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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51)화 (51/120)
  • 51화

    라이언이 대뜸 샬럿을 가리켰다.

    ‘저거 봐, 제이슨 남작 영애만 해도 저렇게 말씀하시잖아?’

    ‘샬럿도 그렇고, 다른 영애들도 인형을 좋아하나 보지. 그래도 취향은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으니까…….’

    그러자 라이언이 한심하다는 양 이네스를 흘겨보았다.

    ‘이네스, 언제까지 그렇게 또박또박 말대답을 할 거야? 귀염성이라고는 하나도 없군.’

    그러고는 가르치듯 말을 잇는다.

    ‘여자는 여자답게, 인형 같은 여성스러운 물건을 좋아해야지.’

    이네스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그건……!’

    ‘당신이 그렇게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구니까 매력이 없는 거야.’

    라이언은 들으란 듯이 쯧쯧 혀를 찼다.

    그 모욕적인 핀잔에, 이네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때마침 샬럿이 살살 눈웃음을 치며 라이언의 말을 받았다.

    ‘브라이어튼 백작께서 이해하세요, 우리 이네스가 집안에서 너무 오냐오냐 자라서 그래요.’

    그러고는 두 눈을 반짝이며 말을 덧붙인다.

    ‘이네스 곁에는 제가 있잖아요. 제가 여러모로 도와주면 되죠.’

    ‘정말, 이네스는 제이슨 남작 영애께 잘해야 합니다. 이런 친구가 세상에 또 어디 있다고요!’

    두 사람은 나란히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네스만이 어찌할 바 몰라 두 사람의 눈치를 살필 뿐.

    그때를 회상하자 자연스럽게 기분이 저조해졌다.

    이네스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저 인형은 그냥 갖다 버리렴.”

    “예? 그럴 거라면 돌려 드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아니, 돌려줄 필요조차 없어. 그냥 갖다 버리렴.”

    다시 한번 명령하던 이네스가 문득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녀가 아쉬운 얼굴로 인형의 귀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 탓이다.

    ‘아, 그렇지.’

    좋은 생각이 났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

    “네?”

    “그 인형, 꽤 고가의 물건 같은데. 이대로 버리기는 아쉬우니까…….”

    인형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이네스가 생긋 미소 지었다.

    “너희들끼리 알아서 처분하도록 하렴.”

    그러자 하녀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이네스에게 되물었다.

    “그, 그래도 되나요? 가주님께서 받으신 선물이고, 저희가 처분하기에는 너무 비싼 물건 같은데…….”

    “그건 걱정 마.”

    이네스가 양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선물을 어떻게 처분하든, 받는 사람 마음 아니겠니?”

    순간 하녀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네스가 재차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인형을 만든 재료들 자체가 무척 질이 좋더구나. 그러니 여러모로 사용할 수 있지 않겠니?”

    그 말에 하녀들이 두 눈을 반짝이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 ❀ ❀

    고트 자작은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브라이어튼의 타운하우스 밖에 서 있었다.

    ‘으, 추워 죽겠네.’

    자작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코트 자락을 여몄다.

    비록 초봄이라지만 밖에 오래 서 있기에는 아직 날씨가 쌀쌀하다.

    한시바삐 따뜻한 방 안으로 들어가 뜨거운 차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밖에 세워 놓을 생각이야?’

    이네스는 아직도 자작을 타운하우스로 부르지 않았다.

    고트 자작은 입 안으로 욕설을 짓씹어 삼켰다.

    ‘제기랄, 라이언 그 자식이 잘만 했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어제저녁.

    라이언이 잔뜩 술에 취한 채 타운하우스로 기어들어 왔다.

    이혼한 이후로 매번 술독에 빠져 살기는 했지만, 어제는 조금 이상했다.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어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쌔근거리는 것이다.

    ‘샬럿, 주제도 모르고 감히……!’

    ‘도대체 왜 그러는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고트 자작이 되물었다.

    그러자 라이언이 입술을 짓씹는가 싶더니, 비틀거리며 제 침실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형은 알 거 없어!’

    그때까지는 그냥 샬럿과 싸운 것이겠거니,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했으나.

    사건의 전말은 오늘 아침에 밝혀졌다.

    ‘이네스 그 계집애, 정말 웃기지 않니?!’

    고트 자작 대부인의 전 며느리의 뒷담과 함께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유난을 떨어, 응?!’

    자작 대부인은 식사에는 손조차 대지 않고, 짜랑짜랑하게 언성을 높였다.

    ‘언제는 우리 라이언이 좋아 죽겠다고 매달렸으면서, 이제 와서 이렇게 이혼해 버리면! 응?’

    탕탕탕!

    자작 대부인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식기로 마구 식탁을 두드렸다.

    ‘내 아들, 우리 라이언은 어떡하라고!!’

