪽으로 몸을 숙이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공작 각하께서는 매번 직원이 자리를 안내해 주는 레스토랑만 가 보셨을 것 같은데, 제 추측이 들어맞았을까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에녹은 다소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네스가 장난기가 가득 서린 목소리로 재차 말을 붙였다.

    “제가 아니면 언제 각하께서 이런 레스토랑에 와 보겠어요?”

    “그렇군요. 백작께 감사해야겠는걸요.”

    그가 순순히 그녀의 말을 긍정하자, 오히려 이네스가 김빠진 얼굴을 했다.

    무려 서식스 공작 각하를 놀려 먹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다 글렀지 않은가.

    에녹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진심입니다.”

    “…….”

    그 미소가 너무나도 선명해서.

    ‘뭐, 뭐야.’

    순간 이네스는 심장 박동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에녹의 미소가 도장처럼 눈동자 안에 찍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통에.

    이네스는 괜히 시선을 돌리며 아무렇게나 말을 주워섬겼다.

    “소, 솔직히 저도 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렇다면 이 가게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아, 란트 부인이 여기 단골이거든요.”

    다행히도 계속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긴장감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네스는 활기차게 말을 이었다.

    “란트 부인이 정말 귀에 딱지가 앉도록 여기 칭찬을 했었어요. 예전에 <화방 거리> 연작을 작업할 적에는 매번 포장해서 먹었었는데…….”

    한편 에녹은 그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재잘거리는 이네스의 말이 마치 노랫소리처럼 들린다.

    “……래서, 저는 토마토 미트볼 파스타를 먹으려고요. 여기 미트볼이 엄청 크고 맛있어요. 각하께서는요?”

    아.

    느닷없이 돌아온 질문에, 에녹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네스가 어느새 뚱한 얼굴이 되어 에녹을 마주 보고 있었다.

    “도대체 아까 전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신 거예요?”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노랫소리 같아서, 그에 집중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는 없었기에.

    에녹은 황급히 앞에 놓인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이네스의 시선을 피했다.

    이네스가 고개를 쑥 내밀며 참견을 했다.

    “이 레스토랑, 연어 스테이크도 괜찮아요. 타르타르소스와 레몬이 곁들여 나오는데, 비린내도 안 나고 맛있더라고요.”

    “그렇다면 그걸로 하죠.”

    사실 메뉴 자체가 낯설었기에, 에녹은 적당히 알겠노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네스가 손을 번쩍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주문 좀 받아 주세요!”

    “…….”

    순간 에녹이 화들짝 놀란 얼굴이 되어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에녹이 다녔던 레스토랑에는 손님을 전담하는 웨이터가 따로 붙어 있었으니까.

    저렇게 큰 소리로 웨이터를 불러 주문하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웨이터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주문을 받느라 바빠서, 아무래도 이네스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듯하다.

    이네스는 그에 굴하지 않고 재차 웨이터를 불렀다.

    “여기 주문이요!”

    “아, 예!”

    그제야 웨이터가 후다닥 이쪽으로 다가왔다.

    “토마토 미트볼 파스타 하나랑, 연어 스테이크랑…….”

    그렇게 야무지게 주문을 끝낸 후.

    이네스는 얼떨떨한 얼굴의 에녹을 발견했다.

    ‘호오.’

    장난기가 돋은 그녀가 짓궂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많이 놀라셨어요? 이런 식으로 주문을 하는 건 역시 처음이죠?”

    “솔직히 조금 놀랍기는 하군요. 전담 웨이터가 없는 겁니까?”

    “이렇게 작은 가게에서 전담 웨이터를 어떻게 두겠어요? 그랬다가는 인건비가 더 나올걸요.”

    그렇게 보란 듯이 양어깨를 으쓱이는 것도 잠시.

    이네스는 물끄러미 에녹을 응시했다.

    ‘그건 그렇고, 각하의 저런 모습은 여러모로 신선한걸.’

    이네스가 알던 에녹은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인상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런 에녹이, 저렇게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니…….

    ‘……어쩐지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공작 각하에게 다소 무례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뭐 어때?

    귀여운 건 사실인걸.

    각하께서 내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으신 것도 아니고 말이야.

    괜히 헛기침을 한 이네스가 가슴을 쭉 펴며 말을 덧붙였다.

    “조금 기다려 보세요, 아직 놀랄 일은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이네스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약 20분 뒤.

    조리되어 나온 음식을 마주한 에녹은, 그야말로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버렸다.

    “이게 정말로 1인분입니까?”

    하기야 놀랄 만도 했다.

    그야말로 접시가 넘치도록 음식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예술가들이 주 손님이다 보니, 음식 또한 가격이 저렴하고 양이 많았다.

    이네스는 그만 참지 못하고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민망한 마음에, 에녹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까지 웃으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한참을 웃던 이네스가 손사래를 쳤다.

    “죄송해요, 각하께서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게…… 조금 의외라서 그랬어요.”

    “의외라니요?”

    “그게, 제가 아는 각하께서는 항상 침착한 모습을 하고 계셔서요.”

    너무 웃은 바람에 눈물까지 찔끔 났다.

    이네스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며 말을 맺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평정을 잃지 않으셔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좀 다르신 것 같아요.”

    “…….”

    순간 에녹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어라?

    이네스가 두 눈을 깜빡이는 것과 동시에.

    에녹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그건 아마 백작께서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요? 무엇을요?”

    “저는 백작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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