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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54)화 (54/120)

54화

여태까지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녀는 에녹을 그저 초상화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기에 계속해서 평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각하께서는 언제부터 나를 저렇게 바라보고 계셨지?’

에녹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을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

……그림보다도 훨씬 더.

순간 붓을 움켜쥔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마음이 제멋대로 헝클어졌다.

엉망으로 뻗은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그저 막막하기만 해서.

‘정신 차려, 이네스.’

이네스는 입 안의 보드라운 살갗을 짓씹었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자 그제야 약간 정신이 들었다.

에녹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를 이성으로 의식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 마음을 들킨다면.

‘분명 분위기가 이상해질 거야.’

그리고 그건 이네스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네스는 애써 표정을 정돈하며 몸을 일으켰다.

“각하, 초상화는 거의 다 완성되었어요.”

순간 방 안에 고여 있던 조밀한 침묵이 산산조각 났다.

무표정했던 에녹의 얼굴 위로 표정이 깃들었다.

희미한 미소였다.

그저 사소한 변화일 뿐인데.

에녹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자꾸만 신경이 곤두서게 되어서…….

이네스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요. 고생하셨습니다.”

“…….”

“백작?”

그 부름에, 이네스는 찬물을 맞은 양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바보같이 굴지 마, 이네스.’

속으로 스스로를 질책하며, 이네스는 차분한 척 말을 이었다.

“초상화의 마무리는 저 혼자서 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번거롭게 방문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다면 만남은 오늘로 끝입니까?”

“네.”

이네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성된 그림은 타운하우스로 보내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에녹은 못내 아쉬운 마음이었으나 순순히 물러났다.

이네스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때마침 이네스가 에녹을 손짓해 불렀다.

“아직 완성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초상화를 한번 보시겠어요?”

잠시 고민하던 에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응?

뜻밖의 대답에 이네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녹은 여전히 여상한 낯이었다.

“초상화가 완전히 완성되면 그때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네스가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말한 것치고는, 에녹은 이젤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저렇게 열렬한 시선을 보아하니, 에녹도 그림이 궁금하기는 한 것 같은데.

‘그럼 그냥 봐도 되지 않나?’

이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때.

에녹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백작도 어렸을 적 초콜릿 상자를 받은 적이 있겠지요?”

뜬금없는 질문에 이네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흔히들 어린아이에게 선물을 줄 때, 가장 흔하게 고르는 품목이 사탕이며 초콜릿이었으니까.

에녹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어렸을 적, 초콜릿 한 상자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견과류와 말린 과일 등등이 들어가서 다양한 맛이 섞여 있었죠.”

“아, 저도 그거 받아 봤어요.”

에녹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을까 봐 경계했던 것도 잠시.

이네스는 어느새 두 눈을 반짝이며 에녹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생활 노출을 극히 꺼리는 서식스 공작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니.

결국 호기심이 승리하고 만 것이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맛은 속에 캐러멜이 들어가 있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어머니께서는 제게 하루에 한 개의 초콜릿만을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에녹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네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제가 어느 것부터 가장 먼저 먹었을 것 같습니까?”

“……음.”

이네스는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역시 가장 좋아하는 맛부터 먹었을까요?”

“아뇨, 반대입니다.”

그 대답에, 에녹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캐러멜이 든 초콜릿을 가장 늦게 먹었어요.”

“어째서요?”

“캐러멜 초콜릿을 먹을 때까지 기다리는 그 시간마저 즐거웠거든요.”

그 시절을 떠올리던 에녹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리고 백작의 그림은, 제게 있어 그 초콜릿과 비슷합니다.”

“……각하.”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즐거워지니, 그 즐거움을 조금 더 길게 누리고 싶군요.”

“…….”

이네스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그림을 저렇게 중요하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도 없었다.

한때 남편이었던 라이언마저, 이네스의 그림을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이용했을 뿐.

“제 그림이 각하께 그런 의미가 되었다니 정말 기쁘네요.”

이네스는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

“기대해 주셔도 좋아요, 최선을 다해서 초상화를 마무리할 테니까요.”

