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런데 그때.
“고트 자작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네스의 측근 하녀인 메리였다.
고트 자작이 반색을 했다.
“백작께서 무어라 하시던가?”
“가주께서는 현재 오수에 들어 계십니다.”
“……뭐?”
자작이 미간을 좁혔다.
“백작위를 계승하신 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 간신히 얻은 휴식입니다. 그리하여 자작님을 뵐 수 없으니, 양해해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잠깐만. 그게 무슨…….”
“또한 보내 주신 선물은 잘 받았다고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방긋 웃은 메리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날이 차가워 몸이 상할까 염려되니, 고트 자작께서도 이만 타운하우스로 돌아가시지요.”
“이, 이봐. 나는 이번에 백작님의 얼굴을 꼭 뵈어야 하는데……!”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제 할 말만 마친 메리는 그대로 총총 사라져 버렸다.
고트 자작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제기랄!”
설마 정말로 이렇게 거절당한다고?
혹시나 싶어 한참을 타운하우스 앞을 기웃거려 봤지만, 도무지 정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고트 자작은 씩씩거리며 마차에 몸을 실었다.
“자작가로 돌아가자!”
그렇게 막 마차를 출발시키려던 순간.
‘응?’
고트 자작이 두 눈을 부릅떴다.
때마침 하녀 두엇이 타운하우스에서 쓰레기 바구니를 들고나왔기 때문이었다.
타운하우스의 쓰레기를 외부 공용 쓰레기통으로 갖다 버리려는 것 같은데…….
“아니, 아니. 잠깐만!”
고트 자작이 양손을 휘저으며 마부를 멈추었다.
막 마차를 출발시키려던 마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자작님?”
“조금만 기다리게!”
자작이 창문 너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녀들이 재잘재잘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가주님께서 주신 비단이랑 오리털 말이야. 넌 어디에 쓸 생각이야?”
순간 고트 자작이 눈썹을 꿈틀 굳혔다.
‘비단과 오리털이라고?’
모두 익숙한 재료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네스에게 갖다 바쳤던 곰 인형의 재료였으니까.
하녀가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사실 나 예전부터 비단 손수건을 갖고 싶었거든. 너무 비싸서 꿈도 못 꿨지만 말이야. 그래서 손수건을 만들어 볼까 하고.”
“좋은 생각이네! 그럼 손수건에는 무슨 수를 놓을 거야? 꽃? 아니면 덩굴무늬?”
“일단은 꽃무늬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
하녀들이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바구니의 내용물들을 쏟아부었다.
자작은 눈매를 좁히며 우르르 쏟아지는 쓰레기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건?’
거리가 멀어서 정확히는 잘 보이지 않지만, 어쩐지 쓰레기들의 면면이 눈에 익었다.
바구니를 탈탈 털어 낸 하녀가, 경쾌한 동작으로 쓰레기통 뚜껑을 닫았다.
“오리털도 엄청 고급이야! 나, 이번에 그 오리털을 넣어서 베개를 새로 맞추려고!”
“글쎄, 난 겨울 솜옷에 털을 덧대어 넣을까?”
“그것도 괜찮겠다. 엄청 따뜻할 것 같은데?”
마침내 하녀들이 타운하우스로 돌아가고.
고트 자작은 허겁지겁 쓰레기통 쪽으로 달려갔다.
‘설마……?’
느낌이 영 좋지 않다.
반사적으로 쓰레기통 뚜껑을 열어 본 자작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럴 수가!’
그 안에는 자기가 보냈던 인형이 갈기갈기 찢어져 처박혀 있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한때 인형이었던 옷감의 자투리 조각만 몇 개 널브러져 있었다.
보석으로 만든 눈은 온데간데없었고, 심지어는 인형의 속을 채웠던 고급 오리털마저 깃털 몇 오라기만 흩날릴 뿐.
“뭐? 선물을 잘 받았다고?!”
자작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쾅 소리가 나도록 쓰레기통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창문 너머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좋아.”
이네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트 자작가에서 보낸 쓰레기 같은 선물도 깔끔하게 해치웠고, 백작가의 하녀들도 즐거워졌으니.
돌 하나를 던져 두 마리 새를 잡은 셈이다.
‘평소였더라면 어떻게 고트 자작가의 성의를 무시하느냐며, 당장 득달같이 달려왔을 텐데.’
사업체에서 브라이어튼의 회수금이 빠지는 게 두렵기는 했나 보다.
