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53)화 (53/120)
  • 53화

    ❀ ❀ ❀

    그리고 약 한 시간 후.

    이네스는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마차에 앉아 있었다.

    ‘어째, 메리가 엄청나게 의욕적이었던 것 같은데…….’

    차창 너머로 비쳐 보이는 스스로의 모습은 이네스 자신이 보기에도 꽤 아름다웠다.

    비록 엄청나게 힘을 줘서 꾸민 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고나 할까.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 모양과 얼굴에 생기를 더하는 화장까지.

    ‘괜히 메리 때문에, 공작 각하께서 오해하시면 어떡해.’

    속으로는 괜히 투덜거렸으나, 솔직히 그렇다 해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에녹을 만나면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던 중.

    ‘아.’

    저 멀리 아틀리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네스는 물끄러미 저택의 모습을, 더 정확히는 저택보다도 훨씬 새것처럼 보이는 정문을 바라보았다.

    일전에 이네스가 사람을 시켜 직접 문고리를 떼어 냈었기에, 예전의 정문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예 새로 문을 맞추었었는데…….

    “…….”

    진녹색 눈동자가 수많은 감정으로 깊게 가라앉았다.

    잠시 후.

    마차가 부드럽게 아틀리에 앞에 멈추었다.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인 이네스가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 아틀리에에는 여러 가지 끔찍한 기억들이 얽혀 있었다.

    회귀 전, 라이언과 샬럿에게 철저하게 짓밟혔던 장소이기도 하고.

    이번에도 이 아틀리에에서 샬럿과 라이언이 뜨거운 밤을 보내는 것을 목격했지 않은가.

    그러니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는 장소인데.

    실제로도 이 아틀리에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참 이상하지.’

    막상 에녹과 이 아틀리에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하니, 이 장소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틀리에를 향한 혐오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가슴속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올라, 풍선처럼 부푼다.

    ‘그럼 일단 화구들부터 정리해 볼까.’

    이네스는 빠른 걸음으로 그림 작업을 하는 방으로 향했다.

    기분이 유쾌해서 그런지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렇게 화구들을 정리하고 이젤을 끌어다 놓으며, 초상화를 그릴 준비를 하던 중.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가벼운 목소리가 이네스에게 말을 붙였다.

    화들짝 놀란 이네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고, 공작 각하? 언제 오셨어요?”

    “방금 도착했습니다.”

    에녹이 특유의 말끔한 낯으로 대답했다.

    당황한 이네스가 힐끔 벽시계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20분이나 남았는데…… 아니, 그보다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그야 현관이 열려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답한 에녹이 엄격한 시선으로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이참에 말씀드리지만, 백작. 제발 문단속 좀 잘하십시오.”

    “…….”

    “일전에도 아틀리에 문을 열어 두셨죠. 당시에는 백작이 함께 데리고 왔던 일꾼들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 계시지 않습니까.”

    “…….”

    “혹시라도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고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에녹과 처음 마주하자마자 듣는 게 잔소리라니.

    끝없이 이어지는 타박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이네스가 아직 철이 덜 들었던 소녀 시절, 부모님께 꾸중을 듣던 그러한…….

    “굳이 따지자면 이건 다 각하 탓이에요.”

    한참 잔소리를 듣다 못한 이네스가 볼멘소리로 말을 뱉었다.

    “각하를 기다리며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다가, 문단속하는 걸 깜빡한 거니까요.”

    “글쎄요, 그건 변명이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던 에녹이, 흘리듯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그 순간 이네스는 보았다.

    에녹의 수려한 얼굴 위로, 엷은 미소가 잔물결처럼 번져 나가는 모습을.

    “백작이 저와의 만남에 그렇게나 신경을 쓰고 계셨다고 생각하니, 그건 좀 기쁘군요.”

    “…….”

    이네스가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어서였다.

    초상화 작업을 고려해서일까, 에녹은 이전에 초상화 스케치를 했던 때와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비슷한 점은 또 있었다.

    가령, 애써 침착한 척하고 있음에도.

    이네스를 바라보는 짙푸른 눈동자에 담긴 들뜬 기색이라든지…….

    그런 에녹을 마주하며, 이네스는.

    ‘고양이 같아.’

    저도 모르게 고양이를 떠올리고 말았다.

    비록 겉으로는 새침한 척하지만,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주인의 발목을 몸으로 휘감는 고양이 말이다.

