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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55)화 (55/120)
  • 55화

    “예전처럼 이네스라고 불러도 돼요.”

    “하지만 제가 백작님께 어찌…….”

    “백작님이라니요, 우리 오랫동안 알아 왔잖아요. 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란트 부인이 움찔 어깨를 굳혔다.

    이네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는 란트 부인에게 있어 브라이어튼 백작이 아니라, 친구 이네스이고 싶은걸요.”

    “정말로? ……요?”

    반색을 하던 란트 부인은, 슬그머니 이네스의 눈치를 보며 ‘요’자를 덧붙였다.

    이네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러니까 그렇게 어색하게 대하실 필요 없어요.”

    “뭐, 정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게 란트 부인이 조금 안도했던 것도 잠시.

    ‘자, 잠깐만. 저분은!’

    이네스 등 뒤에 서 있는 에녹을 발견하자마자, 란트 부인은 다시 한번 사색이 되어 버렸다.

    예전에는 에녹을 두고 그저 부유한 평민이 아닐까 추측했었다.

    비싼 화구들을 턱턱 구매하는 이네스와 함께 어울려 다녔고, 그에 별달리 부담을 느끼지도 않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

    저렇게나 눈에 띄게 화려한 외모와, 몸에 배어 있는 우아한 행동거지.

    거기다 이네스의 이혼의 계기가 되었던 미술전까지 고려하면…….

    “그, 저, 서식스, 공…… 공작 각하…….”

    바짝 얼어붙은 란트 부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일전에 이네스와 나누었던 장난스러운 대화가 뇌리를 스쳐 지났다.

    ‘이네스가 남자와 화방에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설마 애인이기라도 한 거야?’

    ‘에이, 그럴 리가요.’

    도, 도대체 공작 각하를 두고 도대체 내가 무슨 망발을……!

    란트 부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가, 새빨개졌다가, 이내 새하얗게 변했다.

    그 다채로운 빛깔을 보다 못한 에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이전처럼 피츠로이 씨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예에?”

    란트 부인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여태껏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피츠로이’는 서식스 공작의 미들네임이었으니까!

    하지만 에녹은 여전히 덤덤한 얼굴이었다.

    “굳이 제 신분을 드러낼 필요는 없지요. 괜히 번거롭기만 하고요.”

    “어, 그, 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에녹이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공작 본인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이전처럼 피츠로이 씨라고 부르는 것도 영 불편하다.

    란트 부인이 어찌할 바 몰라 눈동자만 굴리던 때.

    다행히도 이네스가 당장 기절할 것만 같은 란트 부인을 구원해 주었다.

    “부인, 그보다 저 물감들을 좀 사려고 하는데요.”

    “무, 물감? 그래! 마침 새 물감이 들어온 게 있는데……!”

    란트 부인은 허둥지둥 돌아섰다.

    ‘와, 란트 부인. 엄청 긴장하셨네.’

    이네스가 소리 죽여 웃던 것도 잠시.

    그녀가 헛숨을 삼켰다.

    하필이면 에녹과 눈이 딱 마주친 탓이다.

    ‘헉.’

    황급히 뒤돌아선 이네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거 내 착각인가?’

    아까 전부터 몇 번이고 에녹과 시선이 마주치는 느낌이 드는데.

    마치 에녹이 줄곧 이네스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아냐, 내가 예민한 거겠지.’

    그러면서도 에녹이 계속 의식되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

    이네스는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란트 부인에게 말을 붙였다.

    “아 참, 물감 말고도 새 물통이랑 팔레트도 필요해요. 좀 볼 수 있을까요?”

    “물통이랑 팔레트라…… 그건 저쪽에 있는데.”

    란트 부인이 수선을 떨며 이네스를 이끌고 화방 구석으로 향했다.

    그렇게 한참 화구들을 살펴보던 중.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

    다시 한번 에녹과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에녹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라지도 않고 빙긋 웃어 보였다.

    이네스는 다급하게 화구 쪽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람 설레게, 왜 자꾸 저렇게 웃는 거야!’

    ❀ ❀ ❀

    그렇게 화구 쇼핑을 끝마치고.

    “고마워, 이네스!”

    란트 부인은 그야말로 얼굴이 활짝 피었었다.

    처음에는 잔뜩 긴장한 건 사실이었다.

    그저 일개 화방의 주인으로 살면서, 저렇게 까마득한 신분의 귀족 나리들을 마주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그 긴장감은 이제, 이네스가 올려 준 상당한 매출 앞에서 사르륵 녹아 사라져 버렸다.

    “지금 구매한 화구들은 예전처럼 일꾼들을 시켜다 마차에 실어 주면 되지?”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란트 부인과 인사를 나누던 이네스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아 참, 저번에 제가 빌렸던 5층 방 말이에요. 다른 사람이 세를 들었나요?”