저렇게 잔뜩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차마 이네스에게 직접 항의하지는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뭐, 그렇다고 투자금을 회수하지 않을 거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이네스는 홀가분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에녹과의 약속일이 다가왔다.
아직 새벽에 가까운 아침.
침대에 누운 이네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거야 원, 완전히 잠을 설쳤네.’
고작해야 초상화 작업을 마무리하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긴장되면서도 들뜨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린 시절, 오랫동안 고대해 왔던 소풍날을 맞이한 듯한 기분이었다.
에녹을 만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꾸만 심장이 빠르게 뛴다.
‘아니, 잠깐만.’
동시에 이네스가 미간을 좁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꾸 쓸데없는 생각 할래, 이네스?’
이럴 때에는 역시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는 게 제일이었다.
물을 흘려보내면서 생각도 함께 지워 버리는 것이다.
이네스가 결연하게 욕실로 향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녀가 했던 모든 노력은 모조리 소용없었는데.
‘공작 각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오히려 더 생각나는 것 같아…….’
막 샤워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오며, 이네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침실 안으로 들어온 메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주님, 벌써 일어나셨어요?”
그도 그럴 것이, 이네스가 어제 잠들기 전에 신신당부를 했었으니까.
절대로 늦잠을 자서는 안 된다고, 늦지 않게 깨워 달라고 말이다.
“그러게, 어쩌다 보니 잠에서 일찍 깼네.”
어설프게 웃은 이네스가 털썩 화장대 앞에 앉았다.
메리가 능숙한 손길로 이네스의 젖은 머리를 말려 주며 질문을 던졌다.
“오늘 머리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틀어 올려 줄래? 그리고 머리 장식은…….”
별생각 없이 보석함을 열었던 이네스가 순간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루비 핀을 꽂을까? 아니면 이 진주 쪽이 나은가? 음,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깔끔하게 머리 장식은 빼고…….”
보석함 안을 유심히 살펴보던 이네스가, 장신구들을 이것저것 집었다 놓았다 하기 시작했다.
그뿐이랴?
심지어는 장신구들을 여럿 골라 머리에 대 보는 둥, 온갖 수선을 떨어 댄다.
그런 이네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메리가 불쑥 입을 열었다.
“가주님, 무척 즐거워 보이시네요.”
순간 이네스가 움찔했다.
“그, 그래?”
“네. 무엇보다도…….”
메리는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주님께서 이렇게 치장에 신경 쓰시는 모습은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걸요.”
라이언과 결혼한 이래로, 이네스의 얼굴에서는 점점 미소가 사라져 갔다.
‘옷차림이 그게 뭐야? 한 가문의 안주인쯤 되면 검소할 줄도 알아야지.’
매번 그렇게 핀잔을 주는 통에, 라이언의 눈치를 살피느라 옷 한 벌 제대로 갖춰 입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들뜬 모습으로 몸치장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원래의 가주님으로 돌아온 느낌이야.’
라이언에게 억눌려 있던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아닌,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행복한 금지옥엽 말이다.
메리가 흐뭇한 얼굴로 재차 질문을 던졌다.
“누구 중요한 분을 만나러 가시는 건가요?”
“아…… 중요한 분이기는 한데.”
잠시 어물거리던 이네스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주님?”
“그, 머리 장식은 굳이 필요 없는 것 같아. 그냥…….”
이네스는 잠깐 망설였으나, 이내 결연하게 말을 맺었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수수하게 해 줘.”
“네? 이왕 외출하시는 건데, 기분 전환 삼아서 예쁘게 하고 나가시는 것도 좋지 않나요?”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이네스가 대번에 정색을 했다.
깜짝 놀란 메리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최대한 신경 쓰지 않은 것처럼 보여야 해. 알았지?”
이네스가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했다.
메리는 어리둥절했으나, 당사자가 그렇게 말하는데 굳이 억지로 치장시킬 수도 없는 노릇.
그렇게 아쉬운 마음으로 이네스의 머리를 빗질하던 중.
메리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애써 태연한 척,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있었지만.
이네스의 귀 뒤며 목덜미는 어느새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하.’
순간 메리는 깨달았다.
아마 이네스 자신도,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리가 보기에는, 적어도.
‘오늘 누구를 만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주님께서 무척 기대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메리가 결연하게 머리빗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이네스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거울 너머로 메리를 바라보았다.
“메리, 왜 그렇게 음흉한 표정이야?”
“음흉하다니요,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메리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주님께서는 그냥 마음 푹 놓으시고, 제게 맡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