“음.”

그러자 에녹이 다소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백작에게 압박을 주려고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 건 아니고…….”

“알아요. 그만큼 제 그림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신다는 거잖아요?”

이네스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런 말은 다소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각하께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정말 기뻐요.”

순간 에녹은 귀 뒤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도 이네스는 그의 이상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격하게 뛰고 있는 제 심장 박동을 눈치챈다면, 이네스가 저렇게 말간 얼굴로 자신을 마주 볼 리가 없을 테니까.

“정말, 각하께 그렇게 귀여운 시절이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어요.”

“…….”

“그때의 각하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였을 거예요.”

그렇게 한참을 재잘거리던 이네스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만 돌아갈까요? 저는 오후에는 화방 거리에 방문해야 해서요.”

“……화방 거리요?”

“네, 아까 보니까 물감이 거의 다 떨어졌더라고요. 이왕 가는 김에 붓이랑 물통도 좀 볼까 하고요.”

순간 에녹이 두 눈을 빛냈다.

“그럼 저도 같이 가야겠군요.”

“네?”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람?

그런 의문을 담아서, 이네스가 에녹을 빤히 바라보았다.

에녹이 능글맞게 대꾸했다.

“설마 벌써 잊으신 겁니까? 제게 저녁 식사를 빚지셨잖아요.”

“어…….”

잠시 어리둥절했던 이네스가 입을 딱 벌렸다.

“설마, 예전에 아틀리에를 얻으러 갔을 때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맞습니다.”

“그거 그냥 농담 아니었어요?”

“저는 농담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만.”

에녹이 자세를 바로 하며 이네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백작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비록 장난스러움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에녹의 푸른 눈동자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특별한 감정을 가진 이성을 바라보는, 그러나 그 감정을 최대한 억눌러 차분함을 가장한 눈동자.

그리고 이네스는…….

‘거절해야 해.’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좋아요.”

차마 그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에녹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지었다.

“기쁘네요.”

순간 이네스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황혼이 내려 금빛으로 빛났던 거리와, 그 가운데에서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소년처럼 웃던 에녹.

그 순간이 생생하게 눈앞에 떠올라서.

사실은 그때부터 제가 에녹에게 끌렸던 것은 아닌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어 버렸기에.

“뭐, 제가 저녁 식사를 빚진 건 사실이니까요.”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이네스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몸을 돌렸다.

“얼른 가요. 화방에 들렀다가 저녁 식사까지 사 드리려면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요.”

그 말만 남기고, 이네스는 새침하게 먼저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마저도 지나치게 사랑스러워서.

하지만 제 마음의 속도를 이네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너무나도 잘 알아서…….

“…….”

에녹은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자꾸만 목이 탔다.

❀ ❀ ❀

오랜만에 방문하는 화방 거리는 여전히 북적거리고, 시끄러웠다.

좋게 말하자면 활기찼고, 나쁘게 말하자면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가난한 예술가들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샌드위치를 씹으며 걸어 다니고, 가끔은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예술 전반에 대해 두서없는 토론을 하기도 했다.

에녹이 새삼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는 항상 와 볼 때마다 새로운 모습이군요.”

“그렇죠? 그래서 여길 좋아해요.”

에녹과 나란히 걷던 이네스가, 그를 올려다보며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거리를 거침없이 뚫고 걸어가기를 한참.

두 사람은 마침내 화방에 도착했다.

화방 주인, 란트 부인은 무료한 얼굴로 먼지떨이를 휘두르는 중이었다.

화구들의 먼지를 털어 내는 모양새는 영 성의가 없었다.

“란트 부인!”

이네스가 반가운 얼굴로 란트 부인에게 달려갔다.

그녀를 발견한 란트 부인이 순간 기겁을 했다.

“이, 이네스! ……가 아니라, 브라이어튼 백작님?!”

아, 이런.

이네스가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란트 부인도 엘튼지를 읽어 본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네스의 미술전 출품과 이혼 소송은 그야말로 세간의 화제였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네스가 난처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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