    ‘…….’

    ‘저 애를 좀 봐라. 이네스 그 계집애가 그렇게 매몰차게 구는 바람에, 매번 술만 퍼마시고 있고……!’

    자작 대부인은 그저 제 아들이 안쓰러워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으나, 고트 자작은 좀 달랐다.

    고트 자작은 비어 있는 라이언의 자리를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멍청한 자식.’

    이네스 브라이어튼이 누구인가?

    왕국의 그 누구라도 붙들고 싶어 하는 황금 동아줄이었다.

    랭커스터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의 후계에다가, 외모도 출중했고, 물려받은 재산도 막대했으며, 심지어 성격까지 순종적이었다.

    운 좋게 그 동아줄을 붙들었으면 어떻게든 놓치지를 말았어야지, 그새 그걸 놓쳐?

    가만히만 있었어도 계속 브라이어튼 백작으로 행세할 수 있었을 텐데!

    ‘휴, 어쨌든.’

    고트 자작이 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브라이어튼을 잃는 건 우리에게도 큰 피해니까, 조금 상황을 지켜보다가 대응하자고요.’

    그렇게 말한 자작이 짜증스레 제 어머니를 흘겨보았다.

    ‘도대체 어머니께서도, 왜 괜히 제수씨를 들쑤셔 놔서는…….’

    ‘아, 아니! 난 잘해 보려고 그런 거지!’

    자작 대부인이 발끈했다.

    ‘솔직히 걔가 라이언에게 이혼하자고 요구한 것 자체가 웃기지 않니?’

    ‘어머니, 제발.’

    ‘그래 봤자 부모도 없는 계집이잖아! 내 귀한 아들이 아내로 거둬 줬으면, 감사해하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자작 대부인이 마구 화를 내고 있던 그때.

    ‘자작님!’

    누군가가 우당탕 식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고트 자작의 개인 비서였다.

    ‘크, 큰일 났습니다!’

    비서가 와락 언성을 높였다.

    얼굴이 어찌나 창백한지, 툭 건드리면 그대로 정신을 잃을 것 같아 보인다.

    고트 자작이 미간을 좁혔다.

    ‘뭔가? 지금 식사 중인 것 안 보이…….’

    ‘지금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대리인이 찾아왔는데!’

    비서가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저희 사업체에 투자한 투자금을 모조리 회수한답니다!’

    ‘뭐라고?’

    고트 자작이 제 귀를 의심했다.

    비서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 차 있었다.

    ‘투자금이 모두 회수된다면 저희 사업체는 끝장입니다, 되살릴 수가 없어요!’

    ‘가, 갑자기 투자금은 왜!’

    기절할 것처럼 놀란 고트 자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솔직히 말해서, 이네스와 라이언이 이혼 수속을 밟았으니 차츰 사업 정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자금을 회수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고트 자작가의 사업체가 기반이 튼튼하다면 모르겠으나, 이렇게 급작스럽게 회수하는 건 거의 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유가 뭔가?’

    ‘그냥 브라이어튼 백작께서 그렇게 결정하셨다는 말만 할 뿐, 명확한 이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다만 뭐!’

    한참 망설이던 비서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이었다.

    ‘어제 고트 자작 영식께서, 백작님을 찾아가셨다가 문전 박대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는 합니다.’

    ‘뭐야?!’

    ‘심지어는 제이슨 남작 영애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답니다.’

    ‘도대체 라이언 그 자식,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그렇게 고트 자작은 절규했고.

    전후 사정을 알게 되고 나서는, 허겁지겁 브라이어튼 백작가로 쫓아오게 된 것이다.

    ‘아냐, 괜찮을 거야.’

    고트 자작은 애써 초조한 마음을 다독였다.

    선물도 준비했고, 이네스를 무어라 설득할지도 대충 정해 두었다.

    라이언이 어제 이네스에게 했던 일을 반성하고 있다.

    이네스를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에,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보고 행동이 앞서 무례를 저지른 것이다.

    오늘도 차마 면구하여 찾아오지 못한 것뿐, 대신 이 선물을 직접 마련해서 함께 들려 보냈다.

    라이언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이네스와의 재결합이니, 정성을 봐서라도 다시 마음을 되돌려 달라…….

    ‘어떻게든 제수씨를 설득해야만 해.’

    고트 자작은 굳게 마음을 다졌다.

    현재 사업체가 파산하는 걸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지원뿐이었다.

    ‘어쨌든 제수씨가 라이언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건 사실이니까…….’

    아마 적당히 구슬리면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자작은 짧게 혀를 찼다.

    ‘어휴, 당분간은 라이언에게 좀 숙이고 살라고 말해 둬야지.’

    이미 자작의 머릿속에는, 이네스와 라이언이 재결합한 미래가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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