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50)화 (50/120)
  • 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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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아침.

    이네스는 별렀던 일을 마침내 해치웠다.

    그건 바로.

    “서류들을 좀 살펴보니, 고트 자작가의 사업체에 투자한 금액이 상당한 것 같은데.”

    “예, 그렇습니다. 전 백작님께서 최우선으로 금액을 투자하라 하셔서…….”

    아침 일찍부터 불려 온 대리인은, 눈동자를 굴리며 이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라이언이 브라이어튼 백작으로 행세했던 그 기간 동안, 고트 자작가로 흘러간 자금이 상당했다.

    ‘라이언, 정말 가지가지 했네.’

    짧게 조소한 이네스가 선언했다.

    “그 투자금들은 이제 그만 모두 회수하도록 해.”

    그 말을 듣자마자 대리인의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알겠습니다!”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에 이네스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저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하지만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여태껏 고트 자작가에 투자한 자금은 그야말로 눈먼 돈에 가까웠으니까.

    라이언이 브라이어튼 백작의 지위를 남용하여, 브라이어튼의 돈으로 망하기 직전의 사업을 간신히 살려 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백작님. 투자금의 규모라도 조금 줄이시는 게…….’

    그를 보다 못한 대리인은, 아직 라이언이 백작이던 시절 조심스럽게 건의해 보았으나.

    ‘시키는 대로나 할 것이지, 어딜 감히 입을 대?’

    돌아온 것은 라이언의 무례한 폭언뿐이었다.

    그리하여 브라이어튼의 자금이 줄줄 새는 것을 그저 눈 뜨고 바라보고 있어야 했는데.

    드디어 자금을 회수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뭐? 벌써?”

    “예. 최대한 빨리 자금을 회수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니까요. 당장 나가도 모자랍니다.”

    이네스가 두 눈을 깜빡였다.

    그, 나는 오늘 당장 회수하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의욕에 가득 찬 대리인에게 굳이 찬물을 끼얹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한시바삐 투자금을 빼는 건 이네스도 원하는 일이었기에.

    “좋아. 수고하게.”

    이네스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하여 대리인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서재를 빠져나간 후.

    이네스는 힐끔 책상에 놓인 달력을 바라보았다.

    “……벌써 내일이네.”

    에녹을 만나 초상화 작업을 재개하기로 한 날짜가 코앞이었다.

    “…….”

    이네스는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참 이상하다.

    에녹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그가 떠오른다.

    제멋대로 달음질쳐 나가는 마음은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아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온 머릿속을 에녹에 대한 생각으로 꽉 채워 버린다.

    ‘됐어.’

    고개를 저은 이네스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쓸데없는 고민 말고, 그냥 푹 쉬자.’

    브라이어튼 백작 작위를 되찾은 후 이런저런 일들을 정리하느라, 요 며칠 제대로 쉰 적이 없는 것 같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네스는 곧장 서재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런데.

    “메리?”

    이네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찬가지로 놀란 토끼 눈이 된 메리가 문밖에 서 있었다.

    양손에는 다과와 찻주전자를 그득하게 쌓아 올린 쟁반을 받쳐 든 채였다.

    “그게 다 뭐야?”

    “오늘 아침 식사조차 거르시고 일하셨잖아요. 그래서 요기가 될 만한 것을 좀 준비해 봤는데…….”

    “아하, 내 걱정 해 준 거야?”

    이네스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어떡해? 나 오늘은 가주 업무 파업인데. 좀 쉴 거야.”

    “그래요? 오히려 잘됐네요.”

    반색을 한 메리가 냉큼 몸을 돌렸다.

    “그럼 주방에 아침 식사를 준비하라고 언질을 넣을게요.”

    “뭐? 아니야, 그냥 지금 갖고 온 차만 마셔도 되는데…….”

    “아니죠.”

    힐끔 뒤를 돌아본 메리가 엄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쉬시려면 일단 잘 드시기부터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거니?”

    “네, 그런 거예요.”

    씩 웃어 보인 메리가 얼른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그 후.

    이네스는 오랜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이네스가 좋아하는 스크램블드에그와 갖가지 과일을 곁들인 아침 식사를 즐긴 후.

    볕바른 창가에 앉아 햇볕을 쪼이며 독서를 했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따끈한 찻잔에서 향기로운 차 향기가 퍼져 나왔다.

    그렇게 평화롭게 하루가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 뜻밖의 사람이 타운하우스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 가주님.”

    “무슨 일이야?”

    한가롭게 책을 읽던 이네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녀는 드물게 난처한 얼굴이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

    오늘은 아무런 약속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고개를 갸웃하던 이네스가 순간 미간을 좁혔다.

    “혹시 고트 자작가의 사람이니?”

    “……네.”

    오히려 하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이네스가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이것 참, 사람이 이렇게도 뻔뻔할 수가 있구나.”

    이네스가 투자금을 건드리지 않았을 때에는 먼저 연락조차 하지 않은 주제에.

