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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49)화 (49/120)
  • 49화

    “이, 이네스!”

    라이언이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마차에 앉아 있던 이네스가 한심한 시선으로 라이언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하네.”

    “……뭐?”

    “다른 사람의 자택에 찾아올 때에는 미리 약속을 정하고, 너무 늦거나 이른 시간에는 방문하지 않는 게 예의인데.”

    얼빠진 얼굴의 라이언을 향해, 이네스가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런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게 여전하다고.”

    “…….”

    얼굴을 맞대자마자 숨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독설에, 라이언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 안 돼.’

    기껏 운 좋게 이네스를 마주쳤는데, 이대로 멍하니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라이언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 샬럿 말이야.”

    “샬럿?”

    “요새 샬럿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 같은데, 그거 다 헛소리야.”

    라이언이 허겁지겁 말을 이었다.

    “내가 샬럿을 먼저 유혹했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

    “설마 그런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지? 응?”

    중언부언 말을 늘어놓던 라이언은, 머리에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시 한번 분노가 치민 탓이다.

    라이언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오히려 샬럿이 내게 먼저 꼬리를 친 거지!”

    “…….”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야, 잠시 내가 미쳐서 딴눈을 팔긴 했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주변 공기 때문에 그야말로 질식할 것만 같다.

    라이언은 쥐어짜 내는 목소리로 이네스에게 애원했다.

    “내게는 오로지 너뿐이라고!!”

    이네스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라이언을 바라볼 뿐,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라이언은 심장이 죄이는 듯한 조마조마함을 느꼈다.

    ‘왜 저렇게 조용한 거지?’

    차라리 무어라 화를 내거나 대꾸라도 해 주면 좋을 것을…….

    그런데 그때.

    이네스가 경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데, 샬럿?”

    동시에 라이언의 얼굴이 와락 찌그러졌다.

    ‘샬럿이라고?!’

    라이언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 서 있던 샬럿이 두 눈을 부릅뜨며 라이언을 노려보았다.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쏘아붙인다.

    “라이언,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샬럿은 이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고려하여 부르던 ‘고트 자작 영식’이라는 호칭까지 모조리 집어치운 상태였다.

    샬럿이 재차 짜랑짜랑하게 고함을 내질렀다.

    “여태까지 내 연락을 매번 무시했잖아! 내가 당신을 이렇게까지 찾아다니게 해야겠어?!”

    위컴 남작부인의 티타임 이후.

    며칠을 두문불출하며 고민한 결과, 샬럿은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내가 쓰레기가 되고 말 거야.’

    하지만 이미 이네스에게는 완전히 창피를 당한 상황.

    이네스를 설득하는 건 글렀거니와,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끈은 라이언뿐.

    ‘어디 명문가의 영식도 아니고, 고작해야 고트 자작가의 차남에게 매달려야 한다니!’

    하지만 이미 샬럿을 둘러싼 소문이 너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괜찮은 영식들을 소개해 줄 만한 귀부인들에게도 이미 미운털이 박히고 말았으니, 대안이 라이언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도대체 라이언은 왜 연락이 안 되는데?’

    이네스와 이혼한 후로, 라이언과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치 일부러 샬럿을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설마, 그럴 리가.’

    불안한 마음에, 샬럿은 라이언이 자주 다니던 술집들을 이리저리 뒤져 보았다.

    ‘라이언 그 자식, 꼬랑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허겁지겁 뛰쳐나가던데요.’

    ‘뭐,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다시 받아 달라며 애원이라도 할 속셈 아닐까요?’

    술에 잔뜩 취한 사내들은 조롱 섞인 목소리로 제각기 떠들어 댔다.

    그리하여 혹시나 하는 심정에, 브라이어튼의 타운하우스로 한번 찾아와 봤는데.

    ‘아니, 라이언이 왜 여기 있어?!’

    샬럿은 두 눈을 부릅떴다.

    타운하우스로 들어가려는 마차를 가로막은 채, 라이언이 실랑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발, 날 좀 믿어 줘. 응?”

    라이언이 간절한 눈빛으로 마차에 탄 이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샬럿은 맹세코 라이언의 저런 표정을 처음 보았다.

    샬럿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일 때도, 몸을 섞으며 함께 절정으로 치달을 때도.

    라이언은 언제나 자신이 주도권을 쥔 것처럼 굴었다.

    ‘단 한 번도 날 저런 식으로, 저렇게 절실하게 원했던 적은 없었는데!’