    “아니, 아직.”

    그 대답에, 이네스가 반색을 하며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한 번 보고 가도 될까요?”

    비록 오래 머무른 아틀리에는 아니었지만, 이네스에게 있어 그 아틀리에는 특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네스의 이혼을 이끌어 낸 ‘화방 거리’ 연작 시리즈를 그린 장소가 아닌가.

    다행히 란트 부인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마음대로 해. 이네스는 우리 화방의 제일 큰손님이신데, 하고 싶은 대로 하셔야지.”

    “감사합니다!”

    허락을 얻은 이네스는 5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계단을 올라, 잠긴 방문을 열자.

    널찍한 방의 전경이 펼쳐졌다.

    ‘아.’

    이네스는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들였던 화구들은 다시 치운 지 오래였기에, 방은 텅 비어 있었다.

    햇빛을 머금어 금빛으로 빛나는 먼지들만이 공기 중에 떠다닐 뿐.

    ‘여기서…… 미술전에 출품할 그림들을 그렸었지.’

    미술전, 그리고 이혼 소송까지.

    고작해야 두어 달 동안 진행된 일들인데, 정말 숨 가쁘게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언과의 끔찍했던 결혼 생활도 이제 굉장히 먼 과거처럼 느껴진다.

    아련한 기분에 젖어 방 안을 거닐던 이네스가, 창문 쪽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어 보았다.

    화방 거리 특유의 생기 넘치는 풍경이 시야에 가득 들이쳤다.

    “이 풍경이었죠?”

    때마침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곁에 다가온 에녹이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미술전에 출품했던 그림의 주제 말입니다.”

    “네, 맞아요.”

    이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문득 이네스가 이 방에서 그림을 그리던 모습을 회상했다.

    불타오르던 황혼과,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 빠져들 것만 같던 이네스의 뒷모습.

    오로지 그림만을 바라보던, 선명하고 아름다운 진녹색 눈동자까지.

    “…….”

    에녹은 저도 모르게 힐끗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상아로 조각한 양 희고 단아한 옆얼굴은, 에녹이 아닌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푸른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또다.

    유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네스가 오로지 그 자신만을 바라보았으면 싶었다.

    에녹의 온 신경이 이네스에게 쏠려 있는 그만큼.

    그녀도 그를 의식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이 무슨 어린애 같은 생각인지.’

    에녹이 희미하게 조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그때.

    뜻밖에도 이네스가 휙 고개를 돌려 에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각하, 혹시 제게 무언가 하실 말씀이라도?”

    “…….”

    아무래도 이네스를 너무 뚫어지게 바라본 것 같다.

    그녀가 제 시선을 눈치채고, 더하여 그에게 되물을 정도였을 줄이야.

    순식간에 목덜미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이런.’

    에녹은 잠시 당황했으나, 다행히도 이네스에게 전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그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만나 뵙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네?”

    순간 이네스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행히도 에녹은 이네스의 굳어진 표정을 눈치채지는 못한 듯했다.

    여상하게 설명을 덧붙이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조만간 교류전이 열릴 거거든요.”

    “교, 교류전이요?”

    “예. 이번 교류전은 왕비 전하께서 주최하시는데, 저도 곁에서 돕기로 했습니다.”

    ……아.

    이네스는 그제야 온몸의 긴장을 조금 풀었다.

    ‘다행이다, 더 이상 공작 각하를 뵙지 못하는 건 아니었어…….’

    반사적으로 안도하던 것도 잠시.

    이네스는 복잡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제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네스.’

    머리로는 분명 에녹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째서 마음은 자꾸만 에녹에게로 향하는 건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됐어,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둬.’

    잡념을 털어 버릴 겸, 이네스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교류전이라니, 거의 칠 년 만이네요.”

    사실 화가로서도, 그리고 왕국의 귀족으로서도 여러모로 호기심이 동할 화제이기는 했다.

    교류전.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국가 간의 예술 교류였다.

    다만 랭커스터와 칼도로프 사이의 오랜 반목의 역사 때문에, 약간 자존심 싸움처럼 번질 때가 잦은 행사인데.

    ‘그러고 보면 마지막 교류전은 칼도로프에서 치렀었지?’

    다만 교류전의 결과가 좋지는 못했다고 들었다.

    당시 칼도로프는 교류전에 심혈을 기울였고, 랭커스터 쪽은 그들의 자유로운 화풍에 잔뜩 압도되어 돌아왔다고 했었다.

    그때 어찌나 자존심을 구겼던지, 왕립 예술가 협회까지 발족되는 계기가 되었었는데…….

    “그렇다면 공작 각하께서도 바빠지시겠네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 같던 이네스가 이내 해맑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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