    심지어는 어젯밤 라이언이 부렸던 추태에 대해서도, 사람을 보내어 사과하는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투자금을 빼자마자 헐레벌떡 연락을 하는 꼴이란…….

    ‘어쩌면 이렇게나 속이 빤히 보이도록 행동할 수가 있지?’

    짧게 혀를 찬 이네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편지라도 보내온 거라면, 읽을 필요조차 없으니 그냥 벽난로에 던져 버리렴.”

    “그게…… 고트 자작께서 직접 찾아오셨어요.”

    “고트 자작이?”

    이네스는 처음으로 조금 놀랐다.

    고트 자작.

    라이언의 형이자, 한때 이네스의 시숙이었던 사람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점잖은 신사인 척하지만, 사실 이네스는 고트 자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매번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모습이 꼴같잖았기 때문이었다.

    ‘제수씨, 우리 가문이 최근 사업을 하나 하고 있는데요. 자금이 조금 모자라서…….’

    고트 자작이 사람 좋게 웃으며 은근슬쩍 운을 떼면, 라이언이 가장 먼저 냉큼 미끼를 물었다.

    ‘우리 형이 그러는데, 그 사업체가 정말 탄탄하대!’

    거기다 고트 자작 대부인도 기다렸다는 듯이 합세했다.

    ‘가족이잖니. 당연히 투자해 줄 거지?’

    ‘아, 하지만 그 부분은 저희 가신들과 상의를 좀 해 보고…….’

    ‘아니, 가신들이 뭐가 중요해?

    가슴을 탕탕 치며 호탕하게 웃던 라이언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걱정 마, 내가 백작가의 가주인걸. 내 허락만 있으면 뭐든지 다 돼!’

    ‘아니, 잠깐만. 그건…….’

    ‘가족끼리 이 정도 투자는 당연한 거잖아. 그렇지, 이네스?’

    그렇게 고트 자작 일가는 은근슬쩍 이네스에게 대답을 강요했었다.

    그때를 회상하던 이네스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낮잠을 자고 있어서 만나지 못한다고 하렴.”

    다른 일도 아니고, 고작해야 낮잠을 자느라 찾아온 손님을 만나지 못한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댈 만큼, 노골적으로 상대방을 만나기 싫다고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녀의 난감한 얼굴은 도무지 밝아지지를 않았다.

    “그, 그래도 한 번 가주님께서 직접 보셔야 할 것이 있어요.”

    “무엇 때문에 그러니?”

    “그…… 고트 자작께서 방문 선물이라고 보내오신 물건이 있어서요.”

    “선물?”

    전혀 상상치도 못한 대답이었다.

    이네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갖고 와 보렴.”

    그리하여 하녀 두 명이 낑낑대며 맞들고 와, 이네스 앞에 내려놓은 물건은…….

    “설마 이게 선물이라는 거니?”

    정말? 진짜로?

    이네스는 뜨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에…….”

    하녀들은 저들이 더 민망한 얼굴이었다.

    쓸데없이 화려한 포장지를 벗겨 내자, 그 안에서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물건은.

    “세상에, 곰 인형이라니.”

    과장을 조금 보태서, 이네스의 키만 한 곰 인형이었으니까.

    최고급 비단을 재단하여 만들었고, 목에는 고급스러운 공단 리본을 감고 있었으며, 눈에는 사파이어를 박아 넣었다.

    정말 값비싸고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대충 이 선물의 의미는 알 것 같았다.

    ‘이 정도로 비싼 선물까지 갖다 바쳤는데, 설마하니 날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은근슬쩍 이쪽을 압박하는 것이다.

    때마침 하녀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아 참, 고트 자작께서 말씀을 꼭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무슨 말?”

    “그게…… 이 인형은 고트 자작 영식께서 가주님을 생각하며 직접 고르신 물건이라고요.”

    “아하.”

    이네스는 그제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예전, 라이언과 아직 부부였던 시절.

    샬럿을 불러다 함께 티타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샬럿이 방문하자마자 응접실을 기웃거리던 라이언은, 기어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 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라이언이 대뜸 입을 연 것이다.

    ‘여자들 선물로는 인형이 최고지. 안 그래?’

    이네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음, 물론 인형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 다만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그래? 이네스 너 참 성격도 이상하다.’

    그러자 샬럿이 득달같이 이네스의 말을 뚝 잘라먹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인형 좋은데! 귀엽잖아?’

    ‘아니, 나도 귀엽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수세에 몰리는 기분에, 이네스는 어찌할 바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애초에 모든 여성들이 인형을 무조건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네스만 해도, 어렸을 적부터 인형보다는 화구들을 갖고 노는 편을 좋아했었고 말이다.

    ‘어떻게 여자가 인형을 싫어할 수가 있지?’

    ‘백작님 말씀이 맞아. 솔직히 내 주변 영애들 중에서도, 인형을 싫어한다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는걸.’

    하지만 라이언과 샬럿은 마치 이네스가 이상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몰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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