    ‘아니,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순간 이네스는 조금 민망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왕국 유일의 공작을 앞에 두고 떠올리기에는 다소 무례한 표현 아닌가.

    때마침 에녹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 나름대로 일찍 나온다고 나왔는데, 백작께서 먼저 도착해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

    “오래 기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그 말에 이네스는 고마움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꼈다.

    당연하게 이네스를 기다리게 하던 라이언과는 다르게, 에녹은 그녀가 기다릴 것을 걱정하여 약속 시간보다도 먼저 방문하지 않는가.

    두 사람이 이네스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비교가 되었기에…….

    “괜찮아요, 별로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닌데요.”

    상념에서 빠져나온 이네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이만 작업을 시작해 볼까요?”

    “그럽시다. 아, 그런데 브라이어튼 백작.”

    “네?”

    “아까 전부터 궁금했는데, 무엇이 그렇게 즐거우신 겁니까?”

    응?

    이네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질문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네? 즐겁다니, 뭐가요?”

    그녀를 마주 보는 에녹은 묘하게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제가 말을 붙이기 전까지, 계속 콧노래를 부르고 계셨지 않습니까.”

    헉.

    순간 이네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에녹이 그녀에게 가장 먼저 물었던 말은.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였었다.

    자, 잘 생각해 보니.

    아까 화구를 옮기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던 것 같기도 하고……?

    “콧노래를…… 제가요?”

    “예.”

    “거짓말 마세요! 저 그런 적 없어요!”

    그러자 에녹이 능글맞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와의 만남이 기대가 되셔서 그런 건 아니고요?”

    “아, 안 그랬다니까요!”

    이네스가 대번에 질색을 했다.

    그러자 에녹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예, 그렇다고 치죠.”

    “…….”

    이네스는 도끼눈을 뜨고 에녹을 흘겨보았다.

    솔직히 너무 창피해서 대뜸 발뺌부터 해 버렸지만, 콧노래를 흥얼거린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필이면 공작 각하께서 그것까지 다 들으실 줄은…….’

    다소 뾰로통한 얼굴이 된 이네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조금 안도하게 되는 건.

    ‘정말 다행이야.’

    일전의 초상화 작업 이후로, 혹여나 서로 어색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었는데.

    두 사람은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이리 와서 앉으세요.”

    미리 끌어다 둔 의자에 에녹을 앉힌 이네스가, 다시 한번 그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러던 중.

    “아, 잠시만요.”

    이네스의 손가락이 에녹의 옷깃을 매만졌다.

    일전 초상화 스케치에 그려졌던 옷의 주름을 다시 한번 만들기 위해서였지만.

    순간 에녹의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

    “…….”

    고작해야 옷깃을 정돈해 주는 것뿐인데, 왜 자꾸 분위기가 야릇해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애써 태연한 척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이네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에녹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네스가 정색을 했다.

    “안 돼요, 움직이면 자세가 흐트러진다고요.”

    “……죄송합니다.”

    자세를 반듯하게 고친 에녹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

    어느새 이네스는, 특유의 그림을 대할 때만 보이는 진지한 눈빛이 되어 있었다.

    “괜찮아요. 그대로 계세요, 알았죠?”

    다시 한번 신신당부를 한 이네스가 이젤 앞에 앉았다.

    순식간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가끔씩 물통에 붓을 적실 때 참방거리는 소리만이 간간이 울릴 뿐.

    그들 사이에 흐르던 묘한 분위기를 의식하던 모습은 간데없이, 이네스는 이제 오로지 초상화와 그 대상인 에녹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녹은 그런 이네스에게서 도무지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누군가에게 매혹된다는 게.’

    무릎에 올려놓았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에녹은 주먹을 꾹 움켜쥔 채, 홀린 듯이 이네스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런 감각이었군.’

    평생을 이네스를 바라보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림에 집중하느라 살며시 찌푸린 이마.

    가늘게 뜬 진녹색 눈동자.

    가끔씩 이젤 너머로 흘끗 고개를 들어 올려, 이쪽을 관찰하는 시선까지.

    오로지 그림에만 집중하여 몰입하는 이네스의 모습이, 그저 황홀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 이런.’

    순간 이네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오후 두 시가 넘었다.

    그들이 만난 후로 벌써 다섯 시간도 훌쩍 지난 것이다.

    그리고.

    ‘공작 각하.’

    바다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이네스를 올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를 인지한 순간.

    “…….”

    이네스의 시선이 짧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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