    치받는 분노 때문에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샬럿은 들으란 듯이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왜, 잘난 브라이어튼 백작님께 더 애원해 보지 그래?”

    “샬럿, 너!”

    “그러다가 아예 백작님의 구두라도 핥겠어. 응?”

    그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라이언은 찔린 낯을 했으나, 그것도 잠시.

    라이언은 대번에 뻔뻔한 표정이 되어 샬럿을 마주 보았다.

    “내가 이네스에게 애원하건 말건 네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뭐?”

    샬럿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라이언이 입술 끝을 비스듬히 비틀어 올렸다.

    비열한 미소였다.

    “네가 나한테 뭐라고 나에게 그런 걸 따지는데?”

    “라이언, 너 지금 뭐라고……!”

    “정신 차려, 샬럿. 넌 나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라이언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샬럿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애초에 네가 이네스와 어울리는 급이라고 생각해?”

    “라이언!”

    샬럿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라이언이 재차 샬럿을 비웃었다.

    “이네스는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가주인데, 넌 어때?”

    “너, 너……!”

    “탈탈 털어 봐야 먼지밖에 안 나오는 제이슨 남작가의 외동딸 아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샬럿이 꾹 어금니를 깨물었다.

    라이언은 그런 샬럿을 윽박질렀다.

    “그런 주제에, 감히 내가 널 먼저 유혹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려?”

    “나,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사랑? 웃기지 마!”

    라이언이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양을 지켜보던 이네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라이언과 샬럿은 이네스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저들끼리 옥신각신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아? 너 때문에 이네스와 이혼한 거야!”

    라이언이 샬럿을 향해 마구 삿대질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화가 나서 죽겠는데, 감히 그따위 헛소문을 퍼뜨려?!”

    “라이언, 그건……!”

    “그 헛소문 때문에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아!!”

    샬럿은 무어라 항변하려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뿐이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모욕적인 말에 넋이 나간 탓이다.

    게다가 상대가 오랫동안 연애 행각을 벌였던 라이언이었으니 그 충격은 무척 컸을 터.

    “…….”

    이네스는 샬럿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멸감에 바들바들 어깨를 떠는 샬럿의 모습은 꽤 애처로웠으나, 그렇다 하여 샬럿을 감싸 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대신, 이네스는 회귀 전 과거를 곱씹었다.

    ‘그렇게나 세기의 사랑인 척했으면서.’

    이네스가 얻어 준 아틀리에에서, 서로 입술을 비비고 몸을 섞었으면서.

    그에 충격을 받은 이네스를 마음껏 비웃었으면서.

    저렇게 얄팍한 사랑이었던 주제에…….

    “가자.”

    더 쳐다보고 있을 것도 없었다.

    마부에게 명령을 내리자,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운하우스의 문이 열렸다.

    “이, 이네스!”

    뒤늦게 이네스가 타운하우스로 들어가는 것을 눈치챈 라이언이, 허겁지겁 마차 쪽으로 따라붙었으나.

    “그만 돌아가세요, 고트 자작 영식.”

    이네스의 냉랭한 말에 그 자리에 멈춰 서야만 했다.

    “물론 더 난동을 부리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요. 다만.”

    얼빠진 얼굴의 라이언을 일별하며, 이네스가 생긋 눈매를 휘어 보였다.

    “치안대에게 신고할 테니 그리 아세요.”

    “자, 잠깐만. 그게 무슨…….”

    “또한 저는 고트 자작 영식에게 제 이름을 허락한 적 없으니, 앞으로는 제게 예의를 갖춰 ‘브라이어튼 백작’이라고 부르도록 해요.”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서늘한 미소였다.

    “고작해야 자작가의 차남 주제에, 백작가의 가주 본명을 함부로 불러 대는 건 너무 교양 없는 짓이잖아요. 그렇죠?”

    그 말을 끝으로, 이네스의 마차는 타운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촤르륵-찰캉!

    철제문이 닫혔다.

    “자, 잠깐만! 조금만 기다려……!”

    라이언은 어떻게든 이네스와 좀 더 대화를 나누려 했지만, 모조리 헛수고였다.

    “그만두시죠.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자택으로 돌아가세요.”

    “자꾸만 이러시면 정말로 치안대에 신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비들이 험악한 얼굴로 라이언을 가로막은 것이다.

    라이언은 망연한 시선으로 멀어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으나, 차마 아까처럼 ‘이네스’라며 함부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는 못했다.

    그 고요함이 이네스는 썩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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